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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용석 May 27. 2016

의심의 계보학: 자유

인간은 자유롭도록 저주받았나?

아르놀트 겔렌(Arnold Gehlen)은‘전경' (Foreground: 선택이 가능한 삶의 영역)'배경'(Background: 선택이 이미 정해져 있는 영역)’의 개념을 창안했다. 전경밖에 없는 사회는 매일 무슨 일이든 맨 처음 단계부터 하나하나 새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배경밖에 없는 사회는 로봇의 사회와 다름없다. 배경적 행동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고, 숙고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반면 전경적 행동은 숙고를 필요로 한다. 이렇게 할지, 저렇게 할지에 대해 묻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선택 영역의 확장은 그만큼 인간이 숙고해야 하는 영역이 늘어났음을 의미한다.


『의심의 계보학』, 피터 버거, 제 1장 '근대성의 여러 신들' 중에서.


겔렌의 개념은 상당히 흥미롭다. 선택이 가능한 삶의 영역, 즉 자유의 공간이 존재하는 영역인 '전경'과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에 자유의 공간이 존재하지 않아 개인의 선택이 불가능한 삶의 영역인 '배경'의 개념은 '자유의 공간'의 존재와 부재를 통해 우리 삶을 형이상학적으로 잘 설명할 수 있는 도구가 된다.


인간의 삶에서 자유가 가지는 영향력과 그 지위는 어떻게 될까? 우리는 어려서부터 자유는 좋은 가치라고 배워왔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자유'에 대해 어떠한 가치판단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 묻는다면 100중 99명은 "좋다"라고 말할 것이다. 자유가 좋지 않다고 말하는 그 한 명은 바로 프랑스의 철학자 '장 폴 샤르트르'다.


“인간은 자유롭도록 저주받았다”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사르트르의 논의는 참으로 괴상하게 들린다. '자유'와 '저주'는 양립할 수 없는 단어와 같이 느껴지는데, 그는 자유롭기 때문에 저주받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벌써 그의 짧은 문장에서 흥미로움이 숨어있지 아니한가. 샤르트르에게 인간이 가진 자유는 왜 저주가 되었을까?


사르트르의 질문을 생각해 보기 앞서서 다시 이전 논의로 돌아가 보자. 겔렌에 따르면, 사회에서 당연시되는 행동 프로그램은 ‘제도(Institution)’라 불린다. 강한 제도는 본능처럼 작용한다. 개인은 제도적 프로그램을 기계적으로 따르며, 잠시 멈추고 자신의 행동을 숙고해보려 하지 않는다. 전경만 존재하는 사회가 혼란으로 향하듯, 제도(배경)의 부재는 사회를 유지시킬 수 없다. 전경에서 배경으로의 이동을 ‘제도화(Institutionalization)’라고 부를 수 있으며, 배경에서 전경으로의 이동은 ‘탈제도화(Deinstitutionalization)’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근대성은 배경을 크게 축소시키며 전경을 크게 확대한다.


 “근대성은 탈제도화를 촉진한다” = ‘주어화(Subjectivization)’


과거 개인은 깊은 생각 없이 살아갈 수 있었다. 제도적 프로그램을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최대한의 배경과 최소한의 전경이 있었기에 이는 현실화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자신을 ‘주어(Subjective)’의 자리에 위치시킨 채 생각을 해야 할 필요가 많아졌다. ‘나는 무엇을 믿는가?’ 혹은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와 같은 질문들이 바로 그것들이다. 이를 조금 더 어려운 말로 표현해보자면 '사색'일 것인데, 근대화 이후 인간은 '사색'을 강요받게 되었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다시 아테네로의 회귀인 것처럼, 우리는 사색을 강요받게 되었다. 사색하지 않으면, 그저 주어진 '배경'에 만족해야만 한다. 또한 '전경'에 대한 생각 없이 살아가야만 한다. 그런 삶은 쉽지 않고, 인간의 비인간화를 촉진하기 때문에 현대인에게 우울증과 같은 신경질환이 많이 생기게 된 것은 아닐까?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다원성이다. 조금 더 깊게 이야기하자면 다원성은 '포스트 모더니즘'의 가장 근본이 되는 요소이다.


참된 다원성의 존재 조건은 ‘인지 오염(CognitiveContamination)’이다. 오랜 시간을 두고 사람들이 뒤섞이다 보면, 서로의 생각에 영향을 주게 되어 타인의 신념과 가치를 배제적으로 규정짓기가 어려워진다. 타인도 존중할만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생기는 것이다.


『의심의 계보학』, 피터 버거, 제 1장 '근대성의 여러 신들' 중에서.


인지 오염은 포스트 모더니즘을 촉진시킨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가치판단의 유보이며, 가치판단을 유보하기 때문에 모든 객체에 대한 가치판단은 무의미해진다.


근대성은 배경의 축소와 전경의 확대를 불러오며, 개인을 주어의 자리로 놓는 '주어화'를 촉진했다. 그러나 그 '주어'들은 서로를 가치판단할 수 없는 다원성과 포스트 모더니즘을 통해 그저 서로의 전경을 가치판단이 유보된 채 인정하게 된다.


근대화는 다원성을 창출한다. 그리고 다원성은 개인이 여러 세계관 안에서, 그리고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는 여지(전경)를 넓혀준다. 다원화는 반드시 종교의 본질을 바꾸지는 않지만, 종교에 대한 접근 방식을 바꾼다. “나는 기독교인이야 하지만…”


다원화 이후 우리는 종교(주어진 것 혹은 선택한 것)에서도 전경(선택이 가능한 영역)의 확대를 만나게 되었다. “나는 기독교인이야 하지만, 그렇게 신앙에 열심이진 않아”에서 신앙에 열심이지 않다는 것은 종교 내부에서 전경의 영역이 확대되었음을 나타낸다.


가정은 그 모습을 유지할 수 없어진다. "나는 이 아이의 엄마, 아빠야 하지만 그렇게 지금까지 사회에서 강요했던 것(배경)과 같이 책임을 지진 않아"


성 정체성이 흔들리며, 가치관들이 하나씩 흔들리게 된다. 가치관의 흔들림은 존재의 흔들림으로 다가오며, 처음엔 나뭇잎이 살랑거릴 정도의 바람이 나중엔 거대한 폭풍이 되어 자아를 뒤집어 삼키게 된다.


'자유'는 사르트르의 말처럼 오히려 '저주'가 된다.


'전경'과 '배경'의 조화는 반드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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