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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용석 Apr 26. 2019

법과 주먹: 사적 복수 이야기

사적 보복과 복수: '이희진 사건'과 '층간 소음'

I. 들어가며

    "정의(正義)"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우리에게 떠오르는 이미지는 무엇인가?  옳은 것,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것 등등.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정의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다만, 각자의 정의에 대한 인식이 다를 뿐이다.  누구에게는 작은 잘못도 처벌하는 것이 정의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자신이 한 작은 잘못 정도는 봐줘야 한다는 것이 정의가 된다.  이를 '정의관'이라고 하는데, 사람들이 크게 싸우는 경우 바로 이 정의관이 충돌하게 된다.  "이것은 무엇인가 잘못됐어!  불공평해!  정의롭지 않아!"라는 마음속 외침과 함께 사람들은 각기 자신의 '정의관'을 두 손에 들고 나온다.  그리고 그 정의관이 다른 누군가의 정의관에 의해서 부정되는 순간, 사람에게서는 분노가 일어난다.


II. 법(法)과 정의(正義) 사이의 괴리

    흥미롭게도, 법을 공부하면서 가장 먼저 배우는 개념은 바로 '정의'라는 개념이다.  법의 목적은 정의의 실현이기 때문이고, 법의 존재 이유 역시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상적으로는 '법'이라는 틀 안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가정할 때 '정의'가 실현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이상적으로는 사인간에 분쟁이 있었을 때 법원에 가서 판결은 받으면 정의가 실현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미국 남부에 위치한 알라바마주 대법원에서 잠시 일하고 있었을 때 함께 근무하던 한 변호사는 이렇게 말했다.  "이 법원에 들어와서 웃고 나가는 사람이 얼마나 될 것 같아?  흔히 생각할 때는 최소한 승소한 사람은 웃을 거 같잖아?  그런데, 법원에 오래 있으면서 보니까 그렇지가 않더라고.  둘 다 열이 받아서 법원을 나서는 게 대부분의 경우야."  이것이 단지 미국만의 일일까?  우리나라 어느 법원에 가도 함박웃음을 지으며 나오는 사람들을 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 미소의 부재는 바로 '법과 정의 사이의 괴리'를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된다.  


III. 법 대신에 택하는 사적 보복

    갈등이 생겼을 때 주먹(위력)을 쓰던 시대에서, 법을 통해 갈등을 해결하는 법치주의의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법'을 통해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경우가 늘어나자 정의를 갈망함과 동시에 법을 불신하는 사람들은 법 대신 '주먹(위력)'을 쓰기 시작했다.  법을 통해서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하기에 사적 보복을 한다거나, 법으로 하기보다 당장 내 눈앞에서 나의 마음의 쾌감을 줄 수 있는 직접적 방법으로 분쟁을 해결한다.  보복이 주는 쾌감은 말로 이룰 수 없이 짜릿하기 때문이다.  힘없고 능력이 없어 항상 당하고만 살던 약자가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자신에게 위해를 가했던 가해자에게 사적 보복을 가하는 것이 수많은 영화에서 이미 사용된 클래식-클리셰임을 생각해 보면 이를 쉽게 알 수 있다.  보복과 복수는 분명히 쾌감이 따른다.

https://horrornews.net/105080/film-review-fight-club-1999/

    지난달 아침 낯익은 이름이 뉴스를 도배했다.  소위 청담동 주식부자로 알려졌던 이희진 씨의 부모 모두가 살해된 채로 발견되었다는 속보였다.   방송에도 출연하며 자신의 인기를 통해 활발한 활동을 보이던 이희진 씨는 자본시장법과 유사수신행위의 규제에 관한 법률 위반,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사기 등 혐의로 징역 5년과 벌금 200억 원, 추징금 약 130억 원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이희진 씨는 소유 재산이 없다는 이유로 벌금 200억 원을 3년간의 노역으로 대체하게 되었다.  이를 일당으로 따지면, 일당 1800만 원의 노역이며 각종 뉴스에서는 이를 '황제 노역'이라고 비꼬았다.  경찰은 용의자는 이희진 씨의 경제범죄에 의해 자신의 투자금을 잃었다고 주장하는 주범과 그 주범이 고용한 중국 국적의 종범들이라고 발표했다.  그들은 집에 있던 현금 5억 원을 들고, 시체를 둔 채 유유히 사라졌다.

    바로 최근 일어난 이 사건이야 말로 앞서 우리가 계속해서 이야기한 법에 의한 정의 구현 대신 '사적 보복'을 선택한 가장 최근의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법원에서 내린 판결에 만족하지 못했고 (실제로 자신이 손해 본 금액을 돌려받지 못했으므로), 따라서 법에 의한 정의 대신 주먹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 사적 보복이 올바른 것인지에 대한 논의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당연히 이 사적 보복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 사회의 대부분은 극소수를 제외하고 법치를 선택할 것이고, 나아가 법치주의 사회에서 이를 올바르다 말하는 것은 그 근거가 너무나 빈약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이러한 결정을 하도록 야기했는지' 조금 더 완화시켜 말하자면 '어떠한 외부적 요인이 그들의 행동(사적 보복)의 동기'가 되었는지를 논의해보는 것은 그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IV. 무엇이 사적 보복을 야기시켰는가

     이번 사건과 관련된 한 판결을 보자.  먼저 판결에 앞서 그 배경이다.  2016년 서울남부지검은 이 씨를 구속한 뒤 서울 강남구 청담동 건물 등 부동산, 고가 외제차, 계좌 예금 등을 압류했다.  그러나 이 씨의 명의로 된 건물은 근저당이 설정되어있어 추징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수많은 외제차 역시 리스 혹은 법인 소유 차량이었다.  


     서울남부지법 형사합의11부는 자본시장법과 유사수신행위의 규제에 관한 법률 위반,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사기 등 혐의로 기소된 이 씨에게 징역 5년과 벌금 200억 원, 추징금 130억 원을 선고했다.  정의가 실현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판결문에 적힌 '글자'와 '현실'은 조금 달랐다.  이 씨는 벌금 200억 원을 낼 능력이 없다 주장하였고, 이는 3년간 노역으로 환형하게 되었다.  이를 일별 계산했을 때 일당 1,800만 원의 노역을 진행하는 것이다.  추징금은 노역으로 환형되지 않는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추후 다른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아직 사건이 적절히 조사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추정해보건대 피의자는 법원의 판결에 불만을 가졌던 것이 아닐까?  자신이 사기당한 금액을 돌려받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졌을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그러한 피해를 준 이 씨에게 가시적인 피해가 발생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징역형을 살고 있지만 말이다.  법원이 선고한 '형벌'이 '정의'를 구현하지 못했다는 실망감에 직접 정의를 구현하고자 하는 마음도 있지 않았을까?  그 이면에는 사법불신이 자리 잡고 있을지도 모른다.  법원의 판단이 정의와 다르다고 생각하게 되는 경우에 그러한 사법불신은 생기게 되고, 나아가 그것이 급진적인 형태로 표현되는 것이 바로 사적 보복이나 사법부 시스템에 대한 분노 표출일 것이다.


     실제로 사람들이 가장 많은 부분 환멸을 느끼는 것이 바로 법원의 형벌이 가진 실효성이 문제가 될 때이다.  이 씨 사건에서 문제가 되었던 소위 '황제노역'은 이미 우리나라에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위 기사에서는 수많은 황제노역의 역사를 낱낱이 기록하고 있다.  일당 5억이라는 가격으로 노역을 행한 대주그룹 회장 허 씨의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금괴 밀수로 400억 원의 시세차익을 얻은 일당은 4조 5000억의 벌금형을 받았는데, 지불능력이 없는 그들은 이를 13억 3000만 원 정도의 일당으로 노역을 하게 된다.


     판사가 나쁜 사람들이라서 이러한 판결을 내리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법이 그렇기 때문이다.  형법 제69조와 제70조에서 벌금 미납에 대한 노역장 유치의 최대 기간을 3년으로 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법무부에서는 개정에 대한 의지 없음을 표명했고 국회의원들은 이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다.  칼로 누군가를 찌른 것과 누군가의 생활금을 모두 가져가서 한 명의 인생을 파탄으로 몬 것, 둘 중에 무엇이 더 나쁜가?  우리는 이에 대해서 쉽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V.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사적 보복: 층간 소음

     극단적인 사적 보복에 대해서 잠시나마 이야기했다.  하지만, 사실 사적 보복에 대해서 일반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사적 보복을 하는 사람을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넘어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사적 보복은 우리 일상과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요새 TV를 켜면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기삿거리 중 하나가 바로 층간 소음 문제다.  이 문제를 법적으로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이 기정사실화 되면서 각종 사적 보복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인터넷에는 '층간 소음'이라는 검색어로 검색만 해 보아도 국가에서 이러한 분쟁을 관리하는 것에 얼마나 큰 허점이 있는지 수많은 글들과 불만들이 나온다.  법이 자신의 역할을 유기한 장소에 들어선 것은 바로 '주먹'이었다.  물론, 주먹의 형태는 실제 주먹이 아니라 우퍼 스피커다.  천장에 우퍼 스피커를 붙여서 나에게 피해를 주는 윗 집에 똑같이 소음으로 피해를 주는 방법으로 사람들은 해당 문제 해결에 나섰다.  결국 층간소음으로 인해서 살인까지 벌어졌다.  


VI. 결론

     나는 이 문제를 조금 다른 관점에서 접근해보고 싶다.  우리 법은 사적 보복을 허용하지 않고 있지만, 이미 공공연히 우리 사회에는 사적 보복이 자리 잡고 있다.  우리는 어느 수준까지 사적 보복을 허용해야 하는 것일까?  


     앞서 말했듯, 아무런 힘이 없는 한 약자가, 끊임없이 당하기만 하다가 힘을 키워 보복을 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이야기는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단골 이야기이다.  소위 '클래식-클리셰'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이를 극도로 제한하고 심지어 제어하고 있다.  왜 그런가?  이를 법적으로 표현하자면 '법적 안정성'으로 표현할 수 있겠다.  피해에 피해로 보복하고 그 보복에 또 보복이 이어지는 끊임없는 보복의 연결고리를 끊어야 사회적 안정이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법'의 목적이자 '법치주의'의 제1 목표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 사적 보복은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더욱더 늘어나는 것처럼 느껴진다.  무언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그 잘못은 바로 '사법 불신'에서부터 온다고 생각한다.  법 체계에 대한 신뢰가 사라지고, 형벌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면서 사람들 마음속에는 작은 의심이 자라나게 된다.  '이 나라의 법은 내 편이 아니다' 혹은 '이 나라의 법은 정의와는 거리가 멀다'와 같은 사법 불신 말이다.  법원에 들고 가야 하는 문제들을 법원에 들고 가기 전 먼저 청와대 국민청원에 가져와 올리는 것은 이러한 사법 불신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사실 사법 불신 문제는 우리나라가 만들어질 때부터 지금까지 있어왔던 문제다.  과거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수많은 역사들과,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외치던 민주주의 항쟁의 시절, 분식회계와 주가조작 등 여러 재벌가의 경제사범들을 '대한민국 경제를 위해' 풀어주는 등...  이미 우리 사회에서 사법이 갖고 있는 신뢰와 명성은 바닥에 떨어진 지 오래다.  답이 쉽게 나오지 않는 문제다.  쉽게 나와서도 아니 될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사법 불신이 사적 보복이나 사적 복수로 이어지게 놔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법부의 모습을 보며 비판하고 풍자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지만, 사적 보복과 사적 복수는 이 사회의 법적 안정성과 시민들의 안전에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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