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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by 문용석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한참을 고민하며 며칠을 지새운 적이 있다. '행복을 위해 산다'라는 답변이 그 당시 가장 쉽게 생각난 답변이었는데, 생각보다 이게 부정되기가 쉽지 않아서 그것을 부정하기 위해서 정말 많은 생각을 했던 거 같다. 결국 부정하지 못했다. 종교적 이유(그리스도인인 내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영광,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산다') 역시도 결국엔 나 자신의 행복으로 귀결되었다. (하나님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이라는 등식이 성립되었다. 또한,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도 결국 나의 기쁨으로 귀결된다.) 그렇다, 나는 행복하기 위해서 산다.


재미있는 것은, '행복'이라는 가치를 위해서 추구하는 많은 것들이 동시에 추구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것은 선택되고 어떠한 것은 포기된다. 쉽게 일반적으로 '행복'과 관련된 가치들은 돈, 명예, 사랑, 그리고 종교가 아닐까? 이 모든 것들은 한꺼번에 다 충족될 수 없다. (물론 언제나 예외는 존재하겠지만) 예를 들어, 돈과 명예를 가진 사람은 큰 의미에서의 사랑의 일부인 '행복한 가정과 가족'을 갖지 못한 경우가 많다. 명예는 가졌지만, 돈을 가지지 못한 경우도 있다. 돈만 가지고 나머지를 다 놓쳐 생의 마지막에 그것에 대해 후회하는 모습을 우리는 자주 보게 된다. 심지어 드라마와 영화에서도.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나는 '행복'을 위한 가치들 중에 어떠한 가치를 우선순위에 두고 살아갈까? 나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 어떠한 것을 포기하는 결정을 내리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그렇기에 더 오랫동안 생각하고 고민할 수 있었다. 단 한 가지만 가져야 한다면, '사랑'을 갖고 싶다는 것이 내 결론이었다. (사실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사랑'은 종교적 가치를 포함하는 넓은 단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돈과 명예가 없을지라도, 사랑하는 배우자와 서로를 사랑하는 가정을 꾸리는 것. 그리고 그 사랑을 나의 자녀, 나아가 주위 이웃들에게까지 흘려보낼 수 있는 것.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성경의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는 것. 헨리 나우웬의 말(『세상의 길 그리스도의 길』)을 빌리자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예수 그리스도가 되는 것" 그게 나의 제 1 우선순위가 되었다.


'사랑'을 제 1 우선순위로 놓은 다음부터 내 삶은 조금씩 조금씩 달라져갔다. 수많은 노력들 속에 서서히 달라져갔다. 겉으로 드러나는 큰 변화는 없었을지 모르지만, 평소에 고민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이 많이 달라졌다. '어떻게 좋은 사랑을 줄 수 있을까?', '어떻게 난 하나님의 사랑을 배울 수 있을까?',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사랑은 무엇일까?', '예수님은 어떻게 사람들을 사랑하셨나?', '오늘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 '교제 속에 있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와 같은 생각들과 고민들이 머릿속을 채웠다. 자연스럽게 그 고민들과 생각들에 관련해 책을 읽고, 자료를 읽어보며 공부했다. 아니 지금도 하고 있다. 삶으로 조금씩 배워나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들을 예전부터 난 싸이월드 게시판에 정리해왔었는데, 이번 기회에 예전에 정리했던 것들을 읽어보며 당시에 내가 깨닫고 다짐했던 바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다. 돌판에 새겨진 하나님의 율법이 출애굽 세대를 변화시키지는 못했지만, 그 율법이 만나세대의 '마음'에 새겨지자 그들은 변화했던 것처럼. 나의 마음에 '사랑'이라는 율법을 새기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오랜 시간 지나, 지금 나는 '사랑' 앞에서 한없이 작은 존재임을 깨닫는다. 뒤늦게 안 이 깨달음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예전엔 자만하여 내가 사람들에게 좋은 사랑을 준다고 착각하며 지냈었던 것 같다. 물론 수많은 시간 성경에 나 자신을 비추어보며 회개와 성찰의 시간을 가졌지만, 난 참 자만했다. 아니, 사실 솔직히 고백하면 무지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바로 내 이야기였다. '사랑'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내가 좋은 사랑을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게 전혀 아니었다. 내 사랑에는 '나 자신'이 너무 컸다. 내가 성경을 읽으며 '사랑'에 대해 가장 많은 시간 묵상했던 부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었다. 바로 인카네이션(Incarnation=성육신)이다. '신'이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셨다는 부분이다. 차원이 다른 '신'이라는 존재가 자신의 모습 그대로가 아닌, '인간'의 모습이 되어 오셨다는 것. 이곳에 바로 사랑의 신비가 담겨있음을 깨달았다. 그렇게 많이 생각했던 것인데, 왜 이제야 깨달았을까.


사랑은 '나'가 작아지고 '나'를 대신해 '너'가 커지는 것이 아닐까. (내 마음은 작아지고, 그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채워 예수님 처럼 인카네이션의 모습으로 타자를 사랑할 수 있는) '내가 생각했을 때, 이렇게 하면 너가 행복해하겠지'라는 방식의 '나'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닐지 모르겠다. '너'는 어떤 것을 원하는가?부터 시작하는 것이 사랑의 시작인 거 같다. 그토록 누군가를 사랑하고 좋아하는데 정작, 그 누군가 무엇을 진정으로 원하는지 모른다면 그것은 좋은 사랑이 아닐지 모름을 깨닫는다.


어렸을 적 나는 강남구 대치동에서 수많은 학원들을 다녔다. 지금 생각하면 지나간 추억이 되었지만, 그 당시 나는 크게 행복하지 않았다. 혼자 슬픔을 이겨내거나 남몰래 눈물을 흘렸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지금은 그때 부모님의 결정이 '사랑'이었음을 깨닫지만, 그때 나에게 그것은 '사랑'으로 느껴지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내가 원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핵심이 바로 이 짧은 이야기에 들어있다.


'내'가 사랑하는 '너'가 기준(standard)이 되어 사랑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기준(standard)이 되어 '사랑'을 정의하게 된다면 그건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예수님은 '신'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사랑을 전하신 게 아니다. '인간'이 되어 우리에게 오셔서 사랑을 전하셨다.


사랑한다면서 상대방(연인, 배우자, 크게 우리의 이웃)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면 그건 어딘가 나사가 하나 빠진 사랑일 것이다. '내가 이렇게 잘 해주는데!'라고 이야기 할 때, 그 잘 해주는 것이 '나의 기준'이라면 그것 역시 지금 이야기하는 사랑이 아닐 것이다.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모른다면, 그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사랑이 아닐지 모르겠다.


톨스토이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What Men Live By)?" 라는 질문에 자신의 소설을 통해 "모든 사람은 자신에 대한 걱정이 아닌 사랑으로 살아간다"고 말했다. 이 아름다운 답변에 이어서, 내게 주어진 "어떻게 사랑으로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에 나는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진짜 사랑은 너무나 어렵다. 그런데, 정말로 그 진짜 사랑을 추구하고 싶다. 그게 '행복'으로 향하는 길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사랑' 앞에서 한도 끝도 없이 작아져 너무나 겸손해져 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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