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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용석 Jul 07. 2018

리더 포비아

우리는 왜 리더를 잃었는가? 그리고 누가 리더가 될 것인가?

I. 서

1. 서론

나는 1989년생이다.  올해 나이는 서른.  초등학교 시절 반장을 여러 차례 했다.  아직도 기억이 나는 순간 중 하나는, 초등학교 2학년 때다.  초등학교 1학년은 보통 '반장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초등학교 2학년은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어떤 단체의 장(長)을 뽑는 순간이었다.  반장선거를 하겠다는 선생님의 공고가 있은 후, 집에 쪼르르 달려와 엄마 아빠에게 이 사실을 알린 나는 그날부터 반장선거 준비에 돌입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부모님은 (이번 일화에서는 어머니의 비중이 크지만) 참 재미있고 대단하신 분들인 거 같다.  그 어린 내게 '선거전략'을 짜 주셨다.  그리고 그 선거전략을 잘 실현할 수 있도록 집에서 여러 차례 연습까지 강행했다.  선거전략은 다음과 같았다.


1) 먼저, 당당한 발걸음으로 교탁 앞에 나간다.

2) 가슴을 내밀고 당당한 자세로 앞에 서서 크고 또박또박하게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문용석입니다"라고 외친다.

3) 미리 만들어간 내 이름이 크게 쓰여있는 판넬을 가슴팍에 들고, 외친다.  "제 이름을 기억해주세요, 저는 문. 용. 석. 입니다."

4)  "선생님을 도와 여러분과 함께 멋진 반을 만들어가고 싶습니다."라는 말을 덧붙인 후

5) 다시 판넬을 들고, "저는 문. 용. 석. 입니다. 저를 뽑아주세요"를 외친 후 인사를 하고 들어간다.


참 놀라운 선거전략이지 않은가?  판넬을 통한 시각적 효과와 함께, 또래보다 목소리가 컸던 나의 또박또박한 발음을 통해 청각적으로 '이 사람을 리더로 뽑아야겠다'라는 생각을 들게끔 만드는 전략이었다고 평가한다.


당시 4명 정도 후보가 나왔었는데, 나는 38:1:1:0이라는 놀라운 표로 당선되었다.  심지어 스스로를 뽑지 않은 후보까지 있었으니, 당시 내 연설이 끝난 후 반 분위기가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참 놀라운 선거 결과였다.  당시 우리 사회의 분위기는 그랬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모두가 선거에 나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리더를 동경했고 '리더'를 하고 싶어 했다.  집에서는 자녀가 리더가 되었다는 사실에 기뻐하셨다.  우리 부모님도 마찬가지였다.  확실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우리 집도 그날은 맛있는 외식을 하지 않았었을까?


2. 문제제기

요즘 우리 사회에서는 저런 모습을 볼 수 없어졌다고 한다.  어느샌가 사람들이 '리더'하기를 꺼려하게 되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 내 주위에서도 "후보자 없음" 혹은 "후보자 공석"이라는 문구를 자주 보게 되는 것 같다.  어찌 된 일일까?


II. 리더 포비아

1. 개요

'포비아(phobia)'라는 단어는 본래 '공포증'이라는 의미를 가진 의학 단어다. 하지만, 이제 사회적으로 어떠한 단어 뒤에 '포비아'라는 어미를 붙여 부르는 경우가 많아졌다. 예를 들어 "호모포비아"의 경우 동성애를 기피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단어로 쓰이고 있다. 이와 비슷하게, "리더 포비아"라는 단어는 '리더'가 되기를 기피하는 사회 현상을 의미한다. 쉽게 이야기하면 '지도자 기피 현상'이다.


2. 현재의 대한민국 상황

대한민국 사회에 '지도자 기피 현상'이 짙어지고 있다.  소위 '리더 포비아(Leader Phobia)'라는 단어로 불리는 이 현상은 유독 우리나라에서 심하게 일어나고 있는 듯하다.


예전 같았으면 열기로 가득 찼어야 하는 대학교 총학생회장 선거에는 한산한 바람만이 불고 있다. 소위 취업을 하는데 필요한 '스펙'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학생들의 총학생회장 선거 출마 기피가 명문대를 비롯한 많은 대학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아파트에 많이 사는 우리나라와 같은 아파트 문화에서 입주자 대표 혹은 동대표는 필수적이다. 하지만, 요즈음 대한민국 아파트들에서는 대표가 나오지 않아 많은 불편함이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해 한 기자는 "입주민들은 젊고 의욕 있는 입주민이 대표직을 맡아주기를 바라지만 대부분의 입주자들은 바쁜 본업 외에 권한보다 희생을 요하는 대표직을 맡을 의향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분석했다.  해당 기사 

이뿐만이 아니다. 각 회사의 노동위원장 자리 역시 기피현상이 자리 잡고 있다. 노동위원장 직을 맡아봐야 사람들의 격려가 유일한 보상인 까닭에 사람들이 출마하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눈에 보이는 '돈'이나 확실한 '명예', 혹은 확실한 성공의 발판으로서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이상 사람들은 더 이상 리더의 자리에 오르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3. 소고

리더 포비아의 근원에는 '리더'에 대한 인식 변화가 자리 잡고 있지 않을까? 예전에는 강한 지도자를 바랐던 사람들이 이제는 섬기는 리더 혹은 나를 케어해주는 리더를 원하게 되었다는 것을 느낀다. 또한, 조직의 투명성이 공공연화되면서 리더는 모두에게 감시당하는 마치 판옵티콘 안에 갇힌 것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된다. 대한민국에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짙어진 뒤 찾아온, 한병철 씨가 말했던 투명사회의 도래다.

한병철, 투명사회, 문학과지성사

III. 제언 및 결론

쉽게 말해서 리더 포비아의 근원적 원인은 보상과 책임(리스크)의 균형이 변화했다는 것이다. 보상은 작아지고, 책임은 커졌다면 사람들이 이를 기피하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렇다면, 문제의 해결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될 것이다. 하나는 보상을 높이거나 리스크를 줄임으로써 균형을 다시 변화시키는 방법, 또 하나는 변화에 맞추어 동일한 균형에서 새로운 동기를 찾는 것이다.


첫 번째 방법은 사실상 현실성이 부족하다. 지금 소위 말하는 인기 있는 리더직(감투직)은 모두 보상이 리스크에 비해 엄청나게 크거나, 적당한 보상이 존재하지만 리스크가 굉장히 적은 자리일 것이다. 하지만, 보상은 줄어들고 리스크는 점점 커지고 있는 현 사회의 변화를 바라보았을 때 이러한 흐름은 쉽게 바뀔 것 같지 않다.


두 번째 방법이 더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리더의 자리가 부재인 곳은 사실상 그 보상이 상대적으로 작은 곳이기 때문이다. 기존 리더의 동기가 리스크에 비해 큰 보상이라고 했을 때, 그렇다면 이제는 리더가 될 수 있는 새로운 동기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 동기는 결국 '헌신'과 '섬김'이 될 것이다. 신자유주의 아래에서 합리성의 영역은 더 이상 사람들을 낮은 자리의 리더직으로 이끄는 동력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사회에는 헌신적인 사람들에 대한 요구가 생기게 될 것이다. 투명하고 도덕적이며 때 묻지 않은 사람들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그래야 청렴을 보장할 수 있을 것이다 (불법적, 혹은 비양심적인 보상을 찾지 않아야 하기에).  하지만 그러한 사람들이 많은가? 나는 크리스찬의 역할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믿는다.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준 '섬김'의 자세가 바로 이 시대가 바라고 기다리고 있는 리더의 모습이 아닌가? 보상과 리스크를 따져서 손익계산을 하여 누군가를 섬길 수 있는가? 섬긴다는 것은 손익계산을 염두하지 않는 행위다. 바로 그 누구도 나아가지 않는 자리에 그리스도인들은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래야만 한다. 누구보다 투명하고, 누구보다 깨끗해야 할 이유가 여기 있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쉬운 일일까? 리더는 섬기기만 해서는 안 된다. 전문성과 섬김의 마음(혹은 성실성)을 동시에 갖추어야 한다. 그래서 이 자리는 쉽지 않은 것이다. 이것이 우리 사회에 비둘기처럼 순결하되, 뱀처럼 지혜로운 그리스도인들이 필요한 까닭이며, 나아가 크리스찬에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했던 예수의 가르침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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