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급 지식의 보편화 v. 반(反)이성주의
1. '말'을 통해 지식을 습득하는 것의 익숙함
우리는 유난히 '말'을 통해 배우는 것에 익숙하다. 가정에서 '말'을 통해 교육을 시작했고, 첫 학교인 초등학교에서도 선생님의 '말'을 통해 교육이 진행됐다. 그 이후 대부분의 교육에서 우리는 '말'을 통해 지식을 습득해왔다. 15년 전부터 등장했던 '인터넷 강의'는 수많은 중고등학생 수험생들의 두 눈을 조그만 화면에 고정되게끔 만들어왔다. 나아가 온라인 강의로 진행되는 대학까지 이제는 보편화되었다. 우리가 강의와 강연은 언제나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교육방법으로 자리매김해온 것이다. 유튜브와 같은 '동영상'의 일상화는 이러한 익숙함을 가중시키는 충분한 촉매제가 되었다는 것 역시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2. 세상에는 쉬운 지식만 있지 않다
세상에는 쉬운 지식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어려운 지식이 난무한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일까? 지식 습득의 난이도는 지식의 난이도에 비례하기에, 쉬운 지식을 전하는 것은 쉽고 간단하다. 하지만 반대로 어려운 지식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많이 필요하며, 그것을 전달할 수 있는 능력도 갖추기가 어렵다. 예를 들어, 대중교통을 타고 일정 목적지까지 가는 방법을 설명하기란 굉장히 쉽다. 하지만, 인간이 사는 목적을 철학적으로 설명하기란 꽤나 어려운 일이다.
3. 어려운 지식을 어떻게 쉽게 전달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
재미난 사실은 우리의 삶에선 습득이 쉬운 지식보다 습득이 어려운 지식을 습득해야 하는 상황이 더 많이 생긴다는 사실이다. 쉬운 지식은 일상생활을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혹은 저절로 익혀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습득이 어려운 지식을 가르치기 위해 '선생'이라는 개념이 탄생했고, 나아가 선생이 모인 '학교'가 탄생했다. 학교의 목적은 간단하다. '어떻게 어려운 지식을 '쉽게' 전달할 것인가?' 이것이 바로 그 목적이다.
어려운 것을 쉽게 가르치기 위해서 지식의 '전달자'는 반드시 그 지식을 깊이 있게 공부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래서 교육의 장에서 교육을 담당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피교육자보다 항상 더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하지만, 교육의 수준이 높다고 해서 누구나 어려운 것을 쉽게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교육자는 고민에 빠지게 된다. 어떻게 어려운 것을 쉽게 가르칠 수 있을지에 관한 고민이다. 그것이 누구나 가능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려운 것을 쉽게 이야기하는 것은 실력이다. 쉬운 얘기를 쉽게 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전달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다. 개념에 대한 확실한 이해가 뒷받침되고, 그것을 일상의 언어에 가깝게까지 표현해낼 수 있어야 비로소 어려운 것을 쉽게 말할 수 있게 된다. 이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가치가 높다. 그래서, 이러한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가 부와 명예의 문제에 굉장히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4. 도널드 트럼프는 어려운 정치를 쉽게 이야기해서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놀랄만한 예시 하나를 들어보자. 대통령의 '단어 사용 수준'은 당선과 큰 관계를 갖는다. 미국은 우리나라보다 선거의 역사가 긴 만큼, 선거와 투표에 대한 다양하고도 흥미로운 접근들이 많이 이루어져 왔다. 그중 흥미로운 사실은, 미국의 대통령 후보가 연설에서 사용하는 단어와 문장의 수준이 해당 후보의 당락에 꽤나 유의미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다.
지표와 지수를 담당하는 기관마다 그 수치는 조금씩 다르지만, 한 연구에 따르면 현 미국 대통령인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가 자신의 '출마 연설'에서 사용한 단어와 문장의 수준은 무려 초등학교 4학년 수준의 어린이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힘센 나라의 대통령은 유려하고 고고한 단어들로 자신의 연설을 채웠을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충격적 이게도 현 대통령은 우리 나이로 약 11-12살 정도의 어린이가 이해할 수 있는 정도의 연설을 통해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다. 그와 경쟁했던 버니 샌더스(Bunny Sanders)의 경우 중학교 3학년 정도의 학생이 이해할 수 있는 연설로 대중을 만났다.
5. 어려운 정치를 쉽게 설명하는 것의 명(정치의 보편화)과 암(반이성주의)
1) 明: 정치의 보편화
이는 나에게도 깊은 생각에 빠지게 만들었다. 우리나라 국회tv나 대통령의 연설을 보면 유려하고 한자로 된 어려운 단어들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자연스레 정치는 어려워지고, 대중들과 멀어진다. 의도적이었던, 의도적이지 않든 간에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어려운 단어를 사용한다. 전문성을 갖춘 단어를 사용하거나, 추상적인 단어를 사용하여 청자의 이해를 어렵게 만든다.
그러다 보니 우리나라에서는 '대통령이 되려면 쉬운 단어를 사용하라!'라는 취지의 기사들도 많이 나왔다. 어떤 교수는 현재 정치권에 어떤 사람이 쉬운 단어를 쓰는지도 간단히 분석하여 내놓기도 하였다. 이러한 것을 보면 어려운 정치를 쉽게 설명하는 것에는 밝은 부분만 있는 것처럼 보인다.
2) 暗: 반(反)이성주의
하지만, 분명 어두운 부분도 존재한다. 전달하는 사람의 입장이 아닌, 청자의 입장에서 바라봤을 때에 그러한 부분은 도드라지게 드러난다. 독일의 철학자 비토리오 회슬레(Vittorio Hösle)는 "최근 10여 년 동안 이성에 반하는 야만적 행태가 나타났다. 미국의 트럼프나 프랑스의 르펜은 보편주의를 거스른다. 이들을 보면 이성에 회의가 들 법도 하지만 원칙적으로 이성은 진화한다고 볼 수 있다. 위험한 현상에 이성이 개입해 바꿀 필요가 있다."라며 이러한 현상이 위험하다고 경고한다. 이러한 현상이 일어난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이 가져온 반(反)이성주의가 우리로 하여금 '이성적 사유'를 배제시키는 방식으로 사회를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근대를 지배했던 이성과 합리성이 결국 가져온 것은 '전쟁'과 '폭력'이었다며, 포스트모더니즘은 이성과 합리성을 버릴 것을 제안한다.
6. 어려운 것을 쉽게 이야기하는 것에 열광하는 우리 사회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여기까지 봤을 땐, 별 문제가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이 문제는 사회과학적 뿐만 아니라 철학이나 형이상학적으로 우리 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주고 있다. 어렵고 읽는 것이 힘든 원전을 펼치기보다 인터넷 강의 혹은 유튜브와 같은 2차 매체(누군가에 의해서 1차 해석된)로 개념들을 이해하는 것은 이제 우리 사회에서 너무나 보편적이다. 사람들은 '강연'에 환호하고, 막상 강연의 근간이 되는 출력물에는 큰 관심이 없다. TED로 대표되는 짧은 시간(보통 15분 이내)에 압축된 정보를 전달하는 영상매체와 강연은 젊은이들의 끊임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 문득 과거 읽었던 소설 『댓글부대』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책 읽기 싫어하는 젊은이들이 보이는군요. 강연 문화는 책 읽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 많을 때 흥합니다. 우리나라도 이제 미국처럼 강연회가 많아질 모양입니다.
책 읽기 싫어하는 젊은이들이 보이는군요. 강연 문화는 책 읽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 많을 때 흥합니다. 우리나라도 이제 미국처럼 강연회가 많아질 모양입니다. 장강명, 『댓글부대』, 은행나무, 2015, 23쪽.
미국 건국의 아버지(founding father) 조지 워싱턴의 연설은 대학원 2학년 학생 정도가 이해할 수 있는 어휘로 구성되었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나 지금 미국의 대통령은 초등학교 4학년 학생이 이해할 수 있는 어휘로 말을 하고 트위터를 쓴다. 놀랍지만, 동시에 굉장히 긍정적인 변화라 생각한다. 미국의 사례는 그러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단지 이것을 트렌드의 변화로 보고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것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잠시 멈춰 서서 사유(思惟)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