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타고 있던 의사 선생님은 모른 척할 수 있을까?
“혹시 탑승객 중에 의사가 있으십니까?
비행기 운항 중에 응급환자가 발생했습니다.”
가끔 비행기를 타면, 이런 상황을 상상하곤 한다. 실제로 겪어본 적은 없지만, 영화를 보거나 요즈음은 드라마에서도 자주 나타나는 극적인 장면이다. 비행 중인 기체에서 환자가 발생하고, 승무원은 의사 승객을 찾는다. 지적인 안경과 흰 셔츠를 입고 있던 의사 승객은 퍼스트 클래스 좌석에서 서둘러 뛰어와 맥박을 잡고 응급조치를 취한 뒤 위험했던 승객에게 응급조치를 취한다. 모든 사람들은 긴장하며 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이를 지켜본다. 결국 치료가 끝나고 사람들은 의사에게 박수를 보낸다. 의사는 당연히 했어야 하는 일을 했을 뿐이라고 말하며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내가 법을 공부하지 않았더라면, 이 상황을 보며 ‘아 의사는 참 좋은 직업이야’, ‘멋있다 의사 선생님’이라고 생각하며 넘어갔겠지만...
법을 공부하고 있는 내겐 약간 삐딱한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승무원이 위급상황에서 의사를 찾았는데, 좌석에 앉아있던 의사가 귀찮거나 자신이 없어서 손을 들지 않았다면?’ 그럴 때 의사에게는 어떤 법적 책임이 있을지에 대한 생각 말이다.
미국 형법에서 범죄는 Actus Reus(신체적 행동)과 MensRea (Mental State: 의도)를 중심으로, 두 가지 요소(Actus Reus와 Mens Rea)의 동시발생(Concurrence), 사회적 피해라는 결과 그리고 그 사이에 인과관계를 통해 구성된다.
Actus Reus(신체적 행동)은 두 가지로 분류되는데, 그 두 가지는 작위(Voluntary Act)와 부작위(Legally Obligated Omission)이다.
쉽게 말해, 앞의 예에서 나온 의사 선생님이 손을 들고 나와서 환자에게 응급조치를 하는 행동은 자발적, 적극적 행동으로서 ‘작위’다. 반면, (의사에게 법률적으로 위급 승객에게 응급조치를 취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가정하자) 응급상황에서 손을 들지 않고 자신이 의사임을 숨긴 채 응급조치를 하지 않은 것은 부작위라고 볼 수 있겠다.
결론부터 말하면, 비행기에서 위급한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을 보고서 그저 함께 탑승해 있던 의사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아서 해당 승객이 죽은 경우 해당 의사에게는 아무런 법적 책임도 없다.
미국법은 단지 도덕적 책임에 의해서 형사적 처벌을 가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드시 법적 책임에 따른 의무가 존재해야 한다. 심지어 손만 까딱해도 되는 아주 쉬운 일 일지라도 법적 의무가 없다면 형사적 처벌 또한 받지 않는다.
부작위가 범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들이 있다.
1) ‘법’에 의해서 법적 의무가 주어지는 경우 (예를 들어 납세의 의무나 병역의 의무)
2) ‘계약’에 의해서 법적 의무가 주어지는 경우 (예를 들어, 간호사 혹은 수영장 안전요원)
3) ‘관계’ 자체가 법적 의무를 부여하는 경우 (예를 들어, 부모 혹은 부부관계)
4) 법적 의무가 Voluntary Assumption of the duty of care의 결과로써 나온 경우 (예를 들어, 아무런 조건 없이 선의로 주 1회 방문해서 계속해서 건강을 확인해주던 착한 동네 보건의)
5) 위험을 만들어 대상이 내가 만든 그 위험에 빠진 경우 (예를 들어, 수영을 못하는 것을 아는 A가 B를 바다 한가운데로 빠뜨린 채 구조하기 위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경우)
우리는 때로 이러한 부분에서 쉽게 오류를 범하는 것 같다. '도덕적 의무'와 '법적 의무'를 혼동하는 것이다. '사람이면 그렇게 하면 안 되지!'라는 마음이 드는 경우지만, 실제로 '법적 의무'는 없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 하지만 나 역시도 감정이 앞설 때는 '도덕적 의무'를 가지고 그 사람의 행동을 법적 처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이야기하게 되곤 한다. 법률가라는 것은 때론 이러한 부분에서 차가워 보일지 모르겠다. '도덕'과 '법'을 분리하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다는 것은 인간미의 결여라는 결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