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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용석 Jan 30. 2016

꽃이 되는 삶

타자에서 이웃으로, 존재에서 존재자로

우리가 나가서 회의자의 회의 속으로, 질문자의 질문 속으로, 길 잃은 이들의 외로움 속으로 들어갈 때에만 우리 신앙에 대해 말하고 그 신앙을 권할 수 있다

존 스토트, 『제자도』에서 마이클 램지


처음 마이클 램지가 하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엄청난 공감이 일어났다. 꼭 '신앙'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회의자의 회의 속으로, 질문자의 질문 속으로, 길 잃은 이들의 외로움 속으로 들어갈 때에만 그 사람과 '친구'(이제부터 이웃이라는 단어로 이를 대체하자)가 될 수 있다.


내적 갈등으로 인한 회의에 빠진 이에게 "오늘 네 할 일이나 열심히 하고 그런 생각해라"라고 한다면,


엄청난 고민에 빠져 하루 종일 그 고민을 붙잡고 질문하는 사람에게 "쓸데없는  질문하지 마"라고 한다면,


삶의 무게에 비틀대며 길 잃은 사람에게 "그러니까 어렸을 때 공부 열심히 하랬지?"라고 한다면,


단연컨대 우리는 그(He/She)와 이웃이 될 수 없다. 존재는 존재자가 되지 못한 채 존재로 남게 되고, 타자는 이웃이 되지 못한 채 타자가 된다.


오늘 일을 하다가 "좋은 삶이 어떤  삶인가?"라는 질문을 받았다. 나는 잠시 행동을 멈추고 생각한 뒤 "감사하다는 말을 하는 것 만큼, 감사한다는 말을 많이 듣는 삶"이라고 이야기했다.


우리는 나에게 '이웃'이 되어준 사람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나를 비인격적(수단)으로 대한 사람에게는 아무리 그 사람이 천금을  가져다주어도 진심 어린 '감사'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나를 인간(목적 그 자체)으로 대한 이에게는 마음 깊은 곳에서의 감사가 나온다.

 

이를 아주 잘 표현한 시가 바로 김춘수 씨의 『꽃』이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단지 출석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이 아니다. 이를 레비나스의 말로 하면 존재에서 존재자가 되는 것이며, 다시 말해 타자에서 이웃이 된다는 것이다.


그대 누군가의 꽃이 되어 보았는가?

그대 타자의 이름을 불러주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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