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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용석 Feb 16. 2016

내러티브; Narrative

삶을 산다는 것은 이야기를 쓰고있다는 것

내러티브(Narrative)라는 단어가 지식인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회자되던 시기가 있었다. '이야기'라는 쉬운 우리말이나, 혹은 '담화'정도로 번역해서 쓰면 될텐데 굳이 영어 단어를 선택해서 못알아 듣는 사람을 만들어야 하는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인기 만점의 단어 '내러티브'에 대해 날 지적으로 만족시켜주는 설명을 학자 폴 리쾨르가 쓴 그의 저서 『악의 상징』에서 처음으로 발견할 수 있었다.



시간체험은 삶의 체험이며 삶이란 행위로 이루어지고 이야기는 그런 행위의 모방이다. 행위의 모방인 이야기는 줄거리를 통해 삶의 단편들을 모으고 엮지만 이른바 사실과는 언제나 거리가 있다.


이야기 전체가 하나의 상징이 되며 그 점에서 모든 이야기(역사를포함)는 픽션이다.


픽션이 갖는 거리, 리쾨르에게 있어서 거리는 상징성이고 따라서 창조적 거리다. 이야기는 새 세상을 향한 희망이다. 인간의 시간은 할 얘기와 함께 경험되며 이야기와 함께 경험되는 한, 시간 체험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의 체험이다.

폴 리쾨르, 『악의 상징』 중에서



아직 '언어화'되지 않았을 뿐, 우리의 삶은 그 자체로 이미 이야기이다.


"삶을 산다는 것은 이야기를 쓰고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단 한명도 동일한 삶을 살지 않는다. 쌍둥이도, 모든 생활을 함께한다 할지라도 각자의 삶은 다르다. 그 다른 삶은 아직 '언어화'되지 않았을 뿐 '이야기'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각자의 고유하고 독특하며 세상 온 역사에 단 하나밖에 없는 특별한 '이야기'를 하나씩 갖고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지금도 연재중이다.


리쾨르는 사실과 이야기가 거리를 가진다고 이야기 한다. 우리가 살아내는 삶(사실)이 그 삶이 이야기로 언어화(혹은 기억화) 될 때 그 이야기는 우리가 사실이라고 이야기하는 우리의 삶 본질 그 자체와 거리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사실은 객관적이지만, 이야기는 주관적이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객관과 주관이 함께하며, 그 객관과 주관의 공존을 우리는 내러티브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객관과 주관이 공존할 때 그 사이에서는 새로운 것들이 나타나게 된다. 리쾨르가 말한 희망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나라는 존재는 '시간'과 '공간'속에서 객관적 '사실'을 살아내면서 끊임없이 그 사실들을 주관적 '이야기'로 재생산하는 내러티브적 존재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나를 희망의 불꽃이 꺼지지 않는 존재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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