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용석 Jun 28. 2017

무죄추정의 원칙: 뉴스의 주인공에겐 아직 죄가 없다

무죄 추정의 원칙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가?

배심제가 일반화되어있는 미국에서의 재판 중 빠질 수 없는 절차는 바로 '배심원 선택(Jury Selection Process: Voir Dire)'이다.


법률용어로는 "Voir Dire"인 이 절차는, 변호사와 검사에게 너무나도 중요한 절차다


여기 형사 사건이 있다. 많은 배심원단 앞에서 검사 혹은 변호사가 묻는다. "선생님, 지금 딱 이 순간 평결(법적 결정)을 내리셔야 한다면, 어떤 결정을 내리시겠어요?" 


배심원들은 대답한다. "음... 전 피고 측이 유죄인 거 같아요", "전 원고 측이 잘못한 거 같은데요?", "피고가 나쁜 놈이네요" 


방금 이 이야기를 한 배심원들은 즉시 배심원단에서 배제된다. 다시 말해, 걸러진다. 왜 그럴까?


사실 앞의 질문은 배심원을 가려내기 위한 굉장히 영리한 질문이다. 똑똑한 변호사들이 사용하는 이 질문의 정답은 "무죄"이다. 아직 배심원들은 사실관계만 알 뿐 증거를 보지도 못했기 때문에, 무죄추정 원칙에 따라 당연히 피고를 무죄로 보고 있어야 한다. 전 세계 형사법체계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인 '무죄추정의 원칙("Presumption of Innocence" Doctrine)'이 세워지지 않은 사람을 어떻게 배심원에 세울 수 있겠는가?


"Sir, right now, what is your verdict be?"


배심원이 누구냐에 따라 판결이 바뀔 수 있기 때문에 배심원을 선택하는 것은 중요하다.

우리나라에서 살면서 가장 크게 느끼는 것들 중 하나는 '무죄추정의 원칙'에 대해 대다수의 사람들이 모르거나, 중요하지 않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어차피 나쁜 놈인데', '뭔가 있으니까 기소됐겠지'와 같은 생각이 다수의 생각을 차지한다.


"무죄라는 건 죄가 없다는 뜻이 아냐. 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증명하지 못했다는 뜻이지."라는 유명 드라마의 형사의 이야기가 너무나 멋있어서였을까? 무죄라는 건 죄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판결이 나기 전까지 피고는 죄가 없다.


영국의 법률가 William Blackstone은 이런 명언을 남겼다. "열 명의 범죄자가 도망치는 것이 한 명의 무고한 사람이 억울한 고초를 겪는 것보다 낫다." 이는 현대 형사소송법의 기조이며, 우리 형사소송법도 예외가 아니다. (열 명의 범죄자를 잡지 못해도 한 명의 억울한 피해자는 만들지 말라).


"It is better that ten guilty persons escape
than that one innocent suffer"

William Blackstone


이 말을 들었을 때 동의하시는가? 글쎄, 우리나라에선 많은 이들이 동의하지 않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명의 무고한 희생자를 내서라도 10명의 흉악범을 잡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이것은 누구의 잘못이 아니다. 문화적인 부분일 것이며, 서구적 인권 개념과 동양적(혹은 한국적) 인권 개념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에선, 수많은 사극을 통해 우리 국민들이 "네 죄를 네가 알렸다!"는 심문으로 시작하는 조선시대의 재판에 익숙하기 때문은 아닐까.


"네 죄를 네가 알렸다!" / 아니... 죄를 입증하는 것은 사또의 책임인데, 왜 입증책임을 피고인에게...? / 조선시대에는 무죄추정의 원칙이 존재하지 않았다 

확실한 사실은, 열 명의 범죄자를 잡기 위해 한 명의 억울한 피해자를 만든다고 하는 순간부터 그곳엔 열 명의 억울한 피해자만 생길 뿐이라는 것이다. 무죄추정의 원칙이 사라진다면 수사기관이 힘들게 사실관계를 증명할 필요가 없어진다. 조선시대로의 회귀다. 죄 없는 누군가를 잡아다가 범죄자로 만드는 것은 진범을 잡아내는 것보다 훨씬 쉽다. 조선시대까지 갈 필요도 없이, 대한민국의 군부독재 시절 판결을 생각해보면 쉽다.


모두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고개를 끄덕이지만 다시 뉴스에서 누군가의 기소 소식이 들리면 즉시 혀를 차게 된다. 그건 나도 피해갈 수 없이, 마찬가지다. 그러나, 무죄추정의 원칙에는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소중한 가치들이 존재하고, 그렇기 때문에 이 원칙은 너무나도 중요하게 여겨진다.


"It is more important that innocence be protected than it is that guilt be punished, for guilt and crimes are so frequent in this world that they cannot all be punished. But if innocence itself is brought to the bar and condemned, perhaps to die, then the citizen will say, 'whether I do good or whether I do evil is immaterial, for innocence itself is no protection, ' and if such an idea as that were to take hold in the mind of the citizen that would be the end of security whatsoever."

John Adams


"죄를 범한 자에게 형벌을 가하는 것보다 무고한 사람을 보호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이 세상에는 죄악이나 범행이 너무나도 많아서, 그 모두를 처벌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만일 무고한 사람을 법정에 세워 유죄 선고를 하고 그를 사형에 처하기라도 한다면, 시민들은 말할 것입니다. '내가 죄를 범하든 말든 상관없어! 죄를 범하지 않는다고 해서 보호받는 것도 아니니까.' 그리고 그런 생각이 시민의 의식 속에 자리를 잡는다면 그 어떠한 안전도 다 끝일 것입니다."


이 존 애덤스의 이야기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무죄추정의 원칙은 너무나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 무죄추정의 원칙을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우리가 편리하고 또 '생각하고 싶은'(르네 지라르의 '희생양 이론에 따랐을 때)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한다.


이미 우리의 '법'은 무죄추정의 원칙을 명백하게 외치고 있다. 

헌법 제27조 제4항
형사피고인은 유죄의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
형사소송법 제275조 中
 피고인은 유죄의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

뉴스에 오늘 나온 그 사람은, 그리고 기자들에 둘러싸여 카메라 플래시 셔터를 무더기로 받고 있는 그 사람은, 아직 '죄'가 없다. 그들은 모두 무죄로 추정된다.

매거진의 이전글 법과 디자인의 만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