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아이히만의 재판 이야기
1. 악(惡)이란 무엇인가?
악(惡)이란 무엇일까? 하루에도 수십, 수백 건이 넘게 기소되어 그날 저녁 뉴스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지는 잔혹한 중범죄를 보고 우리는 “저것이야 말로 악 그 자체야”라고 이야기할지 모른다. 어쩌면 어제 친구에게 충격적인 배신을 당하고 난 뒤 일어난 아침, 그 이야기를 기억해내며 “악한 녀석”이라고 혼잣말을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선과 악을 구분하는 것처럼, 과연 실제로도 선과 악을 쉽게 구분할 수 있을 지에 대한 의구심이 든다.
만약 앞서 이야기했던 중범죄나 친구의 배신이 타인의 협박이나 어쩔 수 없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실수로 일어난 것이라면 피고인 또는 친구를 악으로 단순히 규정할 수 있을까? 쉽지 않은 문제다. 확실한 것은 우리의 일상에서 어떠한 것에 대해 저것은 악한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경우는 꽤나 많지만, 생각보다 ‘악’이 무엇인가에 대해 정의 내리기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가 시간이 오래 걸리고 상상 이상의 세금이 들어가는 3심으로 구성되어 있고 피고인에게 변호사를 국가가 선임해줄 뿐만 아니라 피고인의 다양한 기본권을 보장해주는 복잡하면서도 섬세한 형사재판을 가지고 있는 이유이며, 상상을 초월하는 두께를 자랑하는 법철학 교과서들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2. 악의 경험자에서 악의 관찰자로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1933년 나치 독일의 유대인 탄압을 피해 도망한 경험이 있는 유대인이다. 이러한 직접적인 경험을 가진 아렌트에게 나치는 그 자체로 악으로 느껴졌고, 아렌트는 홀로코스트에 큰 관심을 갖게 된다. 그녀가 나치 독일로부터 도망친 뒤, 27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르고 홀로코스트 당시 나치군 중령으로 수많은 유대인들을 죽인 학살 계획의 실무를 책임졌던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이 12년의 오랜 도주 끝에 잡히자 그를 관찰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서 진행된 아이히만의 재판(Attorney General v. Adolf Eichmann)에 참관하게 된다. 악의 경험자로서 그로부터 도망쳤던 아렌트가 이제 자신에게 악이었던 존재를 관찰하는 관찰자가 된 것이다. 그 관찰자로서의 생각을 쓴 책이 바로 그 유명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다.
3. 친절하고 선량한 아주 평범한 사람, 아이히만
이스라엘에 도착하기 전 아렌트의 상상 속에 존재하던 아이히만은 아마 뿔이 2개 달리고 모든 이가 송곳니로 되어 있는 괴물이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실제로 이스라엘에서 만난 아이히만은 아렌트의 눈으로 보기에 매우 친절하고 선량한 사람이었다. 또한 모두가 좋아할 만한 매우 근면·성실한 사람이었다. 아렌트의 고민은 여기에서부터 시작한다. ‘이렇게 친절하고 선량한 사람이 어떻게 이러한 엄청난 학살을 일으킬 수 있었는가?’에 대한 질문에서부터 시작하여 답변에 이르는 것이 재판 참관의 목적이 되었다. 다만, 아렌트는 아이히만은 권력욕이 강하며 명예에 집착하는 사람이었고, 그가 가지고 있었던 반유대주의 사상이나 나치즘이 이러한 명예욕을 실현시킬 수 있는 훌륭한 수단이 되었다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4. 아이히만의 변호와 재판부의 판단
이제 재판의 내용으로 들어가 보자. 1961년 4월 11일,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위치한 정의의 집(Beth Hamishpath)에서 열린 아이히만의 재판에서 아렌트가 만나게 된 사람은 수많은 판·검사뿐만 아니라 아이히만과 그의 변호사였다. 이스라엘 검찰이 피고인 아이히만에게 적용한 법률은 ‘나치와 그 부역자 처벌법’이었다. 뉘른베르크 재판의 법리를 토대로 만들어진 이 법은 나치 범죄에 관한 공소시효의 배제, 외국 처벌에 대한 일사부재리 배제를 규정하기에 가능했다.
아이히만의 혐의는 유대인에 대한 범죄, 반인도적 범죄, 불법조직 가담죄를 비롯해 15가지였다. 재판은 주로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증언으로 이루어졌는데, 아이히만과 그의 변호인은 이에 대해 반대신문조차 하지 않았다. 아이히만의 변호사 로베르트 세르바티우스(Robert Servatius)는 “아이히만은 신 앞에서는 유죄 일지 모르나, 법 앞에서는 무죄이다”라고 변론하며 아이히만은 군인이고 군인은 명령에 따라야 하며 어떠한 결과가 나오더라도 그 행정절차에 따랐을 뿐이므로 그 결과에 대해서 아이히만은 무죄일 수밖에 없다는 논리를 펼쳤다. 또한 아이히만에 대한 기소는 단순히 아이히만의 행위가 아닌 국가의 공식 행위이므로 다른 정부가 재판권을 가지지 못한다는 변론을 한다.
재판 과정에서 수많은 증언과 문서가 제출되면서 아이히만이 홀로코스트와 관련하여 인원 확보 및 수송을 맡았다는 것이 입증되었고, 이제 아이히만의 형량과 관해 재판부에 이목이 집중됐다. 재판부는 244가지 이유를 명시하며 “이 범죄는 집단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 수많은 범죄자들 가운데 희생자들을 실제로 죽인 것에서 얼마나 가까이 또는 멀리 있었는지는 그의 책임의 기준과 아무런 의미가 없다. 반대로, 일반적으로 살상 도구를 손으로 사용한 사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책임의 정도는 증가한다.”라며 사형을 내렸다.
박형남, 「세계사에서 유명한 재판이야기 -아이히만 재판-」, 법조, 67-5, 2018, 493면.
5. 나치가 유대인을 학살한 이유에 대한 답변
사람들은 이 재판을 바라보며 머리 한편에 똑같은 질문을 떠올렸다. 도대체 나치가 왜 유대인들을 집단적으로 학살하였는가에 대한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대인에 대한 증오와 나치 전체주의의 기반에 깔려있는 우생학적 이론 및 반유대주의를 이야기할 것이다. 하지만 재판 과정을 관찰한 뒤 아렌트는 독특한 답변을 내놓는다. 아이히만이 반유대주의에 심취한 악인이라서 이러한 범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라, 선악을 구분할 능력을 상실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렌트는 이를 '사유하지 않음(sheer thoughtlessness)'이라는 개념으로 이론화하며 아이히만을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이 조직의 명령에 그대로 따르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깨닫지 못하는 자’로 규정했고, 종국적으로 그 유명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악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집단의식과 권위에 대한 충성심으로 큰 생각 없이 동참하는 아주 평범한 사람들에게서 이런 악한 범죄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홀로코스트에서 반유대주의라는 독특성을 배제하고서라도 전체주의가 존재하는 곳에서 개인의 사유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극악한 범죄가 일어날 수 있다고 한 아렌트의 지적은 과거 그 누구도 하지 않았던 지적이다.
박형남, 위의 글, 482면.
6. 지금 사유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아렌트는 그녀의 학술 전반에서 항상 스스로 사유할 것을 강력히 권했다. 대상을 두루 생각하는 일이라는 뜻의 사유(思惟)는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것, 즉 합리적이고 연역적인 이성적 활동을 통해 현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유할 능력 없이는 그 어떤 평범한 사람이라도 평범했던 아이히만처럼 악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에서 생각하는 힘을 길러 비판적으로 사고할 수 있게 됨으로써 맹목적이고 큰 생각 없이 집단 또는 권력을 따라가 악이 되지 말자는 것, 그것이 아렌트가 자신의 학술 전반에서 전하고 싶었던 내용이다.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라는 노희경 씨의 아름답고 낭만적인 이야기처럼, 아렌트는 사유를 잃어버린 우리에게 “지금 사유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라는 아찔한 철학적인 이야기를 던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참조문헌>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사, 2006.
Arendt, Hannah, Eichmann in Jerusalem : a Report on the Banality of Evil, Viking Press(New York), 1963.
박형남, 「세계사에서 유명한 재판이야기 -아이히만 재판-」, 법조, 67-5,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