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를 위한 삶을 사는 꿈과 현실 사이에서
때는 2013년, 1학기 학부 법학 수업시간이었다. "Constitutional Democracy in Comparative Perspective "라는 제목의 수업이었는데, 우리말로 하면 "비교법적 관점에서 보는 헌법적(헌정적) 민주주의" 정도로 번역될 수 있을 거 같다. 이 수업은 대학원생까지 참여하는 세미나 형식의 수업이었다. 첫 수업 때 교수님께서 질문하셨다.
"얼마 전 있었던 대통령 선거에 투표를 했는지 여부를 이야기해주고, 절대 어떤 후보를 선택했는지는 말하지 않지만, 어떠한 이유로 그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었으면 한다"
하나둘씩 이야기가 진행됐다. 누구는 어떤 정당의 오랜 지지자이기에, 그 정당 출신 후보를 찍었다고 이야기했다. 또 누군가는 정책을 살펴보고 그 정책이 가장 좋다고 생각해서 그 후보를 선택했다고 말했다. 한 학생은 뽑을만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어서 투표를 안 했다고 이야기하기도 했고, 누군가는 같은 이유로 투표장에 가서 고의로 무효표를 찍었다고도 말했다.
내 차례가 돌아왔다. 머릿속에 멋진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서는 이 후보가 최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라던지, '후보의 과거 이력을 보면, 이런 이런 점이 국가 전체를 위해서 더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라던지 하는 번지르한 이야기 말이다. 얼마든지 멋진 이야기를 꾸며낼 수 있었지만, 정말 존경하고 좋아하는 교수님의 수업이었기에 솔직히 이야기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저는 2012년 내내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와 워싱턴 D.C. 에 있었기 때문에 당해 처음 시행되었던 국외거주자 투표에 신청해 미리 버지니아주에 설치된 투표소에서 국내 선거 기간보다 조금 더 일찍 투표를 진행했었습니다. 많은 학우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제가 왜 어떤 일정한 후보를 선택했는지 고민해봤습니다. 저는 평소에 '정의'에 대해 이야기하고, 사회 구성원들의 행복 특히, 소외된 사람들의 행복과 그들의 삶의 질 향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목소리 내는 것을 떳떳하게 생각했던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제가 투표할 때에 그러한 '가치'들이 제 마음을 움직였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볼 때, 저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저는 저에게 가장 큰 이윤을 줄 수 있는 후보, 나아가 저희 가족에게 경제적으로 가장 호의적일 수 있는 후보를 찾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더 솔직히 말해, 저희 가정에 경제적으로 더 큰 이득이 되는 후보를 선택했습니다."
영어로 떠듬떠듬 이야기했지만,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얼굴이 빨개져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정말 솔직히 이야기해서 내가 대통령에게 한 표를 던질 때 기준은, '내 지갑에 돈이 얼마가 더 생길 것인가'였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들었던 경제학 입문 수업 첫 시간에 교수님께서 300명이 넘는 학생들을 바라보며 "인간은 다 Selfish 한 거야, 여기에 단 한 명이라도 Selfish하지 않은 사람 손 들어봐"라고 이야기하고, 수많은 학생들이 손을 들고 답한 뒤, 교수님이 모든 학생들을 침묵시키게 만든 경제학적 논증을 들으면서 '나는 저렇지 않은데, 나는 다른 이웃들을 위해서 살 건데'라고 생각했던 내 모습이 기억났다. '아... 나도 똑같았구나. 내 자신이 제일 중요하고, 나 밖에 못 보는 사람이었구나.' 2시간 수업 내내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이고 있었던 내 모습을 기억한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해한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이렇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은 참 사랑이자 유일하게 이 땅에서 온전한 사랑을 행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이고, 나아가 그 삶은 예수님께서 '새 계명'으로 말씀하신 두 가지: 1) 하나님 사랑, 2)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다. 이는 다시 말해, 모든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매 순간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이다.
대통령 선거는 내 삶의 작은 부분들 중 하나일 것이다. 아마 극히 작은 '선택'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기술한 이야기를 통해 내가 배운 것은 삶의 작은 일에도 '사랑'을 표현하고 녹여낼 수 있는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수년이 지난 지금 다시 나 자신을 바라본다. 나는 매 순간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가? 아니 생각이라도 하고 있는가? 부끄러울이 밀려온다.
예수님과 3년을 매일 같이 했음에도 구하고, 예수님이 가장 어려운 시련과 고난을 겪을 때 자신의 목숨이 아깝고 두려워 예수님을 떠나 도망가느라 예수님 곁에 있지 않았던 제자들을 기억한다. 그런데, 그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후 만남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뒤바뀐다. '제자 시대'가 열렸고,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삶', 다시 말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간다.
나도 살고 싶다. 지친 누군가의 손을 잡아주고, 그를 안아주고, 희망이 되어주는 삶. 어두운 곳에 빛을 비춰 모두가 희망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드는 '빛'이 되는 삶. 아무 맛도 나지 않는 국과 같이 밍밍한 일상 속에서 우리 할 수 있다며 꿈을 같이 꾸는 '소금'과 같은 삶. 우울과 외로움 속에 있는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 기쁨이 되어주는 삶. 삶의 절벽 끝에 매몰린 사람에게 발판이 되어줄 수 있는 삶. 나 자신만 바라보고, 내 주머니에만 집중하고, 내 배고픔만 생각하는 삶이 아니라 이웃을 바라보고 그들에게 '한 영혼 사랑'을 실천하셨던 예수의 향기를 맡게 할 수 있는 삶.
'이미, 하지만 아직.' 하나님 나라는 결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둘씩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갈 때에 바로 우리가 밟는 이 땅은 하나님 나라가 된다. 그래서 찬송가의 가사처럼, "그 어디나 하늘나라"가 되고, "할렐루야"가 외쳐진다. 하나님 나라의 신비는 바로 이곳에 있다. 그래서, 나 자신의 현실은 희망이 없고 부끄럽지만 오늘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꿈을 꾸며,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