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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용석 Dec 28. 2016

법치주의

악인에게 왜 '법'을 빼앗아 올 수 없는가에 대한 대답

법학 첫 수업에서 들은 뒤 지금까지 굉장히 좋아했던 한 이야기가 있다.


한 마을에 악마가 찾아왔다. 악마는 사람들을 너무나 괴롭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힘을 합쳐 그 악마를 마을에 있는 숲까지 몰아내었다. 악마는 숲에 심겨 있던 나무 뒤에 숨었다. 악마 때문에 너무나도 화가 나고 분노한 사람들은 그 악마를 잡기 위해 나무를 다 베어내고 악마를 잡아 없앴다. 사람들은 환호했다. "우리가 악마를 잡았다!" 기쁨도 잠시, 마을에는 사람들을 죽이려는 악마가 찾아왔다. 숨을 나무가 없어져 버린 사람들은 모두 악랄한 악마에 의해 죽어갔다.


한동안 이 이야기의 근원을 찾아 헤맸는데, 미국 한 중고서점에서 이야기가 써진 책을 보고 너무나 기뻐서 책을 구매한 생각이 난다. Reference: Liam N. Eskridge, Jr, 『Constitutional Stupidities, Constitutional Tragedies』, New York University Press, 116-17.

Liam N. Eskridge, Jr, 『Constitutional Stupidities, Constitutional Tragedies』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어떤 생각이 드는가? 마을의 사람들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고, 악마가 나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사실 이 이야기에서 '마을'은 우리 사회를, '악마'는 우리 사회의 악인을, '나무'는 법을 뜻한다.

 

요즘 많이 받는 이야기와 질문은 '답답함'에 기반하는 거 같다. 최근 박근혜 게이트(혹은 최순실 게이트)를 기점으로, 권력을 사유화한 것이 확실한 권력자를 처벌하는 데에 너무나 많은 절차와 지나친 법의 보호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볼멘소리가 많다는 것은 시민들의 답답함을 전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예를 들어, 최근 최순실 씨를 비롯해 주범자들이 소환을 거부하여 특검 조사에 응하지 않고 있는 점은 많은 이들의 분노를 일으켰다. 과연 이들에게도 법의 보호는 필요한 것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진짜 법치주의인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들 수밖에 없다.


먼저 논의를 시작하며 '법치주의'에 대한 정의를 시도할 필요가 있다. '법치'는 '인치'의 반대말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인치'란 무엇인가? '인간에 의한 다스림'이 인치(人사람 인 治 다스릴 치)이다. 눈치가 빠른 독자들은 재빨리 이해했겠지만, 이에 따라 당연히 '법치'는 '법에 의한 다스림'이다. 법치(法 법 법 治 다스릴 치). 인간 역사에서 대부분의 권력의 시작은 '인치'에서 시작되었다. 다시 말해 '왕정'이나 '귀족정'과 같은 사람이 다스리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가 계속되면 계속될수록, 인치는 법치의 모습으로 변화되었다.


인치(人治)→법치(法治)


인치를 뒤로 한 채, '법치'의 완전한 제도화를 이야기하는 것을 '법치주의'라고 쉽게 이야기할 수 있겠다. 더 이상 왕이나, 절대적 권력자에 의해서 통치받는 것이 아니라 '법'이라는 고정된 문자의 조합에 의해서 통치되는 것을 법치주의라고 한다.


법치는 인간이 어떻게 시스템을 운영하는 것이냐가 아니라 '법'이 '법'을 운영하게 만드는 것을 그 핵심으로 한다. 인간이 법을 남용하게 하는 시스템은 법치가 아니라 인치이다. 인간이 법을 마음대로 해석하는데에서 인치주의는 시작된다.


법치주의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절차적 정당성'이다. 절차적 정당성이라는 말은 참 아름다우면서도 무서운 말이다. 아무리 옳은 것을 하더라도 '절차'를 지켜야 한다는 말이다. 


『정의론』에서 존 롤즈는 '절차적 정의'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의 이론 전체에서 제도를 직접 운영하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다. 다시 말해, 정치 시스템에서 그는 철저하게 인간을 믿지 않는다는 거이다. 인간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철저하게 제한해야 한다는 것, 개인의 신념을 어떻게 믿느냐는 것이 바로 그의 정치철학과 법철학을 뒷받침하고 있는 이론이다.


롤즈와 마찬가지로, 인치에서 법치로의 변화는 인간에 대한 '불신'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이를 Human Depravity라고 부를 수 있겠다. 최근 'Constitutional Law' 과제 소논문을 쓰면서 서론에 짧게 이 Human Depravity를 이야기 한 부분이 있다.


In 1887, in England, at the letter to Bishop Mandell Creighton, Sir John Dalberg-Acton wrote very famous phrase "Power tends to corrupt, and absolute power corrupts absolultely. Great men are almost always bad men." This short phrase has very important meaning in it, and also it substantially affected and changed society. It also substantially affected to the Constitution. Similar as Sir Acton, the biggest concern of the founding fathers who established the Constitution was human depravity...

본인의 소논문에서 발췌


영국의 액튼 경이 이야기했다. "권력은 부패하고,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 훌륭한 사람은 언제나 항상 나쁜 사람이다." 슬프게도 이 말에 있는 개념이 바로 현대사회의 모든 시스템을 가장 핵심적으로 뒷받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쉽게 잊어버린다. 우리는 '사람'에 열광하고, '사람'을 믿으며,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법치주의는 인간에 대한 깊은 불신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인간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고정된 '법'을 믿고 권력을 가진 인간을 '통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논리로 삼권분립이 있겠다.)


법치주의에 대해 우리에게 또 하나의 큰 교훈을 주는 것은 '프랑스혁명(French Revolution)'이다. 프랑스혁명을 공부하면서 가장 많은 도움을 받았던 에드먼드 버크의 "프랑스혁명에 관한 성찰"에서 보수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버크는 영국인으로서 프랑스혁명을 비판하며 이런 말을 한다. "자유, 평등, 박애를 앞다투어 내세우고 헌법에 적어내며 자유, 평등, 박애가 아닌 길로틴(단두대)으로 왕과 왕비의 목을 벤 광기의 사람들" 버크는 프랑스 국민들이 추구하는 가치가 있는데, 그들이 역설적이게도 그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서 그 가치와 상반된 과정을 가진 것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것이다.


출처: 에드먼드 버크, 이태숙 역, 『프랑스혁명에 관한 성찰』, 2008, 한길사.

Reference: Edmund Burke, 『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France』, Oxford Press.


이는 법치주의 개념의 핵심 개념인 '절차적 정당성'의 내용을 담고 있는 부분이다. 아무리 좋은 가치를 추구하더라도, 절차적으로(그 당시 법에 따라) 정당하지 않으면 그 이후에 '법'이 다시 어겨질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이다. 나쁜 법을 위해 '법'을 어기면, 새로운 법 역시도 어겨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보여주듯이 프랑스혁명 직후 다시 왕정은 부활하기도 했다.


다시 첫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한 마을에 악마가 찾아왔다. 악마는 사람들을 너무나 괴롭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힘을 합쳐 그 악마를 마을에 있는 숲까지 몰아내었다. 악마는 숲에 심겨 있던 나무 뒤에 숨었다. 악마 때문에 너무나도 화가 나고 분노한 사람들은 그 악마를 잡기 위해 나무를 다 베어내고 악마를 잡아 없앴다. 사람들은 환호했다. "우리가 악마를 잡았다!" 기쁨도 잠시, 마을에는 사람들을 죽이려는 악마가 찾아왔다. 숨을 나무가 없어져 버린 사람들은 모두 악랄한 악마에 의해 죽어갔다.


우리는 '나무'를 자르고 싶다. 나쁜 사람이 '법'의 뒤에 숨어, 혹은 '법'을 이용하여 자신을 보호할 때 분노가 일어난다. 마음에서 프랑스혁명의 뜨거운 피가 끓어오른다. 하지만, 우리는 그 나무를 잘라선 아니 된다. 언젠가, 우리가 그 나무 뒤에 숨게 될 날이 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악인'을 처벌하기 위해 '법'을 무시하게 되면, 언젠가 내가 '법'에 의해서 보호받아야 할 때 누군가 역시 '법'을 무시하게 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법치주의는 얼핏 보면 멋진 개념 같지만, 사실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괴롭고 힘든 개념이다. '법'은 나에게 적용되면서 동시에 '악인'에게도 적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과 동시에 갈보리 언덕 위의 살인자를 위해서도 십자가를 지셨던 것처럼...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정의에 대한 요구는 '어둠의 시대'에 더욱 부각된다" 정의가 부각되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부정 의한 곳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부정 의한 시대에 있다. 이는 자명하다. 막스 베버(Max Weber)가 이야기했듯이  카리스마적 리더가 없더라도 시스템이 잘 운영될 수 있게 하는 것”이 제도화의 목적이자 법치주의가 가야 하는 길이며, 다시 말해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길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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