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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용석 Oct 30. 2019

성경과 어벤저스(Bible and Avengers)

이원론적 세계관 이야기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 및 분석철학을 바탕으로)

1. 대한민국이 사랑한 영화: 어벤저스(Avengers)

  세계 최고의 배우, 감독, 작가 그리고 천문학적인 돈이 모여 세계 최고의 '영상물'을 만드는 장소가 바로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위치한 할리우드다.  다 셀 수도 없을 만큼 훌륭한 대작들이 할리우드의 품에서 탄생했다.  그 대단한 할리우드에서 만든 영화들 중, 소비자들이 까다롭기로 소문난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관객수를 기록한 영화가 바로 '어벤저스: 엔드게임'이다.  


  어벤저스: 엔드게임은 2019년 8월 6일 기준으로 13,934,240명을 돌파하며 국내 상영 외화 중 역대 관객수 1위를 기록했다.  이 뿐만 아니라, 어벤저스: 인피니티 워가 11,211,941명, 어벤저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이 10,494,840명이 1000만 관객을 돌파하는 등, 이외에도 아이언맨 시리즈와 캡틴 아메리카 시리즈가 1000만 가까운 관객을 동원하는 데 성공했다.  

ⓒ MARVEL

  우리나라 골목골목의 상권들이 민감한 소비자들의 외면에 의해서 얼마나 쉽게 바뀌는지를 생각해본다면, 이러한 기록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 수 있다.  대한민국의 수많은 시민들은 이 어벤저스라는 하나의 '브랜드'에 열광하고 있고, 그들의 마음속에 이 어벤저스는 상당 부분 이미 깊숙이 스며들었는지도 모른다.  


  어벤저스가 단지 마블(MARVEL) 사의 영화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참 많을 것이다.  하지만, 2009년 12월 31일, 마블 엔터테인먼트를 월트 디즈니 컴퍼니가 40억 달러에 인수하면서, 이미 10년 전 마블은 디즈니의 회사가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디즈니의 문화 세계에 살아가고 있다.  바야흐로 디즈니의 문화제국주의 시대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생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왜 이렇게 유독 어벤저스에 열광했던 것일까?


2. 어벤저스의 세계관: 빌런(villain) v. 반(反) 빌런(Avengers)

  어벤저스의 흥행에는 수많은 이유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어벤저스의 한국에서의 흥행 요소중 하나는 바로 '간단하고 친숙한 세계관'이라고 생각한다.  어벤저스는 일관되게 한 가지 세계관을 갖고 있다.  바로 빌런(villain)을 출연시킴으로써 악당과 그 악당에 맞서 싸우는 이들을 대립구도로 만든다.  그래서 빌런을 대표하는 '타노스'와 아이언맨, 캡틴 아메리카, 헐크 등등 수많은 영웅들이 하나로 합쳐져 싸우는 구도가 완성된다.


  일차원적인 선 (goodness) v. 악 (badness)의 대립구도는 세상을 아주 간단하게 바라볼 수 있게끔 만들어준다.  실제로는 다차원적으로 조금 나쁜 놈, 덜 나쁜 놈, 조금 더 나쁜 놈과 같이 나쁨에도 정도가 존재하겠지만, 그것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압도적인 '악'을 탄생시켜 대조시킴으로써 그 '악'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이들은 '선'으로 한데 묶이게 만들어준다.  이런 장치는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다른 가치판단을 할 필요 없이 단지 '악'을 제거하는 것만에 집중할 수 있게끔 만들어준다.  지구를 침략한 악한 존재와 지구를 지키기 위해 모인 정의롭고 착한 무리들의 대조! 그것이 바로 어벤저스의 근간에 위치하고 있다.


  이를 철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이원론 (dualism)'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이러한 이원론은 우리나라의 많은 고전 문학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잘 알고 있는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사필귀정'의 세계관,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나쁜 사람은 벌을 받는다는 '권선징악'의 세계관과 매우 유사한 정서를 공유한다.  게다가 우리나라 현대 정치는 반공, 여-야, 영남-호남과 같은 이원론적 방식으로 계속해서 이루어져 왔다는 점에서 보았을 때, 이러한 이원론적 세계관을 가진 어벤저스로 하여금 우리 국민들에게 더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게 하지 않았을까?

어벤저스뿐만 아니라, 디즈니는 꾸준히 선과 '압도적 악'의 대립을 자신의 콘텐츠의 세계관으로 삼아왔다. ⓒDisney


3. 이원론의 배경: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과 분석철학

  그럼 이원론은 도대체 무엇이고,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이란 말인가?  이 글에서 논의해보고자 하는 성경의 세계관과 선악이원론적 세계관이 왜 다른지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이원론 자체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해당 설명을 위해선 반드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는데, 바로 그 유명한 철학자 플라톤(Plato)이다.  


  플라톤은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한 철학자다.  그는 본질을 세계 밖에서 찾으려고 했는데, 그 과정 속에서 바로 이데아 개념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데아는 참되고 본질적인 세계, 그리고 이데아 외의 것들은 모두 원본이 아닌 사본에 불과하다 보았다.  바로 이원론이다.  플라톤은 이데아와 반(反) 이데아로 구성된 이원론을 기반으로 세상을 바라봤다.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은 실제 동굴 밖에 존재하는 '원본'과 그 본질이 빛에 비추인 그림자일 뿐인 '사본'으로 구성된다.  그는 세상을 이원론적으로 바라보는 세계관을 형성했다.

  이러한 이원론적 세계관을 통해서 시작된 것이 분석철학(Analytic philosophy)다.  세상을 '역, 이, 대우'의 논리구조적 방식으로 분석하는 틀의 시작이 된, 플라톤의 분석철학은 서양철학의 역사를 지배하는 관점이 되었다.  이 사상은 역사와 함께 계속되어 칼빈, 키에르케고르, 칼 바르트에 이르러 이후 변증 신학으로 꽃을 피운다.


  여기서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플라톤의 분석철학이 다수의 사람들로 하여금 본능에 따른 흥미를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이원론에는 회색의 영역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원론은 불분명한 것을 남겨놓는 것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가지는 사람들의 본능을 간단하고 명료한 방법을 통해 분석하고 분류시켜 그들의 마음을 만족시켜준다.  불확실성을 제거하고 싶은 현대인에게도 이러한 이원론은 매력적으로 다가오게 된다.

이원론은 회색 영역을 제거하는데 획기적인 방법이었다.  이는 의심과 의구심은 줄이고, 확신을 만드는데 탁월했다.


4. '플라톤주의'와 '신 플라톤주의'의 영육 이원론

  플라톤의 철학은 플라톤주의와 신플라톤주의에서 결국 영육 이원론으로 도달한다.  그는 인간의 프시케(영혼)는 원래 하늘의 세계에서 이데아(진리)를 바라보며 살았으나, 육체와 결합하게 되었고, 따라서 맑고 참되고 아름다웠던 프시케는 육체에서 나오는 욕망으로 인해 타락하고 더러워졌다고 주장했다.  플라톤에게 육체는 감옥이었고, 벗어나야 할 공간이었다.  영혼은 이데아를 바라보며 살지만, 추잡한 욕망을 만들어내는 육체로 인해 하늘나라의 세계를 바라보며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는 영혼은 선한 것이고, 육체는 악한 것이라는 선악 이원론적 이분법적 사고가 내재되어있다.


5. 성경적 세계관이원론(선악이원론/영육이원론)

  본 글의 제목이 '성경과 어벤저스'인 만큼, 이제 본격적으로 성경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결론부터 말하자면, 어벤저스와 달리 성경은 이원론적 세계관을 갖고 있지 않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성경은 결코 세상을 선과 악 두 가지로 나누어 바라보는 선악이원론(manichéisme)이나 플라톤주의적인 영육이원론의 세계관을 갖고 있지 않다.  성경은 이 세상을 '하나님(신)과 사탄(마귀 혹은 어둠의 세력 등)의 대결구도'로 보지 않는다.  또한, 성경은 세상을 '영 v. 육'의 대립 구도로 보지 않는다.


  세상을 바라보는 많은 시각들이 존재하지만, 특히 이원론과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바로 성경이라는 책이다.  그리고, 기독교(Christianism)는 그 성경을 믿는 종교다.  성경이 정말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한 영혼 사랑과 모든 열방을 향하는 하나님의 마음이지만, 이원론적 사고는 이와 많은 대척점을 가지게 된다.  놀라운 사실은, 생각보다 많은 부분에서 우리는 기독교인과 목회자들을 통해 교회에서 이원론적 세계관에 입각한 이야기를 듣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기독교 작가인 C.S. 루이스가 "이원론이야말로 기독교 다음으로 용감하고 그럴듯한 신조이다"라고 말했듯, 오랜 역사 동안 수많은 크리스천들은 끊임없이 성경에 이원론을 접목시켜 이원론적 세계관으로 세상을 바라 바 왔다.  C.S. 루이스가 그의 저서 『순전한 기독교』에서 비판했던 부분 역시 바로 교회와 교회 밖을 구분하여 선악으로 나누는 방식의 선악이원론이었다.  우리는 이를 '기독교 이원론'이라고 부른다.


이원론이야말로 기독교 다음으로 용감하고 그럴듯한 신조이다

C.S. 루이스


철학에서 이원론(dualisme)이란, “근본적으로 외재적인(en exteriorite) 방식으로 서로 상정된 최종의 두 원칙에 의거한 현실의 질서, 추론의 방식이다... 선악이원론(manichéisme)은 이러한 사고체제의 극단적 형태로서, 기독교 전통의 한 가운데에서 탄생한 형태이다.”

「두 형제, 두 자매를 다룬 동화에 나타난 선악개념과 그 무의식적 원형」, Association Culturelle Franco-Coreenne Volume , Issue24, p245.


6. 성경적 세계관은 무엇일까?

  이원론은 불확실성을 제거하고 싶은 우리의 본능에게 너무나 큰 유혹을 가져다준다.  선과 악이 혼재된 것처럼 보이는 우리의 삶에서, 선과 악을 확실히 구분해주는 것은 큰 쾌감을 준다.  특히, 불확실성을 견디지 못하는 나와 같은 사람에게 불확실한 것을 확실하게 분류하여 간단하게 이원론적으로 만드는 것은 너무나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이원론은 기독교의 본질을 오염시키는데 일조했고, 이원론을 통해 교회는 금욕주의, 반염세주의, 신비주의로 향해가게 되었다.


  그럼 도대체 크리스찬은 어떤 세계관을 가져야 한단 말인가?  일말의 망설임 없이 그 대답은 '성경적' 세계관이다.  하지만 성경을 보는 다양한 시각이 존재하기에 이에 대해서는 많은 의견이 존재할 수 있겠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성경적 세계관의 밑바탕에는 하나님 중심의 일원론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 일원론에는 반드시 교회-밖(세상)의 일치, 자유의지에 기반한 개인의 '죄'에 대한 책임의식 확충,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준 '사랑'의 실천이 포함될 것이다.  서른이 조금 넘은 청년이었던 예수는 구약성경에 있는 율법들을 한데 묶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 말한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함께, 그리고 동시적, 연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예수를 따르는 길이 아닐까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평신도 스스로가 스스로의 세계관에 대해 생각하고 점검하는 자세라고 생각한다.  스스로 나는 어떠한 세계관을 가지고 세상을 보고 있는지, 나아가 나는 어떠한 세계관을 가지고 성경을 읽고 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특히 어벤저스를 보듯 빌런(Villain)과 반(反) 빌런(Avengers)의 구도로 성경과 세상을 보고 있다면 말이다.  크리스찬들이 교회와 세상을 완전히 분리하여 바라볼 때, 그리고 영과 육을 선과 악으로 분리하여 바라볼 때 우리는 성경이 실제로 말하는 삶과 멀어지게 될 것이다.


The dualistic idea is not biblical.  Scripture does not teach that there are two equal opposing forces that have eternally existed.  God alone has existed eternally.

Don Stew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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