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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용석 Jul 15. 2016

다름과 틀림

최근 플로리다 주 총기난사 사건을 회고하며

나와 '다른 것'이 '틀린 것'이 되는 아주 불편한 순간들이 있다. 특히 내가 믿고 있는 것이나 나의 사고의 근간이 되는 기본적 전제들과 다른 이야기를 듣게 될 때 우리는 배타성을 가지고 반응한다.


내가 알고 있던 사실과 조금 다른 사실에 대해 다른 사람이 이야기를 할 때, 우리의 고개는 약간 기울어진다. '어라...?'. 혹은 그 사람의 말하는 도중 딴지를 걸게 된다. "아 그런데...". 이것에서 더 나아가 약간의 적극성을 가미해보면, 내 생각과 다른 생각을 가진 그 사람을 멀리하거나, 미워한다. 조금 더 적극성을 가미하면, 나와 유사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타자의 다른 점을 공유하게 된다. 나아가 타자 자체를 부정하게 돼버린다. 이것이 극단화되면, 미국 역사상 최악의 총기난사 사건으로 이야기되는 최근 2016년 6월 16일에 있었던 플로리다 주 총기난사 사건과 같이 타자를 파괴하게 된다. 나의 신념과 믿음을 지키기 위해 범죄를 불사하게 되는 것이다.


"지난 세기는 면역학적 시대였다"

한병철, 『피로사회』, 2012, 문학과지성사, 12쪽.


한병철 교수는 저서 『피로사회』에서 지난 세기를 '면역학적 시대'라고 정의했다. 면역학적 행동의 본질은 공격과 방어인데, 이는 본질적으로 맹목성을 가진다. 낯선 것은 무조건 막아야 하는 것이다. 면역적 방어의 대상은 타자성 그 자체이며, 타자는 '이질성(다름)' 하나만으로 제거의 대상(틀림)이 된다.


자아는 타자의 부정성을 부정함으로써 타자 속에서 자기 자신을 확인한다. 어렵게 들릴 수 있겠지만, 내가 바라보는 타자 즉 낯선 것은 내게 부정성으로 다가오고 그 부정성을 부정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확인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질적 타자를 부정하는 것을 통해 역설적으로 자아를 형성, 확립하는 것이다.


면역의 근본적인 특징은 부정성의 변증법인데, 이는 나와 다른(이질성을 가진) 타자가 내게 침투하여 나의 자아를 부정하려고 하는 위험성을 느낀 자아가 이 위험의 가시화를 피하기 위해 자아의 입장에서 타자를 부정해버리는 것이다.


로베르토 에스포지토는 저서 『면역성, 삶의 보호와 부정』에서 우리 사회를 어떤 위험에 대한 방어적 반응이라는 공통점으로 환원한다. 다시 말해, 면역학적 분석을 통해 사회를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한병철 교수에 의해 비판받게 되는데, 한병철 교수는 '면역학적 패러다임의 종말'을 외치며 한나 아렌트와 로베르토 에스포지토를 비롯한 '면역학'을 이야기하는 수많은 학자들을 성공적으로 비판했다. 현대사회에서 이제 우리가 진정 걱정해야 할 것은 '긍정성'이라는 것이었다. 


한병철 교수의 의견에 격하게 공감하지만, '긍정성의 과잉'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배타성'과 '면역학적 패러다임'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 사회문제들이 끊임없이 일어난다는 점은 면역학적 패러다임에 대해서 다시 한번 되돌아볼 필요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면역학적 패러다임은 정말 끝난 것일까?'


배타성은 면역학적 패러다임의 가장 근본적인 반응이다. 나와 다른 이질성을 배제하는 것은 어쩌면 아주 본능적인 것일지 모르겠다. 이 면역학적 패러다임을 '정치학'으로 가져간 학자가 바로 칼 슈미트였고, 그는 저서 『정치적인 것의 개념』에서 정치를 동지와 적을 구분 짓는 것으로 명쾌하게 정의하면서 정치학사에 자신의 이름을 새길 수 있었다.

"정치는 '동지'와 '적'을 구분 짓는 것이다"

칼 슈미트,『정치적인 것의 개념』, 1995년, 법문사.


칼 슈미트는 이를 정치적으로 해석했지만, 조금 더 '사회학'적으로 이를 해석했을 때 우리는 사회에서의 삶 또한 동지와 적을 구분 짓는 것. 다시 말해, 배제할 타자와 포용할 타자를 구분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다.


이를 사회학적, 그리고 신학적으로 풀어낸 것이 바로 미로슬라프 볼프다. 그의 저서 『배제와 포용』에서는 내가 배제시킨 사람들을 어떻게 다시 끌어 안아 포용할 수 있을지에 대해 기술한다.


우리의 삶을 면역학적 패러다임으로 '배제할 타자와 포용할 타자를 구분하는 것'이라고 보았을 때 극단적 배제에 의해 생겨나는 폭력과 파괴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볼 수 있겠다. 


배타적 반응(배제)은 작게는 침묵에서부터 크게는 파괴로 나타난다. 내가 틀리다고 규정한 이에게 반대되는 이야기를 하거나, 가르치려고 하는 것이 전형적이며 나아가 그 가르침이 원하는 대로 진행되지 않으면 '배제'가 시작된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라는 명제를 통해 타자를 '잘못된 길을 걷고 있는 사람' 혹은 심지어 '잘못된 사람'으로 정체성 자체를 배제시킨다.


요즘 따라 더욱 우리 주변에서 이런 것을 많이 본다. 요즘엔 SNS를 통해서 이러한 배제가 수도 없이 일어나곤 한다. 일상생활은 물론이고, 심지어 슬프게도 교회 공동체에서도 이러한 배제는 극단적인 모습을 보인다. 특히, 이것이 극단적이고 가시적이며 폭력성과 파괴성을 띄면서 나타난 플로리다 총기난사 사건은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만드는 일이었다. 


총격사건은 성소수자(LGBT)를 혐오하는 동기에서 일어났는데, 이는 '다름'을 '틀림'으로 인식하면서 면역학적으로 배타성을 갖고 생겨난 배제가 극단적으로 표현되어 결국 타자의 존재 자체를 파괴해버린 사건이다.


틀린게 아니라, 단지 다를 뿐이다


질문을 던지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다름은 틀림일까?" 우리는 너무나 정확하게 답에 대해 알고 있지만, 우리는 면역학적 패러다임에 따라 본능적으로 다른 것을 틀림으로 받아들이곤 한다. 다만 그것이 일반적인 적극성과 만나 '무시' 혹은 '험담' 나아가 '미워함' 정도로 끝나는 것일 뿐이지, 사실상 타자에 대한 파괴와 그 본질은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나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좋아하지 않지만, "다른 것은 다른 것 그 자체로 포용한다"를 표방하는 포스트모던적 사고는 면역학적 패러다임 속에서 일어나는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좋은 열쇠가 된다고 생각한다.


프랑스의 존경받는 귀족들만 가졌던 가치 '똘레랑스'는 바로 다름을 틀림으로 보지 않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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