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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용석 Jan 28. 2016

인생, 그리고 삶의 방향성

우리 모두는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

난 잠시 눈을 붙인 줄만 알았는데 벌써 늙어 있었고
넌 항상 어린 아이일 줄만 알았는데 벌써 어른이 다 되었고
난 삶에 대해 아직도 잘 모르기에 너에게 해줄 말이 없지만
네가 좀 더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마음에 내 가슴 속을 뒤져 할 말을 찾지…

공부해라…… 아냐 그건 너무 교과서야
성실해라…… 나도 그러지 못했잖아
사랑해라…… 아냐 그건 너무 어려워
너의 삶을 살아라!

양희은, "엄마가 딸에게" 가사 중에서



인생은 방향성을 갖고 있다. 움직이지 않는 것 같아도, 그 움직이지 않는 시간속에서 우리는 '생각하는 것'을 멈출 수 없다. 생각은 멈춰지는 것이 아니며, 생각은 '무엇'인가를 향하게 된다. 우리의 인생은 '행동'하거나, '생각'하거나 혹은 그 두 가지를 동시에 이행한다. '행동'한다는 것은 움직인다는 것인데, 그 움직임은 당연히 방향성을 갖는다. 다시말해 행동과 생각은 방향성을 갖기 때문에, 따라서 우리 인생은 방향성을 갖는다.


우리는 어디로든, 혹은 무엇인가를 지향하며 그 지향점을 향해 나아간다. 비록 모두가 같은 속도는 아니며 그 지향점도 제각각일지라도 말이다.


가장 쉽고 재미있는 삶은 '자아'를 위한 삶이다. 나의 기쁨, 나의 안위, 나의 명예 그리고 나의 돈을 추구한다. 더 큰 집을 사는 것, 더 좋은 차를 사는 것과 같은 것들을 갈망한다. 자아는 스스로 그 범위를 확장해 나의 가족, 나의 집단에까지 자신의 자리를 넓힌다. 내 가족의 안녕, 내 사람들의 안위와 같은 것이 추구된다. 그러나 자아를 위한 삶에는 영원한 만족이 없다. 자아를 위할때 얻는 만족은 극히 일시적이다. 잠깐의 만족 뒤에는 깊고 깊은 허무함이 찾아온다. 그 어떤 부자도 돈에 만족하지 못한다.


장 자크 루소가 그의 저서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말하듯 우리는 '비교'를 통해 빠져나올 수 없는 저주에 빠진다. 더 나은 사람은 어디에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력해, 무엇이든 할 수 있어"라는 신자유주의의 외침에는 '만족'이 없다. 그래서 기쁨도 없다. 사회는 한병철씨가 《피로사회》 에서 말한 것 처럼 피로사회가 되고, 우울증과 같은 정신적 질병이 팽배한다.


또 다른 삶은 '타자'를 위한 삶이다. 이러한 인생은 나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나와 너 즉, '우리'를 위한 삶이다. 여기서의 타자는 무한정 확장될 수 있다. 친한 친구에서부터 얼굴도 이름도 몰랐던 아프리카의 한 소년까지...


누군가는 이 역시도 자아를 위한 것이 아니냐 반문할 수 있다. 타자를 위하면서 얻는 기쁨은 결국 자아에 귀속되며 그 모든 행동은 타자를 위한것이 아니라 결국 자아를 위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간단한 방법으로 구별할 수 있다. 바로 타자가 '목적'인지, '수단'인지를 보면 된다.


진정 타자를 위한다면 타자는 '목적 그 자체'가 된다. 그러나 나를 위한 것이었다면 타자는 내게 '수단'이 되고, 이 '타자의 수단화'는 타자의 '비인간화'로 귀결된다.


인생은 방향성을 가진다. 삶은 언제나(심지어 잠을 자는 순간일지라도)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 우리의 삶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오늘도 질문을 던져본다.


나의 삶은 '나'만을 향하고 있는가, 아니면 '타자'를 향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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