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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용석 Mar 29. 2019

'소비사회'에서 '표현사회'로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살자는 이야기에 대한 반론

I. 서론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어떻게 사회를 분류할 것인지에 대한 물음은 모든 사회학자들에게 언제나 풀고 싶은 숙제였다.  그래서 수많은 사회학자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이름들을 붙여 사회를 구분해왔다.  그리고 그 과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어떤 사회에 살고 있는지에 대한 분류는 언제나 사회학의 가장 큰 주제가 된다.


    이 사회를 지칭하는 수많은 이름이 존재한다.  사회학자마다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관점에 따라 사회를 나눴기 때문이다.  내게 가장 와닿았던 말은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장 보드리야르가 그의 저서 『소비의 사회』에서 말했던 단어 '소비'였다.


우리는 "소비사회"에 살고 있다


    장 보드리야르의 통찰과 같이 실제로 우리는 소비사회에 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어떠한 구조적 이유에서 이 물건을 구입하게 되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계속된 소비를 거듭하고 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서 영문도 모른 채 계속해서 소비를 하면서 살아가게 되었다.  소비는 생존과 필수 불가결한 행위가 된 것이다.  


  어렸을 적 할머니, 할아버지께 받은 동전 500원을 들고 구멍가게에 들어가 과자를 사 먹던 것에서부터 시작해 문방구에 들어가 학교 수업을 위한 준비물을 사는 것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채 10살도 안 되는 어린 나이부터 '소비'와 친해지게 된다.  현대 사회에 사는 사람이라면 단 한 명도 빠짐없이 해보았을 바로 그것이 바로 '소비'다.


    보드리야르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 사회에서 '소비'는 단순히 생존을 위한 것에서 더 나아가  자신의 '기호'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 되었다.  이를 내 언어로 풀어서 말해보자면, 과거 생존을 위한 소비가 이제 '자아를 실현하는 수단으로써의 소비'로 변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역설적이게도 소비를 통해 우리는 자기 자신을 만들어간다.  우리의 소비를 잘 생각해보시라.  정말 그렇지 아니한가?


II. 소비사회를 살찌우게 하는 '말'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반드시 소비를 하면서 살아간다.  그래서, 이 사회는 필연적으로 사람들의 소비를 장려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매체를 통해 던져지는 메시지를 잘 분석해보면, 그 이면에는 '소비 장려'라는 무시무시한 이념이 숨겨져 있음을 볼 수 있다.  그것을 찾아내는 것은 참으로 즐겁고 흥미로운 일이다.  그 와중에 소비사회에서 가장 알맞은 캐치프레이즈가 바로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살자"는 말이다.  이 캐치프레이즈는 '현재'에 모든 것을 집중한다.  "카르페 디엠"도 마찬가지다.  이 좋은 말들은 신자유주의와 합쳐져 우리들에게 달달한 목소리로 미래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모으고 준비하기보다 현재 스스로를 행복하게 만들기 위한 소비를 할 것을 속삭이고 있다.  아니 외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매일 보는, 듣는 광고가 그 가장 좋은 예이다.


"행복하신가요? 그렇지 않다면 우리 이 제품을 가지시면 행복해지실 겁니다"라는 메시지는 모든 광고의 기저에 자리하고 있다


    2010년 분석 기준으로 우리는 일상에서 하루에 약 3000개 정도의 광고에 노출된다고 한다.  SNS 광고가 더 활발해진 2019년에서 우리가 광고의 노출되는 빈도는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졌을 것이다.  그 모든 광고들이 하는 말을 한마디로 축약해보면 어떤 말일까?  간단하다.  "이게 있으면 너의 삶이 훨씬 행복해질걸?"


III. 소비사회의 '그늘'

    소비사회의 가장 무서운 부분들 중 하나는 사람을 속인다는 점이다.  분명 1분 전까지만 해도 나는 행복한 사람이었는데, 광고에 나오는 저 냉장고를 보자마자 나는 불행한 사람이 되고 만다.  아직 저 냉장고를 소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장은 끊임없이 "당신이 입는 것이 바로 당신을 표현한다"라던가 "그대가 타는 차가 그대의 품격" 등의 이야기를 쏟아낸다.  원래 나는 나 자체로 나였는데, 광고를 듣자마자 나는 이제 무엇인가를 소비해서 나를 만들어야만 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소비가 나의 정체성을 만든다는 달콤한 거짓말은 소비가 주는 짜릿한 쾌감과 더불어 우리의 삶을 완전히 지배하게 된다.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의 욕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본을 위해서 일한다. 자본에서 생성되는 자본의 고유한 욕구를 우리는 우리 자신의 욕구라고 착각한다. 자본은 새로운 초월성, 새로운 예속의 형식이다. 우리는 삶이 어떤 외적 목적에 종속되지 않고 오직 삶 자체로 머물러 있는 차원, 즉 삶의 내재성에서 다시 추방당한다.  

한병철, '심리정치 -신자유주의의 통치술-', 17-18쪽


    소비사회의 그늘은 신자유주의와 합쳐져 더욱 차갑고 어두운 그늘을 만들어낸다.  현대사회에서 소비에는 반드시 재화가 필요하다.  재화와 함께 신자유주의가 말하는 '사실 인간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고, 그 가능성은 노력에 의해서 얼마든지 생겨난다'는 이야기가 합쳐져 모두에게 드리운 그늘이 만들어진다.  쉽게 말하자면, 신자유주의와 소비사회라는 세기의 만남은 우리로 하여금 소비는 자신의 노력에 달린 것이며 내가 저것을 소비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덜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한다.  여기서 이어지는 것은 바로 그 유명한 '피로사회'다.


    철학자 한병철 씨의 말처럼 신자유주의는 시민을 소비자로 만든다. '소비'를 통해서 삶을 이어가는 '소비사회'와 그 소비를 자신의 노력으로 할 수 있다는 전제를 주는 '신자유주의'가 만난 것이 바로 오늘날의 현실이다.  소비자가 된 시민들은 자본을 신으로 삼는 유혹에 빠지기 쉬워진다.  돈을 위해서라면, 혹은 효율성과 합리성을 위해서라면, 윤리와 도덕의식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자신의 자본은 증식시켜주는 직원들은 '사람'이 아니라 '물건'이 되어버린다.  고상함을 버리고 이야기하자면, 철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이야기처럼 소비사회에서 결국 인간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쓰레기가 되어버린다.


신자유주의는 시민을 소비자로 만든다. 시민의 자유는 소비자의 수동성으로 대체된다. 오늘날 소비자가 된 유권자는 정치에 대한 진정한 관심이 없다. 그는 구시렁구시렁 불평하면서 정치에 수동적으로 반응할 따름이다.

한병철, '심리정치', 22쪽


IV. 소비사회에서 표현사회로

    이제 우리는 소비사회에서 한 단계 진화한 사회에 살고 있다.  오늘날의 시장경제는 예전 소비사회에서의 그것과 많이 달라졌다.  이제 사람들은 그 상품의 재질이나 특성 혹은 용도에 따라 소비를 선택하지 않는다.  SNS의 확산과 함께 이제는  '누가 쓰고 있는가?'가 소비를 결정하는 주요한 이유가 되었다.


    사람들은 내가 가진 소중한 것을 '표현'할 때 쉽게 행복을 느낀다.  그것은 인간 역사의 시작에서부터 존재했음에 대해서는 이미 장 자크 루소가 그의 저서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다룬 바 있다.  오늘날의 모습을 살펴보자.  SNS에 올린 나의 새 구두 사진에 몇 개의 긍정적인 피드백이 달렸는지가 나의 행복을 결정하지, 그 구두가 어떤 가죽을 썼는지, 어떤 장인이 만들었는지, 혹은 심지어 얼마나 편한지는 그다지 중요치 않다.  상품의 소비 기준의 대변혁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변혁은 기업의 광고비가 들어가는 곳을 볼 때 더욱 직접적으로 느껴진다.  변하는 시대의 흐름에 언제나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그들은 더 이상 광고에 그 제품이 얼마나 좋은지 설명하지 않는다.  OOO 화장품, OOO 안경과 같이 그 물건을 누가 쓰는지를 말한다.  유명한 연예인에게 천문학적인 금액을 주고 자기 회사의 제품을 홍보할 것을 부탁한다.  유명 인플루언서들에게 상품을 무료로 보내주고, 광고비를 송금한다.  그래서 그들의 돈은 SNS로 흘러들어 간다.  바로 '인간의 브랜드화'가 도래한 것이다.


    표현의 욕망은 행복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바로 전 세계 사람들이 SNS에 자신의 일상을 투자하는 이유일 것이다.  마크 주커버그가 하루아침에 세상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부자가 되고, 인스타그램과 유튜브가 세계 광고시장을 주도하게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자본에서 생성되는 자본의 고유한 욕구를 위해서 소비를 진행하는 것을 넘어서, 자기표현을 위한 소비를 진행한다.  그리고 누군가의 자기표현을 끊임없이 찾아보고, 그것을 보며 소비한다.  표현할 수 없는 소비는 더 이상 선호되지 않는다.  자신의 SNS에 올릴 수 없는 소비를 하는 것, 혹은 다른 이들에게 보여줄 수 없는 소비는 현명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금송아지를 사서 자신의 창고에 꼭꼭 숨겨두는 세상이 지나간 것이다.  이제는 금송아지를 사자마자 가장 먼저 사진을 찍어서 SNS에 올린다.  그러면 그 게시글을 본 누군가의 손에도 곧 금송아지가 들리게 된다.  존 스튜어트 밀의 분석은 현실에서도 아직 유효하다.


V. 결론

    지금까지 전개한 이야기는 사실 뜬 구름 잡는 이야기라고 생각될 수 있다.  어제오늘 일이 아닌 이것은 범세계적인 흐름이며, '소비사회'라는 거대한 흐름에 우리는 당연히 그리고 필연적으로 휩쓸릴 수밖에 없다며 이게 뭐가 문제냐고 되물을 수도 있겠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이 소비사회가 주는 '소비'라는 행위를 통한 쾌감은 엄청나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한 것이기에 장 보드리야르의 소비사회에 대한 분석보다 훨씬 미약하겠지만, '표현 사회'에 들어선 우리 역시 표현을 통한 쾌감에서 행복을 느끼고, 나아가 그 표현에 보답으로서 돌아오는 긍정적 반응 (positive-response)을 통해 엄청난 행복감을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한 번 발걸음을 멈추고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추구는 사실 누군가에 의해서 '그렇게 생각하게끔' 정밀하게 설계된 것일지도 모른다.  이 사실을 알고 삶을 영위하는지 아닌지는 생각보다 중요한 차이를 만들어낼 것이다.  소비가 나의 정체성을 결정하는가?  소비가 나의 행복을 결정하는가?  소비가 없이 나라는 존재는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가?  수없이 많은 고민들 속에 오늘도 큰 고민 없이 소비하고, 그 소비를 표현하는 것이 하나의 큰 역설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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