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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용석 Mar 01. 2020

친구(friend)와 팔로워(follower)

모든 관계의 완성은 '친구'가 되는 것이지 않을까?

1. 팔로워에 목마른 시대

10년 전만 해도 아무도 오늘날처럼 거대해진 'SNS' 시장을 예상하지 못했다.  좁디좁은 대한민국 땅에서는 물론이고, 전 세계 어느 나라를 봐도 SNS가 엄청난 위력을 행사하고 있다.  사람들의 모든 일상은 SNS로 올라가고, 그 일상을 본 누군가가 누군가를 팔로우(follow)한다.


팔로우의 숫자는 인기와 관심의 척도다.  팔로우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축적되는 인기와 관심은 필연적으로 '권력'이 된다.  SNS 시대에서 팔로우의 숫자는 내가 올리는 글과 사진이 더 많은 사람에게 노출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수치다.  더 많은 사람에게 노출된다는 것은 영향력을 의미하고 그 영향력은 그 자체로도 권력이 되며, 그 권력은 곧이어 화폐가치로 환산된다.  소위 인플루언서(influencer)의 탄생이다.  


기업들은 tv와 신문에 소비하던 천문학적인 광고비용을 개인들에게 소비한다.  사람들은 팔로워가 높은 사람에게 관심을 갖게 된다.  기업은 자신들의 제품을 인플루언서의 개인 SNS에 노출시키는 것을 통해 광고효과를 보는 것이다.  그것은 곧 돈이다.  많은 팔로워를 가진 사람이 쓰는 글 하나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곧 권력이다.  다시 말해, 팔로워라는 숫자는 '타인의 관심', '돈' 그리고 '권력'을 모두 가져다준다.  오늘도 사람들은 팔로워에 목마르다.


'팔로워'라는 단어 없이, 현 사회를 설명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2. 미국 한 맥주회사의 광고: "A few friends are better than a few thousand followers"

우리는 대부분 광고 보는 시간을 즐기지 않는다.  광고가 재미없고, 인상적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 이유 중 큰 부분은 우리나라에서 대부분의 사기업의 광고가 몇 가지 문구만을 중독성 있는 노랫자락에 맞춰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방식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보다 '광고'를 더 오랫동안 해온 다른 나라에서는, 통상적인 광고에 지칠 대로 지친 사람들을 위해 색다른 광고들이 나오고 있다.  그것이 학문으로서의 마케팅이자, 광고학의 발전과 맞물렸을 것이다.  그러한 광고들이 많지는 않지만, 가끔 좋은 메시지를 담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아주 훌륭한 한 편의 짧은 영화(short-movie)를 보는 거 같은 느낌을 주는 광고가 있다.  얼마 전 미국 방송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바로 그런 광고를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Miller Lite - Followers


광고를 보셨는가?  (혹시 못 보셨다면, 꼭 바로 위에 있는 링크를 클릭해 광고를 시청해보시길 바란다.  1분이 조금 넘는 짧은 광고다.)  어떤 생각이 드시는가?  광고의 주인공은 처음부터 수많은 사람들에게 쫓긴다.  잘 보면, 그 사람들은 주인공과 똑같은 옷을 입고 있다.  다른 주인공들도 자신과 똑같은 옷과 화장을 한 사람들에게 쫓겨 도망간다.  도망가는 순간순간 보여주는 식당에서는 자신이 주문한 음식을 먹지 않고 사진으로만 열심히 찍는 사람들이 나온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주인공은 Bar이라고 쓰인 술집 간판을 보고, 사람들의 신발과 자신의 신발을 번갈아 바라본다.  같은 신발을 신고 있음을 보고, 주인공은 자신의 신발을 벗어 그들에게 던진다.  그 신발을 갖기 위한 사람들의 쟁탈전이 시작된다.  누군가 그 신발을 얻어 기뻐한다.  주인공은 웃는 얼굴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친구들을 만난다.  창문 밖에는 아까 주인공을 따라오던 수많은 사람들이 창문을 통해 주인공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는 볼드체와 대문자로 문구가 나타난다.  "A FEW FRIENDS ARE BETTERN THAN A FEW THOUSAND FOLLOWERS", "HERE'S TO THE ORIGINAL SOCIAL MEDIA" (몇 명의 친구가 수천 명의 팔로워보다 낫습니다, 자! 여기 진짜 소셜 미디어가 있습니다)


"A FEW FRIENDS ARE BETTERN THAN A FEW THOUSAND FOLLOWERS", "HERE'S TO THE ORIGINAL SOCIAL MEDIA" (몇 명의 친구가 수천 명의 팔로워보다 낫습니다, 자! 여기 진짜 소셜 미디어가 있습니다)
몇 명의 친구가 수천 명의 팔로워보다 낫습니다 ⓒMiller


3. 맥주회사 밀러(Miller)가 하고 싶었던 말: "친구≠팔로워"

미국의 대형 맥주회사 '밀러'는 광고를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을까?  바로 '친구'와 '팔로워'가 다르다는 것을 부각하면서 친구의 소중함을 강조하고, 그 친구와 만나서 맥주 한잔을 나누며 나누는 이야기들이 진짜 소셜 네트워크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나와 닮아지려고 비슷한 옷을 입고, 비슷한 화장을 하고, 비슷한 신발을 신고 나를 쫓는 팔로워가 아니라, 각자 서로의 삶을 살아가지만 직접 만나서 서로의 힘들었던 하루를 나누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친구의 이야기를 수 있는 친구라는 관계 말이다.


지금 우리는 기술의 발달로 인해서 '친구'와 '팔로워'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있는 시대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맥주회사 밀러가 말하듯, 친구와 팔로워는 다를지도 모른다.  우리의 삶에서 '친구'와 '팔로워'는 혼재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일반적으로 팔로워는 누군가가 자신의 SNS에 올린 글, 사진, 영상으로만 그 사람을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글, 사진, 영상은 한 개인이 자신의 일상 중 타인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만을 포함하고 있다.  반면, '친구'는 가족만큼 그 사람의 다양하고 전반적인 모습을 알고 같이 살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그 사람이 '보여주고 싶은 것' 이상으로 서로를 알고 삶을 공유하는 사람으로 말할 수 있을 거 같다.  이를 친구와 팔로워의 유의미한 차이로 볼 수 있을까?


4. 인생은 끊임없는 관계의 연속

인간은 필연적으로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부부라는 '관계'를 통해 세상에 태어나고, 나아가 '가족'이라는 관계 속에서 자라난다.  이웃이라는 '관계'에서 성장하며, 학교에서 같이 공부하는 학우라는 '관계' 속에서 성숙해진다.  회사에서는 동료라는 '관계'와 협력하며 일하고, 결혼을 통해 부부라는 '관계'를 형성한다.  그리고 자녀를 낳아 부자, 모자, 부녀, 모녀 '관계'를 형성한다.  결국 우리네 인간의 인생은 끊임없이 연속되는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원래 관계는 '직접적인(physical) 만남'에 제한되는 것이었다.  만나지 않고 관계를 형성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모든 관계는 '직접적 만남'을 전제했었다.  그러나, 기술의 발달로 인해 우리는 '직접적인 만남'없이도 관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전화를 통해 목소리를 들으며 소통할 수 있게 되었고, 영상통화로 얼굴을 보면서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얼굴도, 목소리도 없이 우리는 키보드 타이핑을 통해서 소통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기술의 발달은 관계의 영역을 확장시켰다.  이제 통상적인 관계에 하나 더 '팔로워'를 추가시켜야만 한다.


5. 우리는 모두 더 나은 관계를 원하고, 그 더 나은 관계는 친구로 향한다

우리 삶에서 하는 수많은 고민들의 지분을 따져본다면, 관계에 대한 지분이 절반은 될 것이다.  가족관계, 친구관계, 연인관계를 비롯해서 우리는 수없이 많은 밤을 관계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  왜 그런가?  더 나은 관계를 원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항상 더 나은 관계를 원한다.  더 나은 아버지가 되고 싶고, 더 나은 아들이 되고 싶다.  그럼 도대체 더 나은 관계, 즉 모든 관계의 이상향은 무엇이란 말인가?


때는 바야흐로 2012년이었다.  미국이라는 땅에 처음 발을 디딘 나는 모든 것이 신기했다.  많은 것이 내가 살아왔던 환경과 달랐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나를 정말 놀라게 했던 것은, 부모님들이 아이를 부를 때 쓰는 호칭이었다.  우리나라 부모님들은 대부분, 이름을 부르거나 "아들, 딸"과 같은 호칭을 사용한다.  그리고, 아이들도 부모님을 "어머니, 아버지" 혹은 "엄마, 아빠"라고 부른다.  전자는 조금 더 상하관계가 뚜렷하고, 후자는 조금 더 수평관계가 뚜렷하다.  내가 놀랐던 미국 부모님들의 호칭은 "Buddy"였다.  친구라는 뜻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 순간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수직관계보다 수평적인 관계를 추구하는 것에 도가 튼 이 미국이라는 국가에서, 많은 부모들이 자신의 아이들을 '친구'라고 부른다는 사실이 내게 크게 다가왔다.  그리곤 생각이 맴돌았다.  '이 사람들은 자신의 자녀와 궁극적으로 '친구'가 되고 싶은 것이 아닐까?'

Hey, buddy!  Let's Go


정치철학을 전공하신 존경하는 교수님은 박사학위를 따는 데 10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10년 만에 타지에서 어렵게 박사학위를 받자마자 기쁨에 차서 계단을 내려오고 있는데, 뒤에서 방금 자신의 논문을 심사해준 지도교수님도 같이 내려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감사한 마음에 "고맙다 당신은 나의 은인이다"는 이야기를 하자, 그 교수님은 오히려 어깨동무를 하며 "이제 우리는 사제관계를 넘어서서 같은 분야 학문의 길을 함께 걸어가는 친구다"라고 말해줬다고 한다.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사제 관계가 궁극적으로 같이 학문을 연구하는 친구 관계가 된 것이다.  난 바로 이 '친구'라는 단어에 관계의 핵심이 있다고 생각한다.


6. 친구 같은 부부, 친구 같은 부모, 친구 같은 동료

많은 전문가들도 하나같이 관계의 궁극적 이상향을 '친구'라고 말한다.  친구 같은 부부, 친구 같은 부모, 친구 같은 선생님...  모든 관계가 결국 '친구'라는 단어로 합쳐진다.  내 개인적인 경험만 봐도 그렇다.  '친구'로 편하게 대할 수 없는 '연인'은 결국 너무나 버거운 존재가 되어 버린다.  나와 다른 높이에서 보는 선생님이 아니라 같은 눈높이에서 봐주는 친구 같은 선생님이야말로 기억에 남게 된다.


이는 공공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각 나라의 수장들이 만나서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에도, 바로 이 단어가 사용된다.  '친구'라는 단어 말이다.  세계에서 가장 힘센 사람들이 그렇게도 서로를 '친구'라고 부르고 싶어 한다.  정치인들에게 최고의 찬사는 '친구'라는 단어다.  "그는 나의 친구"라는 단어만큼 상대를 높이는 말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만큼 '친구'라는 단어에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는 것일 것이다.


7. 모든 관계의 완성은 친구가 되는 것

인류 역사에서, 또 다른 특별한 한 명이 바로 이 '친구'의 개념에 대해서 깊이 다루었다.  지금으로 2020년이 넘는 시간 전에 이 땅에 왔던 '예수'라는 청년이다.  그는 정말 특별한 이야기를 했다.  자신과 우리들의 관계가 종-주인의 관계가 아니라 친구-친구의 관계라는 것이다.  그 누구도 하지 않았던 말이다.  보통 종교의 지도자나, 자신을 '신'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권위를 내세운다.  그래서 더 신비롭고, 강하다는 것을 표상시킴으로써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부여한다.  하지만, 예수는 정말 달랐다.  그는 "나를 따른다면, 이제 우리는 친구야"라며 함께 걷자며 손을 내밀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요 15:12-15)  

My command is this: Love each other as I have loved you. Greater love has no one than this, that he lay down his life for his friends. You are my friends if you do what I command.  I no longer call you servants, because a servant does not know his master's business. Instead, I have called you friends, for everything that I learned from my Father I have made known to you. (John 15:14-15)


팔로워와 친구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결국 내 생각은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  왜 예수는, 인간과 자신의 관계를 '친구'로 규명했던 것일까?  굉장히 흥미로운 부분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도 흔히 자신을 예수의 팔로워(Follower)로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은연중에 우리는 예수를 최우선적으로 따라야 하는 존재로 놓고 있다.  하지만, 정작 예수는 모든 이들과 '친구 맺기'를 이야기했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예수에게 관계의 완성은 '친구가 되는 것'이었다는 점이다.


다시 앞서 대형 맥주 회사 '밀러'의 광고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친구는 팔로워와 다르다.  친구는 서로의 삶을 공유한다.  일방적인 공유, 혹은 부분적인 공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들도 공유한다.  그것이 깊은 친구일 것이다.  보여주고 싶은 것 이상으로 삶을 공유하는 것은 결국 '사랑'이라는 단어를 놓고서는 설명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팔로워와 친구의 가장 큰 차이는 '사랑'이다.  내가 보고 싶지 않은 상대방의 모습도 보고 품어줄 수 있는 사랑, 그리고 내가 보여주고 싶지 않은 내 모습도 상대에게 보여주는 사랑.  또 그럴 수 있는 존재가 되어주는 것이 사랑일 것이다.  그렇기에 관계를 완성시키는 것은 사랑이고, 그 사랑의 궁극적인 모습은 '친구'가 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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