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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용석 Oct 30. 2020

"그럼 나 놀아줄 거야?"

놀이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Homo Ludens)

I. 들어가며: "그럼 나 놀아줄 거야?"

모두가 바쁘고 서로에 큰 관심이 없어진 현대 사회에서는 생각보다 다양한 사람들과 마주칠 기회가 없다.  내게도 정말 가끔 그런 기회가 찾아오는데, 바로 집을 나설 때와 귀가할 때다.  아파트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시간과 그것을 타고 올라가는 시간 동안 같은 아파트에 사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곤 한다.  며칠 전, 잠시 밖에 나갔다 들어오는 길에 한 꼬마 아이와 그 아이의 부모님들을 만났다.  5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 아이와 나랑 비슷한 나이 때로 보이는 부부가 함께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게 되었다.


“그럼 나 놀아줄 거야?” “놀아줄꺼냐구우우”  아이는 한참 높이 있는 아빠를 쳐다보며 계속해서 말했다.  아마 나와 만나기 직전, 부모님이 그 아이에게 집에 가서 무엇인가 할 것을 요구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아마 집에 가서 씻는 것이라던지, 숙제를 하는 것이었을 거 같다.  아빠의 반응이 시원치 않자 아이는 계속해서 아빠에게 놀아줄 것인지에 대한 약속을 받고 싶어 했다.  내 눈치를 보셨는지, 이를 보다 못한 엄마가 “엄마가 놀아줄게”라고 이야기하자, 아이는 “싫어! 엄마는 안 놀아주잖아!”라며 다시 아빠에게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쪼그마한 그 아이는 온몸으로 모든 에너지를 쓰면서 단 한 가지를 원하고 있었다.  자신과 놀아달라는 것이다.  도대체 ‘논다’는 것이 무엇이길래 저 아이는 저렇게나 간절하게 동그란 눈동자를 깜빡이며 애원하고 있던 것이었을까?


II. 놀이란 무엇인가

1. 개요

한번 잘 생각해보자.  세상에 그 아무리 바쁘고, 고상하고, 위대한 인간이라고 할 지라도 놀지 않는 사람은 없다.  진짜 그렇지 않은가?  정말이다.  굉장히 흥미로운 사실이다.  24시간을 보내면서, 아무리 실용적이고 체계적이면서도 효율적으로 시간을 아껴 쓴다고 하더라도 사람은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노는 데 사용한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사람도, 자신의 24시간 중 상당한 시간을 노는 데 사용한다.  엄밀히 '놀이'의 범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견해의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노동(생산활동)'과 노동에서 파생되는 활동 이외의 것들을 놀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우리는 그것을 '휴식', '명상', '힐링', '문화생활' 등등의 이름으로 바꿔 고상하게 부를 뿐이다.  이 모든 활동은 사실 '놀이'다.


어제 내가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아이가 말한 '논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아마 같이 이야기를 하고, 시간을 보내고, 크게 의미 있거나 효율적이거나 체계적인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시간을 함께 사용하는 것일 것이다.  같이 개미가 어떻게 기어가는지를 본다거나, 재미있게 봤던 유튜브를 같이 본다거나, 아니면 그냥 숨바꼭질을 하면서 논다거나 등등.  우리는 정말 수없이 많은 방법으로 놀 수 있을 것이다.  주목해봐야 할 점은, 논다는 것은 그 당사자(최소한 한 사람)에게 즐거운 일이라는 점이다.  이를 우리는 협의적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 또는 '취미'라는 이름으로 부르곤 한다.  조금 더 광의적으로 표현하면 이를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하기'라고도 부를 수 있겠다.


2. 호모 루덴스: 놀이하는 인간

“삶의 목적은 놀이다”
Johan Huizinga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라는 인간의 근원적인 궁금증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철학자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사유하게 만든 큰 철학적 주제였다.  나 역시 이 주제에 대해 오랜 시간 고민해왔고, 나름대로의 대답도 이전 글들로 소개했던 바 있다.  워낙 큰 주제이기에, 수많은 철학자들이 이 주제를 놓고 수많은 각자의 대답들을 내놨다.  그중 네덜란드의 철학자 요한 호이징가(Johan Huizinga)는 인간 삶의 목적을 ‘놀이’라고 주장하며 이 주제에 큰 불을 붙였다.  그 유명한 '호모 루덴스(Homo Ludens)'의 시작이다.


호이징가는 ‘놀이(루덴스: 직역하면 유희)’를 가지고 인간사와 인간에 대해서 풀어나갔다.  그는 인간의 문명 자체가 놀이 안에서 놀이라는 형태로 생겨나, 놀이를 떠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모든 형태의 문화는 놀이형식을 가지고 있음을 입증하려고 한 것이 그의 저서 『호모 루덴스(Homo Ludens)』이다.    그에게 놀이란 '자유'이며, '탈일상적 일시적 활동'이고, '질서를 창조하고 질서 그 자체인 완벽성을 가져오는 활동'이다.  눈치채셨는지 모르겠지만, 호이징가가 말하는 '놀이'의 범위는 상당히 넓다.  이는 정신적인 창조활동 전체를 포함한다.  상상력의 발휘에 따라 다양한 창조 활동을 전개하는 음악, 미술, 무용, 연극, 스포츠, 문학 등이 바로 그가 말하는 전형적인 '놀이'에 속한다.


유혜경, 놀이 ⓒ 유혜경


3. 시대에 따른 놀이 및 그 주체의 변화

놀이는 고대사회 이래로 때로는 긍정적인 가치를 가지는 것으로, 때로는 지극히 배척해야 하는 부정적인 것으로 끊임없이 변화되어왔다.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에는 놀이가 상층 귀족계급의 특권처럼 여겨졌다.  일반적인 사람은 노동만을 하였을 뿐, 감히 놀이의 주체가 될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 중세 시대에 이르러서는 놀이란 소스타인 베블런(Thorstein Veblen)이 규정했던 노동과 생산활동을 하지 않는 특정 신분계층인 '유한계층' 만의 것이었다.  산업혁명 이후 근대사회에 들어서자 놀이의 개념은 급속도로 변화했다.  놀이는 노동자의 높은 생산성을 위한 잠깐의 '휴식'으로 변모했다.  다시 말해 놀이는 노동을 위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시간이 더 흘러 현대 대중 소비사회에 접어들면서 이제 놀이란 인간의 삶의 질을 측정해 주는 척도로까지 간주되게 되었다.  놀이를 보다 더 잘 '향유'되어야 하는 인간의 '덕목'으로까지 여기는 시각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소위 '워라밸(Work-Life Balance)'과 같은 단어가 왜 이 시대 20-30대들의 핵심 키워드가 되었는지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4. 놀이를 잃어버린 노동하는 현대인의 비극

1938년 『호모 루덴스(Homo Ludens)』를 출간할 당시 호이징가의 문제의식은 명확했다.  '놀이를 잃어버린 현대인'이 얼마나 비극적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산업혁명 이후 인간이 재화를 위한 도구가 되면서 인간의 비인간화가 이루어지고, 극단적 합리성과 효용성만이 추구되는 사회에서 그는 인간의 목적인 '놀이'가 '재화의 축적'이라는 다른 가치에 잠식되는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우려는 정확히 들어맞았다.  다른 가치들을 뒤로한 채 재화만을 축적하는데 집중하는 극단적인 자본주의가 팽배하게 되었던 것이다.


앞서 잠시 언급했지만,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대한민국 20-30대의 최고의 가치들 중 하나가 '워라밸'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다수의 사람들에게, 재화만의 극단적인 추구는 좋은 호응을 받지 못한다.  돈을 아무리 많이 주더라도, 사람들은 '놀이'를 더 열망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현대 사회에서 현대인들의 대부분의 소비는 '노는 것'에 해당된다.  좋은 집, 좋은 차, 좋은 옷, 연예인을 닮은 얼굴, 스포츠 스타와 같은 몸매까지 사람들의 소비의 상당 부분은 어떻게 더 재미있고 편하고 즐겁게 놀 수 있는지에 자리하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비극이 시작된다.  '워라밸'이라는 가치가 모두에게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노동과 놀이의 균형을 맞추고 오히려 놀이를 위해 노동을 도구로 사용하지만, 누군가는 여전히 노동과 놀이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노동에 무게중심이 훨씬 더 많이 쏠린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정치사에서 가장 멋진 슬로건이라고 생각하는 故 노회찬 씨의 핵심 가치였던 "저녁이 있는 삶"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저녁이 있는 삶은 풀어서 이야기하면, '놀 수 있는 삶'이다.  놀 수 없는 이들이 많이 있기에, 모두에게 그 시간을 주겠다는 것이 그 슬로건의 핵심이었다.


누군가는 그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너무 각박하고, 숨 쉴 틈도 주지 않는 사회에서 무슨 놀이냐고, 나는 하루에 잠자고 일하는 것 단 두 가지밖에 안 한다고 말이다.  맞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는 분명히 그러한 사람이 꽤나 많이 존재한다.  현실의 각박함 속에, 현실(present)은 우리에게 선물(present)이 되지 못할 때가 많다.  하지만, 나는 그 바쁜 누군가의 24시간 속에는 분명히 그리고 반드시 '노는 시간'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 시간을 자신으로 하여금 더 즐겁게 놀 수 있게 '질'을 높이고, 절대적인 시간을 차츰차츰 늘려나가는 것.  그게 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작은 발걸음이 되지 않겠는가?  놀이의 새로운 의미다.


III. 놀이에 대한 인간의 갈망

1. 무엇을 갈망하는가?

호이징가의 말처럼, 인간 삶의 목적은 노는 것인가?  이 글의 처음에 소개했던 어제 만났던 5살 꼬마 아이의 경우에는 정말 맞는 거 같다.  아이가 눈을 떠서 자기 전까지 하는 것은 100% 노는 일이다.  놀면서 그 아이는 세상을 배워가고, 감정과 정서를 함양해간다.  그래서 아이가 원하는 것은 '놀이'다.  언제나 그렇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가?  일반적인 한 명의 현대인이자, 나이도 어느 정도 든 나 같은 어른도 '놀이'를 원하는가?


2. 아이뿐만 아니라 어른도 놀이를 갈망한다

배드민턴 치자고 꼬셔 커피 한잔 하자고 불러 동네 한번 걷자고 꼬셔 넌 한 번도 그래 안 된다는 말이 없었지

버스커버스커-꽃송이가


"배드민턴 치자고 꼬셔 커피 한잔 하자고 불러 동네 한번 걷자고 꼬셔 넌 한 번도 그래 안 된다는 말이 없었지 꽃송이가 꽃송이가 그래그래 피었네 꽃송이가 꽃송이가"  버스커버스커의 꽤나 오래된 노래를 듣다가 웃어버리고야 말았다.  내가 일상에서 늘 해왔던 것들을 가사가 너무나 잘 담아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아이가 아빠에게 "놀아달라"라고 말했던 것처럼, 나 역시 다른 사람들에게 "놀아달라"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가 들어 나의 본심을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아이처럼 순수하게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드는 이성에게 "커피나 마시러 갈래?"라던가 "배고프지 않아? 거기 엄청 맛있다던데, 거기 갈래?", 또는 "밤공기가 너무 좋은데, 같이 걷지 않을래?"와 같은 방식으로 돌리고 포장하여 말하고 있을 뿐(소위 수작을 부리고 있을 뿐) 그 내용은 저 5살 아이의 "그럼 나 놀아줄 거야?"라는 이야기와 별 다를 바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3. 연애와 놀이의 관계

호이징가의 호모루덴스를 읽고 쓴 수많은 글들을 찾아보면서 내 마음에 쏙 들었던 누군가의 문장은 "관계는 놀이에서부터 시작한다"는 짧은 문장이었다.  이 문장은 내게 긴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연애를 하고 싶다는 친구들은 언제나 주변에 많이 있다.  그런 친구들에게 나는 "연애하면 뭐 하고 싶은데?"라는 질문을 자주 했던 거 같다.  답변은 각양각색이다.  한강도 가고 싶고, 영화도 보고 싶고, 밤길도 걷고 싶단다.  어라?  근데 전부 노는 것이다.  연애를 한다는 것을 표현하는 방법은 참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서로의 노는 시간을 합쳐서 같이 노는 것'이 아닌가 싶다.  장범준 씨의 노래 가사처럼 호감 가는 이성에게 수작을 부릴 때 쓰는 커피 마시자, 배드민턴 치러가자와 같은 말들은 사실 "같이 놀자"는 말을 다르게 돌려 말한 것이 아닌가?


이런 호모루덴스의 관점에서 바라보았을 때, 사실 우리가 연애 또는 결혼을 하는 대상 역시 가장 기본적으로는  ‘나와 잘 놀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우리는 '코드가 맞는다', '같이 있으면 행복하다', '자꾸 보고 싶다'와 같은 이야기로 이를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그 '놀이'는 큰 에너지나 노력 없이 아주 작은 일상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면 더 좋을 것이 분명하다.  


분명 별 이야기가 아닌데도 말만 나눠도 즐거운 사람이 있다.  시간이 가는 줄 모르게 시계 한 번을 보지 않고도 4-5시간 대화가 이루어지는 사람이 있는 반면, 이야기가 툭툭 끊겨 두 마디를 채 채우기가 어려운 대화도 존재한다.  사실 이런 것은 엄청난 노력이라기보다는 그냥 '맞는 것'이 아닌가?  놀이라는 것 역시 대부분은 사실 별다른 노력 없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4. 결혼과 놀이의 관계

하루의 절반 이상을 일터에서 보내는 현대인에게 집이란 무엇을 하는 공간일까?  노는 공간이다.  그렇지 않은가?  무엇으로 포장해봐도, 일터를 벗어난 집이란 공간은 쉬고 노는 곳이다.


일터에서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왔을 때 나를 맞아주는 사람, 혹은 내가 맞아주는 이를 우리는 보통 '부부'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결혼 역시, 노동이 끝난 뒤 노는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 어떤 차를 타는지, 어떤 직업을 가졌는지, 성격이 맞는지를 따지는 것이 우리네 인간들이 알고 있는 보통의 결혼이지만, 사실 나랑 얼마나 잘 놀 수 있는지를 따지는 게 우선되어야 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현대에 들어 결혼이 급격히 줄어드는 이유에 대해 많은 의견들이 존재하겠지만, '혼자서 노는데 부족함이 없게 되어서'라는 답변도 꽤나 근사한 답변이 된다.  콘텐츠의 홍수 속에서, 핸드폰 하나만 있으면 우린 혼자서도 재미있게 놀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 퇴근 후 나를 반겨주는 것은 '부부'일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된 것이다.  별 노력 없이 그날의 완벽한 '놀이'를 만들어주는 넷플릭스와 차가운 맥주 한잔이 기존 '타자'가 차지하던 놀이의 공간을 지배하게 된 것이 아닐까?


이전 글에서 소개했듯이 윤홍균 전문의는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은 영원한 사랑의 핵심 요건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라 말한다.  사실 우리네 인간들이 사랑을 통해 원하는 것은 포장지를 벗기고 그 핵심으로 들어가 살펴보면 ‘같이 노는 것’이 아닐까?


IV. 나오며: 진정한 의미의 호모 루덴스

1. 놀이 그 이상의 놀이

듣기만 해도 어려운 호모 루덴스의 개념을 쉽게 이야기하기 위해서 '놀이'의 개념을 굉장히 협의적으로 제한하여 설명해보았다.  그런데, 사실 진정한 의미의 호모 루덴스는 놀이 이상의 놀이를 의미한다.  


놀이에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즐거움과 삶의 본능을 긍정하는 것

제러미 리프킨(Jeremy Rifkin)
인간이 가장 순수해지는 활동이 놀이이며, 자기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추구하는 노력을 정지하는 것이 삶의 목적

요한 호이징가(Johan Huizinga)


호이징가에게 있어서 놀이는 단순히 1차원적 의미에서 나아가 '정신적인 창조활동'까지를 포함한다.  학문, 예술, 문화 등 인간의 문명을 만드는 모든 것은 놀이의 개념에 속한다. 사실 호이징가의 '호모 루덴스'는 이 글에서 전반적으로 표현하는 것처럼 그리 밝기만 한 개념은 아니다. "Homo Ludens(호모 루덴스)"는 "Arbeit Macht Frei(노동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독일어 문구와 대비된다. 나치 제1수용소(아우슈비츠)의 입구 정문에 쓰여있는 나치의 철학에 대해 호이징가는 "노는 것이 삶의 목적"이라 대답한 것이다. 호모 루덴스를 발표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호이징가는 나치 체제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나치 수용소에 잡혀가서 삶을 마감하게 되는데, 앞서 말한 '대비'는 이러한 배경을 알고 나면 더 도드라진다. 그의 '놀이'의 개념은 '노동'과 대비되고, 더 나아가 '노동으로부터의 고통'과 대비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사실은 이 글에서 다루는 '놀이'의 의미를 확장시켜 논의를 조금 더 풍성하게 만들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아우슈비츠 나치 제1수용소 정문 / https://www.usafa.af.mil/News/Commentaries/Article/646813


2. 호모 루덴스, 그다음 이야기

 호모 루덴스는 사실 '유희의 인간'으로 번역할 수 있는 단어인데, 이를 우리나라에서 책을 출간하면서 '놀이'로 번역하였다.  유희의 인간이자 놀이의 인간이다.  '놀이'라는 주제로 우리 사회와 인간을 풀어냈다.  아무도 가치를 주지 않던 '노는 것'에 의미를 부여해주었다.  "인간의 본질은 놀이다!"라고 외치면서 말이다.  호모 루덴스,  그런데 여기서 끝이라면 너무 허무하지 않은가?


세상에는 '유희' 또는 '놀이'에서 벗어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  24시간에서 놀이가 차지하는 범위가 평균값보다 훨씬 적은 분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현대사회의 각박함과 잔인함에 일상의 여유를 잃고 놀이나 유희와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우리는 호모 루덴스라고 부를 수 있을까?


사실 우리네 삶은 우리의 이웃들을 모두 호모 루덴스가 될 수 있게 만드는데 나아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본질이 정말 놀이라면 그게 맞을 것이다.


You can deny, if you like, nearly all abstractions: justice, beauty, truth, goodness, mind, God. You can deny seriousness, but not play

Johan Huizinga, Homo Ludens: A Study of the Play-Element in Culture


*커버 사진 출처: 유혜경 화가의 작품 '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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