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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용석 Sep 20. 2019

인간의 부패성(Human Depravity)

우리는 사람을 온전히 신뢰하고 믿을 수 있는가?

I. 들어가며: 무엇을 배울 것인가?

근 몇 년간 대한민국의 정계는 정말 폭풍을 맞은 것 같았다.  수많은 일들이 있어서 이를 하나하나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굉장한 부담으로 다가온다.  최근 대통령은 탄핵되었고, 1심과 2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 전 대통령은 검찰에 기소되어 구속수사 중이다.  차기 대선주자로 선망받던 한 정치인은 비서 성폭행 혐의를 받고 하늘 위에서 골짜기 바닥까지 수직으로 추락했다.  민심은 움직였으며 여당은 더 이상 붉은빛을 띠지 않는다.  때로는 그 사실이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대한민국의 정계는 순식간에, 그리고 엄청나게 뒤바뀌었다.  이러한 최근 몇 번의 재판 결과로 인해 앞으로 개정되는 근현대사 책은 한껏 두꺼워질 것이다.


어렸을 때 초등학교에서 배운 온고지신(溫故知新)이란 말이 떠오른다. 우리는 역사를 배우고, 그 역사를 배움으로 이후에 그 역사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으려 한다.  최근 대한민국의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웠는가? 그리고 더 중요한 점으로 우리는 무엇을 반드시 배워야만 할까?  나는 한치의 망설임 없이 그것이 '인간의 부패성 (Human Depravity)'에 대한 이해라고 대답하고 싶다. 그리고 덧붙여 현재 대한민국에 이것에 대한 이해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음을 한탄하는 심정으로 이 글을 쓴다.

The Fall in Genesis / Human Depravity

II. 인간의 부패성

1. 권력과 인간의 관계

권력을 가지면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나의 말에 누군가가 움직이고 무엇인가가 바뀌게 되면, 그 힘을 사적 이익을 위해 사용하고픈 마음도 들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영국의 한 정치인은 한 명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고, 그 명언은 지금까지 권력과 부패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인용되고 있다.

"Power tends to corrupt, and absolute power corrupts absolutely. Great men are almost always bad men."

John Dalberg-Acton, 『Letter to Archbishop Mandell Creighton』


존 액튼 경(John Dalberg-Acton)이 대주교에게 쓴 편지에서 이야기 한 "권력은 부패하는 경향을 가지며,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말은 참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액튼이 사용한 그 권력이라는 단어가 어떠한 주체를 통해서 발현되는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권력은 반드시 사람을 통해서 발현된다.  또한, 권력은 사람에 의해서만 소유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조금 표현을 바꿔볼 수 있지 않을까?  "권력은 부패한다. 그리고, 그 권력을 소유한 사람도 부패한다."  (권력의 부패가 먼저인지, 사람의 부패가 먼저인지에 대한 철학적 이야기는 잠시 나중으로 미뤄두도록 하자)

Power tends to corrupt and absolute power corrupts absolutely. Great men are almost always bad men, even when they exercise influence and not authority: still more when you superadd the tendency or the certainty of corruption by authority. There is no worse heresy than that the office sanctifies the holder of it. That is the point at which . . . the end learns to justify the means. You would hang a man of no position, . . . but if what one hears is true, then Elizabeth asked the gaoler to murder Mary, and William III ordered his Scots minister to extirpate a clan. Here are the greater names coupled with the greater crimes. You would spare these criminals, for some mysterious reason. I would hang them, higher than Haman, for reasons of quite obvious justice; still more, still higher, for the sake of historical science. . . .

Letter to Archbishop Mandell Creighton 중에서 발췌.


막스 베버(Max Weber)는 "정치란 국가 상호간이든 국가가 포용하는 인간집단 상호간이든 간에 권력의 배당과 그 분배에 영향을 끼치는 끼치려 하는 노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말한 바 있고, 정치학자 데이비드 이스턴(David Easton)은 정치를 "사회적 희소가치의 권위적 배분(authoritative allocation of values)"이라 일컬었다.  베버의 이야기와 이스턴의 이야기는 모두 꽤나 맞는 이야기다.  분명히, 희소가치는 힘에 의해 배분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서 생각해보자.  그 '힘'을 배분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힘'이 필요할까?


권력의 존재가 전제된 권력의 분배는 분명히 역설적이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힘을 배분하는 정치는 '힘'과 떼려야 뗄 수 없는 필요충분조건의 관계가 되는 것이다.  그 '힘'은 조금 더 정확히 표현했을 때 '권력'이라는 단어로 치환될 수 있겠다.  논리를 더 전개해보자.  간단한 3단 논법이다.  권력은 언제나 부패한다.  정치는 권력과 언제나 함께한다.  따라서 정치는 언제나 부패한다.  정치는 누가 하는가?  앞서 말했듯, 바로 '인간'이 한다.  다시 정리해보자, 권력을 가진 인간 혹은 권력을 추구하는 인간은 언제나 부패할 수밖에 없다.  이에 따르면, 인간의 부패성은 필연적인 것이다.


2. 종교가 말하는 인간이 가진 죄성

앞서 인간의 부패성을 인문학적, 심리학적, 역사적으로 바라봤다면, 이제 한 번 종교적으로 찾아보자.  인류의 역사를 그 무엇보다 길게 함께한 종교를 빼놓고 이를 논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그중, 성경을 진리로 믿는 기독교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해보겠다.


성경이 말하는 핵심 중 하나는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기독교의 시작인데, 그것이 참 힘들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에서 전도가 어려운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한번 생각해보자.  우리는 모두 착하다, 선하다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가?  죄인이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Adam and Eve in the Garden of Eden", Wolfgang Krodel

"예수 믿으세요!"라는 말 때문인지, 사람들은 흔히 기독교의 근본적인 본질에 대해 그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종교라고만 생각한다.  물론 기독교의 핵심적인 사안인 것은 맞지만, 그보다 먼저 그리고 더 기반되는 본질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바로 '인간의 죄성'일 것이다.  이것을 원죄(original sin)라고 부른다.  선악과 사건을 저지른 아담을 통해 죄성이 인간에게 들어왔고, 그 죄성은 인간을 죄인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바로 기독교가 믿는 모든 믿음의 시작점이다.  인간이 죄인이 아니라면, 인간이 왜 죽겠는가?  또한, 구원이라는 것은 왜 필요하겠는가?  그래서 사실 교과서적인 신앙은 자신의 '죄악 됨'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시 51:5


다시 말해, 기독교의 핵심 전제들 중 하나는 '인간의 죄성'이고, 이는 '인간의 부패성'을 포함한다고 할 수 있겠다.  기독교 외에도 대부분의 종교는 인간의 죄성이나 마음의 악함을 전제한다.  성경을 믿는 천주교, 무슬림은 당연할뿐더러 불교 역시 인간의 욕심을 중점적으로 논한다.


3. 소결

'인간의 부패성'이라는 측면에서 우리는 역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사회과학적으로나, 나아가 종교적으로나 부정할 수 없는 인간의 특성임을 인정하게 된다.  누군가는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잖아?  평생을 청렴결백하게, 부패하지 않고 보낸 사람도 있어"라고 말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러한 청렴성과 反부패성이 길러지기 위해서는 엄청난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은 당연하고, 나아가 그러한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손꼽히는 소수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한 개인의 부패성을 측량하는 척도는 결국 공공에 밝혀진 것에 한정된다고 생각하기에, 그러한 사례는 없다고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인간은 부패성을 가지고 있다.  아니, 최소한 '권력'을 가진 인간은 필연적으로 부패성을 가진다.


III. 인간의 부패성에 대한 상반된 반응들

1. 개요

인간은 권력을 가졌을 때, 필연적으로 부패한다.  이러한 명제를 앞에 두고, 두 가지 상반된 입장이 나타나게 된다.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 대한 믿음을 갖는 것이다.  인간의 자제력에 믿음을 가질 수도 있고, 신앙에 믿음을 가질 수도 있다.  나아가 "그러면 뭘 믿을 건데?"라는 물음을 나오게 만드는 '대안이 없는 상황'도 이러한 믿음에 한몫을 한다.  두 번째는 인간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극히 줄이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을 견제하는 것이다.  조금 더 세부적으로 접근하면, '권력'을 가진 인간을 견제하는 것이다.  그것은 제도를 통해서 발현되고, 그 제도는 '법'을 의미한다.  이는 흔히 시스템이라고도 불린다.


2. 상반된 반응들: 권력을 가진 인간을 믿을 것인가? 아니면 견제할 것인가?

1) 인간에 대한 믿음

많은 역사들이 권력과 인간이 함께 했을 때, 부패했던 사실을 보여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항상 인간에 대한 믿음을 갖는다.  이는 계몽주의의 시작 이후 더 굳건해졌다.  왕의 부패는 물론이었고, 교황과 교황청의 부패로 인해 기독교는 탄생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이라는 절대자에 의존하던 시대가 지나고, 눈에 보이는 '인간'에 의존하고 의지하는 방향으로 우리는 움직여왔다.  사람들은 서로 모임으로서 힘을 만들어내고, 그 힘은 이끄는 한 사람의 존재를 만들어낸다.  전체주의와 독재정권의 그림자가 지나간 이후에도, 사람들은 절대로 한 명의 리더를 신뢰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실제로 그러한 불신은 현실화되기가 참 어려웠다.  


결국 속았음에도 다시 인간을 믿고, 그 인간의 부패성에 좌절하고, 다시 새로운 사람에게 희망을 가지는 역사가 반복되어왔음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다.  로마 제국에서 실현되었던 과두정의 실패는 이를 정확히 보여준다.  인간의 역사는 언제나 누군가의 이끔으로 이루어졌다.  모두를 이끄는 누군가의 등장, 그리고 앞서 논증했듯이 그 누군가는 힘을 갖게 되고 그 힘은 절대 부패하기에 인간도 부패하게 되어 그 권력은 다른 누군가에게로 이양(상황에 따라 그 시기는 길거나 짧을 수 있겠지만)된다.  다시 말하지만, 인간의 이러한 역사는 지속적으로 반복되었다.


이를 짚었던 철학자가 있었으니, 바로 그 유명한 헤겔이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단 세 글자의 단어로 전 세계에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이는 "정ː-반-합 (正反合)"이다.  헤겔은 모든 세계가 변화하는 방식을 하나의 방식으로 표현하고 싶어 했고, 그에 따라 정반합이라는 변증법 이론이 나오게 되었다.  정반합은 헤겔에 의해 정식화된 변증법의 논리 전개를 세 단계로 나눈 것으로 1) 정, 2) 그에 반하는 반, 그리고 3) 상호의 이점을 보완한 합으로 끊임없이 발전해간다는 이론이다.  인간의 역사가 딱 이렇지 아니한가?  누군가가 나타났을 때, 1) 그 사람을 믿고, 2) 그 사람에 실망하고 그 사람이 그렇게 된 이유를 찾아내고, 3) 그 이유가 없는 다른 새로운 사람은 다를 것이라 믿고 다시금 그를 믿는다.


2) 인간(특히 권력을 가진 인간)을 믿지 않음

반대의 경우도 등장했다.  인간을 신뢰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다.  왕정에서 왕과 그 혈연들 나아가 왕의 밑에 있는 신하들의 부패성에 진저리를 친 귀족들과 백성들은 마그나-카르타(Magna Carta Libertatum)를 왕의 면전에 들이밀었다.  법 아래 모두가 평등한 사회를 꿈꾼 첫 번째 사건이다.  바로 현실화된 '법치주의'의 탄생이다.  물론, 법치주의가 플라톤에 의해 이론적으로 형성되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법이 정부의 주인이고 정부가 법의 노예라면 그 상황은 전도유망하고, 인간은 신이 국가에 퍼붓는 축복을 만끽할 것입니다.” 

Plato,『Laws』


법치주의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고, 허울뿐이었다.  오히려 인간의 부패성은 계속되었고 더 나은 정책이 필요했다.  그래서 프랑스의 사상가 몽테스키외는 유럽 전역을 돌며 법과 제도를 공부한 뒤 써낸 자신의 저서 『법의 정신』에서 '법치주의'와 함께 '삼권분립(三權分立, Separation of powers)'을 외친다.  로크가 이야기했던 이권분립을 발전시켜  그는 법을 만드는 입법과 법을 시행하는 행정, 법 위반 여부를 판단하는 사법으로 국가 권력을 분리할 것을 제언하였고, 이는 현대 삼권분립(입법, 사법, 행정의 분립)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의 이론에는 기존 한 사람 혹은 한 집단이 가졌던 권력을 서로 나눠가지고, 그 나눠진 권력이 서로를 견제하는 형태로 부패를 방지하자는 의도가 숨어있었다.


하지만 이 역시 로마의 사례를 통해 실패를 거듭했다.  미국을 필두로 수많은 국가들이 자신의 헌법에 삼권분립 조항을 집어넣기 시작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2019년 오늘날 우리는 매일 밤 뉴스에서 삼권분립의 실패를 직접 목격하고 있다.  하지만, '권력' 통제와 부패 방지의 측면에서 아직까지 삼권분립보다 더 나은 방법은 나타나지 않았고, 아직도 수많은 국가들은 삼권분립을 신봉하고 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이러한 법치주의와 삼권분립은 실패하고 만 것일까?


III. 법과 인간: 법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1. 법도 인간의 손을 통해야만 하는 것

끊임없는 정반합 속에서 사람들은 고민했다.  인간을 믿을 수 있을까?  그래서 인간이 아닌 다른 것을 믿자고 말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들이 누구냐고?  바로 법률가들이다.  그들은 인간이 아닌 시스템(법)을 믿을 것을 제안했다.  그리고, 법치주의와 삼권분립이 시스템 속으로 들어왔다.


법치주의와 삼권분립을 받아들인 인간의 역사는 꽃길이 될 것 같았지만, 기어코 문제가 생겼다.  사람을 믿지 않는다면, 결국 '법'이라는 시스템을 통해 사람의 부패성을 견제해야 하는데, 그 '법' 역시 인간의 부패성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법으로 쓰인 삼권분립도 좋고, 법치주의라는 것도 너무나 좋은데, 결국 이 '법'을 만들고, 집행하고, 해석하여 판결을 내리는 주체는 부패성을 가진 '인간'이라는 점이었다.  아무리 완벽한 법이라고 할지라도, 부패성을 가진 인간의 손이 타는 순간, 그 법은 더 이상 완벽하지 않게 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법을 대하는 인간의 손길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대한 문제가 생기지 않겠는가?  이러한 문제는 끊임없이 법률가들과 법학자들 사이에서 뜨거운 감자로 자리매김하였고, 사실 아직도 풀리지 않은 숙제와도 같은 질문이다.  소위 '헌법'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질문은 미국 사법 역사 전체를 가로지르는 큰 질문일 뿐만 아니라, 헌정주의 아래 살고 있는 전 세계 모든 나라들을 통째로 관통하는 중요한 질문이다.  이를 '헌법해석론'이라고 부른다.


2. 헌법해석론 논쟁

이를 간단히만 이야기하자면, 헌법을 어떻게 해석할지에 대해 크게 1) 헌법을 쓰여있는 그대로 볼 것을 주장하는 원의주의(Originalism)와, 2) 쓰여있는 그대로에서 더 확대하여 볼 것을 말하는 비원의주의(Non-Originalism)로 나뉘고, 비원의주의는 살아있는 헌법론(Living Constitution)으로 발전하여 판사의 재량을 극대화시키는 식으로 발전한다.  Originalism은 intent에 한정하는 것이 아닌 조금 더 확대된 meaning을 보는 신원의주의(New Originalsim)으로 발전한다.  이러한 헌법해석론은 다른 글을 통해서 소개하도록 하겠다.


3. 소결

법이라는 것은 결국 인간을 통해서만 인간에게  적용될 수 있기 때문에, 부패성의 문제에서 자유롭게 되지 않았다.  헌법해석론을 통해 보았듯, 아직도 세계 그 어느 곳에서도 이러한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아직 법률가들 개개인의 부패로 인해 사법불신에 대한 이야기만 진행 중일 뿐, 이러한 깊은 이야기가 부분이 공공의 장에서 이야기조차 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미국에서는 도대체 헌법은 누가 쓴 것이지?  우리가 쓴 것이 아닌데, 왜 우리는 이것을 지켜야 하는가? 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 바 있다.  이러한 논의를 학부 2학년 헌법 시간에 이국운 교수님을 통해 들은 기억이 난다.  그때는 이러한 이야기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었다.

미국 9th Circuit에서 연방판사를 지냈던 Noonan Jr.는 "Fed-State Power는 결국 누가 정하는 거지?"라는 질문을 던졌다.  Narrowing the Nation's Power: The Supreme Court Sides with the States, John T. Noonan Jr.,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2


IV. 우리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로마.  세계를 호령했던 5대 제국들의 이름이다.  영원할 것 같았던 제국은 모두 무너졌다.  그들은 단지 역사책에만 잠시 등장할 뿐이다.  우리가 생각했을 때, 가늠도 되지 않는 막강할 것 같던 권력도 하루아침에 무너진다.  권력을 가진 인간의 부패는 이제 그 권력을 무너트리는 하나의 무기가 되어버렸다.  우리는 끝없는 변동 속에 있다.  하지만, 앞서 보았듯이 사람들은 계속해서 새로운 인물들을 믿는다.  결국 희망은 사람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또 다른 사람을 믿고, 다시 다른 집단을 믿는다.  앞서 잠시 소개했듯, 법에 대한 믿음도 흔들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계속되는 권력자들의 부패 속에서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깊은 의문이 든다.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어떤 한 인간에게 믿음과 신뢰를 주고 열광하는 것을 통해 모두는 우중화될 수 있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권력과 맞닿아있는 인간에 대한 신뢰와 믿음은 결국 '부패할 대상'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라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V. 어떻게 할 것인가?: 다시 헌법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당도하게 된다.  인간을 믿을 수도 없고, 그 인간을 견제하는 시스템을 믿자니, 그 시스템 역시 인간에 의해서 돌아가는 절체 불명, 진퇴양난의 상황이다.  나도 법을 공부한 사람인지라, 결국에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은 '인간의 부패성과 타락성을 인지하고 정밀하게 쓰인 법에 대한 신뢰'이다.  그 이유는?  인간을 믿는 것보다는 낫기 때문이다.  권력을 있는 대로 나누고, 그 나눠진 권력들을 반드시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도록 시스템을 구성해야 할 것이다.


헌법은 기능적으로 보았을 때 크게 2가지 분야로 나뉠 수 있다.  '체제'의 분야와 '권리'의 분야이다.  법률가들을 포함하여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은 후자에 집중하고 있다.  바로 '인권'으로 대표되는 권리의 분야이다.  낙태를 할 권리, 태아의 생명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할 권리, 나의 성(性)을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는 권리 등등...  이 시대의 가장 뜨거운 이슈들을 품고 있는 것이 바로 이 '권리'의 영역이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체제'의 분야에 집중해야 할 필요가 있다.  어떻게 권력을 나눌 것인지, 나아가 어떻게 그 권력들을 서로 견제하도록 만들 것인지, 그 권력들이 부패하고 서로 결탁하였을 때 어떠한 주체가 그 권력들을 다시 해산시키고 새로운 권력을 창조해낼 것인지와 같은 이야기 말이다.  오히려 권리의 영역보다 더 어렵고 복잡한 이야기들이 논해지는 분야가 바로 이 분야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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