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용석 Oct 24. 2020

지나치게 긴 수험생활의 한가운데서

고독하지만 자유로운(Frei Aber Einsam)

1. "신림동에는 필통과 대화하는 사람이 있대"

대치동에서 초·중·고등학교 학창 시절을 보낸 나는, 유명 학원 강사들의 수업을 들을 일이 참 많았다.  요새는 인강으로 모든 것을 볼 수 있지만, 당시에는 오직 현장 강의로만 들을 수 있는 강의들이 존재했다.  그런 강의는 정말 줄을 서서 신청을 받고, 앞자리에 앉기 위해 학생들이 일찍부터 나왔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당시 가장 잘 나가는 강사는 실력도 실력이지만, 입담이 굉장히 중요했다.  한창 힘들 시기인 고등학생 때, 학교를 마치고 온 피곤하고 졸린 아이들에게 우스갯소리를 하면서 그 아이들의 잠을 깨워주는 능력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 아무리 잘 가르치는 강사라 할지라도, 입만 열면 모두가 잠들어버린다면 좋은 강사로 평가받을 수 없지 않겠는가?


그런 덕분인지 학창 시절 수없이 많은 우스갯소리와 웃긴 이야기들을 들었었는데, 아직까지도 가끔 생각나는 것들이 있다.  바로 그중 하나가 신림동 고시촌 이야기다.  자신이 사법고시를 준비하다가, 잘 안 풀려서 영어강사가 되었다고 이야기했던 한 유명 강사는 신림동에서 자신이 사법고시를 준비하던 시절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놓곤 했다.


하루는 학생들이 모의고사를 보고 지쳐있자, 선생님의 토크박스가 열렸다.  “야 너네 신림동에서 고시 공부 오래 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이게 엄청 외롭잖아, 혼자 공부하고, 혼자 밥 먹고, 혼자 3평짜리 고시원에서 하루를 마치고 그러니까.  그래서 이게 몇 년씩 합격이 안되면 하나둘씩 혼잣말하는 사람들이 생겨.  아 진짜라니까?  신림동에서 고시공부 오래 한 사람들은 다 알아!  나는 심지어 필통이랑 대화하는 사람도 봤다니까?  아니 진짜 필통이랑 일상 대화를 한다고!  얼마나 외롭고 힘들면 그렇게 됐겠냐?  너네는 재수, 삼수, 장수생 되지 말고 얼른 한 번에 수능 잘 봐서 끝내라!”


모두가 지친 상태에 그런 이야기들은 오아시스가 되어 모두에게 미소를 선사했고, 강의실은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었다.  난 10년도 넘게 지난 미래에 스스로가 로스쿨을 두 번이나 다니며, 변호사 시험을 미국과 한국에서 두 번이나 준비하는 장기 고시생이 될 거라는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강의실 한가운데서 유독 크게 웃고 있었다.


2. 그 친구들은 왜 매일 힘들어했을까?

지금보다 더 어렸고 모든 것이 새로웠던 20대 초반 시절, 나의 학부 친구들 중엔 시험을 준비하러 학교를 휴학하는 친구들이 꽤나 많이 있었다.  종류도 다양했다.  행정고시, 사법고시, 외무고시를 비롯해 회계사나 세무사, 변리사, 노무사, 7급 공무원, 9급 공무원까지 수없이 많은 시험들을 위해 그들은 학교 교정을 떠났다.  금세 붙는 친구들도 나왔다.  나는 학교에 있는데, 어디 지역으로 배정받았다며 기쁨의 소식을 전해오는 친구들이 있었다.  한 선배는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시험 때문에 듣지 못했던 나머지 학부과정을 마치러 학교에 돌아왔다.  합격 소식을 듣고 2학년이 듣는 수업을 재수강하러 온 그를 보고 평소 엄하기로 소문나 있던 민법 교수님께서 활짝 웃으시며 "오늘 이 부분은 OOO군이 나 대신 수업해도 괜찮겠는데?"라며 사람들 앞에서 칭찬을 해주시던 것도 생각이 난다.  다들 그 선배를 우러러봤었다.


이러한 성공 사례들만 있다면, 너무나 아름답겠지만 안타깝게도 성공의 사례들보다 훨씬 더 많은 친구들은 만나서 "힘들다"는 말을 계속했다.  수험생활이라는 것은 결국 '실패'와 '성공'이라는 단 두 가지로 나뉘는 이분법적 결론을 갖고 있는 것이기에 시험에 합격하는 소수를 제외하고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실패를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계속된 실패를 겪는 친구들은 정말 가끔, 독서실에서 나와서 나를 만나곤 했다.  그때는 잘 몰랐지만, 그게 그 친구들에게는 정말 큰 맘먹고 공부를 하루 쉬면서 나를 만나는 것이었음을 이젠 안다.  필사적으로 공부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는 내 노력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친구들이 먼저 자신의 힘듦을 토로했다.  사실 그런 것들을 경험해보지 못한 내가 뭘 얼마나 안다고, 그것을 공감할 수 있었을까.  그저 이야기를 듣고, 같이 시간을 보내줄 뿐이었다.  대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말은 항상 그랬다.  "아 힘들다, 늘 혼자 있는 이 생활은 도대체 언제 끝날까?"


3. 세계가 좁아진다는 것의 의미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은 아브락사스다.

헤르만 헤세, 『데미안』


문학보다는 비문학을 좋아하는 내게 데미안은 좋아하는 몇 안 되는 소설책 중 하나다.  소설 데미안의 그 깊은 의미들을 모두 이해하진 못하지만,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은 아브락사스다"라는 문장이 내게 큰 여운으로 남았다.  저기서 세계는 '나'와 동일한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것을 통해서 우리는 '진리(신)'에 다가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은 너무 찬란하고 아름답다.  그래서 자신의 내면을 마주 보는 침묵의 시간뿐만 아니라 나조차 모르는 내 모습을 아는 가족들, 친구들, 연인을 만나서 대화하고 행동하는 모든 과정은 찬란하고 아름답다.  그 모든 과정은 사실 나(세계)를 알아가는 과정이기에.


앞서 말한 찬란하고 아름다운, 세계(나)를 알아가는 것과 정확히 대척점에 있는 것이 바로 이 글의 첫 부분에서 이야기 한 '필통과 대화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고시와 같이 어려운 것을 단기간에 머릿속에 집어넣어야 하는 수험생활은 기본적으로 '홀로' 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 홀로인 상황, 즉 외로움이 극에 달하면 나오는 것이 바로 '필통과 대화하는 것'으로 표현 가능한 '세계의 좁아짐'이다.


수험생활의 가운데 있는 자는 늘 마음이 불안하다.  나도 그랬다(또 그렇다).  지금 공부한 게 시험에 나오면 어떡하지?  지금 내가 쉬면 그때 보는 게 시험에 나오면 어떡하지? 나는 지금 준비가 잘 된 것일까? 와 같은 생각들로 마음이 점점 작아져간다.  이는 마음속 여유 없어짐으로 표출된다.  본래 내가 살아가던 세계는 넓은 것이었는데, 독서실과 독서대 위에 놓인 고시서적만이 내가 살아가는 세계의 전부가 되어버린다.  나를 감싸고 있는 세계의 범위가 좁아진다.  나의 세계는 책과 시험이 전부가 되어버리고, 데미안의 말처럼 그것은 나 자신(세계)에서 점점 멀어져 가는 것이다.  수험 지식에는 다가가지만, 동시에 그렇게 진리에선 멀어져 간다.


4. 긴 수험생활 속에서 '나'를 찾을 수 있을까?

고등학생 때 교복을 입고 학원에 앉아서 고시생과 관련된 일화를 듣고 웃던 일을 기억하다가, 어느새 서른을 넘긴 나 자신을 바라본다.  어렸을 땐, 노래 가사에 나오는 "언제 이렇게 나이가 들었나, 세월은 너무나 빠르다네"하는 가사에 공감하질 못했는데 이젠 그 가사가 마음을 찌르다 못해 후벼 판다.  난 어느새 택배가 오면 "아이고 뭐가 왔나 보자아~" 하면서 택배를 받으러 가게 되었다.  모든 혼잣말에 너무 자연스럽게 음을 넣는 진짜 '아저씨'가 되어버렸지만, 아직까지 외로워서 필통과 1:1 대화를 나누거나 벽을 마주 보고 서서 혼잣말을 내뱉진 않는다.  다행인 걸까?

ⓒKBS2


철학자 레비나스는 인간은 타자와의 관계(정확히 인용하자면 "타자의 얼굴을 자신의 얼굴로 대면하면서") 속에서 주체로서 존재한다고 이야기하며 세상을 풀어냈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초월과 형이상학의 개념은 '타자의 얼굴을 자신의 흔적 삼아 나타나는 무한자와 관계함'을 말한다.  이를 데미안의 방식으로 풀어 설명하면, 우리 모두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그 발견에서 진리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레비나스에게 인간의 존재(세계)는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설명되고, 나아가 그 관계는 무한자(진리 또는 신)로 향하는 길이 된다.  그런데 고시생은 그 관계에서 벗어나기를 자의적으로 선택하고, 수험생활은 그 선택의 계속이라는 점에서 레비나스가 말한 방식으로 '나(세계)' 그리고 '진리'를 찾기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인 거 같다.  그럼 우린 어떻게 나를 찾아야 할지 고민이 된다.  분명 필통과의 대화로 나를 찾진 못할 것 아닌가?


타자의 얼굴은 신의 계시이고 우리는 타자에게서 초월성을 발견한다. 그 초월성은 타자를 수용하는 주체로 하여금 자신을 넘어서는 초월의 영역으로 인도해준다.

엠마뉴엘 레비나스, 『전체성과 무한』


5. 고독하지만 자유로운(Frei Aber Einsam)

경험이 적으면 적을수록, 공부가 얕으면 얕을수록 내가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늘어놓게 되는 거 같다.  그래서 브런치에 올렸던 과거 나의 글들을 보면 알몸이 된 거 같은 기분이 드나 보다.  그러다 가끔, '와 내가 이런 생각을 했다고?' 싶은 글들도 있다.


과거 익숙지 않은 영어로 미국법 공부를 시작하면서 자유로운 고독을 꿈꾸고 예찬했던 이 글이 그렇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사실 당시 무슨 의미인지도 잘 모르고 쓴 글이지만 이제 와서 읽어봐도 공감이 가는 이야기다.  공감이라기보다 '맞아 저게 정답이지'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렇다, 나를 알아가는 과정은 고독하지만 자유로운 상태에서 가능하다.  그러나, 모든 정답이 그러하듯 말하는 것은 쉽지만 그렇게 사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음을 깨닫는다.  고독하지만 자유로운 그 상황에서 우리는 나 자신을 대면하게 된다.


앞서 잠깐 언급했지만, 오랜 수험생활은 나의 세상도 좁아지게 만들었다.  다시 말해, 나를 잃어가게 만들었다.  수험생활을 하면서 '나는 누구지?', '난 어떤 사람이지?'와 같은 철학적 담론을 생각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고독하지만 자유로움은 레비나스가 말한 타자와의 관계없이(또는 그 관계를 위하여)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멈춤이자 사색의 시간이고, 정지의 시간이다.  하지만 역동적으로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시간이다.  '내 꿈은 무엇이지?', '내 인생의 목적은 뭐지?' '난 왜 살고 있지?'  요즘 들어 누군가에게는 낭비로 느껴지는 이 시간이 사실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몸소 깨닫는다.  고시서적이 세상의 전부인 좁을 대로 좁아진 마음속에서 내가 알던 세계와 나 자신이 조금씩 흐려져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어제보다 오늘이 조금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내일의 희망 없이 한숨을 쉬며 내일이 안 왔으면 하는 마음으로 불을 끄고 잠에 드는 청년들이, 내일 떠오를 태양을 기대하며 두근거림을 품고 잠들었으면 좋겠다.  사랑과 닮은 모습의 더 나은 제도와 법을 통해서 모두에게 조금 더 아름다운 세상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레비나스가 말한 것처럼 타자는 가난한 자와 나그네, 과부와 고아의 얼굴을 하고 있고, 동시에 나의 자유를 정당화하라고 요구하는 주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 얼굴을 피하지 않고 끝까지 대면해서 마주 보는 삶을 살아야지.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 사랑, 그리고 이웃 사랑'을 살아내는 삶을 살아야지.  신은 우리에게 선을 사랑하도록 하기 위하여 양심을, 선을 알도록 하기 위하여 이성을, 선을 선택하도록 하기 위하여 자유를 주셨으니까 말이다.  생각보다 긴 수험생활의 가운데서 나를 잃지 않으려 작게 외쳐보는 아주 작은 넋두리다.


얼굴을 가지고 타인의 얼굴을 만날 때 나는 비로소 책임적인 주체가 된다. 주체성은 「타인을 받아들임」에서 형성된다. 인간의 삶은 자신의 고유한 세계를 가지면서도 얼굴을 통해 드러나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연대책임을 통해 이루어진다. 타인의 얼굴은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는 장소이다. 주체성은 타인의 얼굴에 비친 하나님의 빛을 통해 발아되기 시작한다. 하나님은 타인의 얼굴 속에 자신을 은폐하는 방식으로 계시하신다. 타인의 얼굴은 그 속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가면이다.「가면」을 의미하는 라틴어 persona에서 알 수 있듯이 타인의 얼굴은 하나님의 가면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인격(person)이다. 이것은 나의 얼굴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나의 얼굴은 하나님의 가면이다. 하나님은 나의 얼굴 속에 자신을 은폐하는 방식으로 계시하신다. 타인의 얼굴을 거부하는 것이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라면, 내가 얼굴을 감추고 얼굴이 없이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것일 것이다. 타인의 얼굴은 타인의 인격(person)이다. 따라서 인격적인 사람은 타인의 얼굴의 절대성을 인정해 준다. 이런 의미에서 인격적이라는 개념과 윤리적이라는 개념은 동의어이다. 타인과의 만남은 언제나 인격적이어야 하며, 이런 만남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이루어진다. 진정한 윤리적 주체성은 얼굴을 가지고 타인의 얼굴을 대할 때 형성된다. 그리고 여기에 사랑의 본질이 있다. 진정한 윤리적 주체성은 사물 속에서 세계를 보고 타인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사랑에서 완성된다.  

오희천, 「타자의 얼굴과 윤리적 주체성」


나는 지금껏 나 자신만을 위해 살아왔다. 따뜻한 차를 마시거나 좋은 옷을 입을 궁리만 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한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다. 오직 나만 중요했을 뿐, 손님의 일이야 어떻든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그런데 손님이 누구인가? 바로 하느님이다. 만약 신이 나를 찾아온다면 나는 그분에게 무엇을 대접해야 하는가?...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다. 과거와 미래에 대한 모든 책임은 우리가 지는 것이다. 영원한 진리는 그렇게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의 불씨를 서로 나누면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 신은 우리에게 선을 사랑하도록 하기 위하여 양심을, 선을 알도록 하기 위하여 이성을, 선을 선택하도록 하기 위하여 자유를 주셨다.  

톨스토이, 『사랑이 있는 곳에 신이 있다』





*커버사진 출처:


   


매거진의 이전글 부끄러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