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든다는 것은 참 묘한 일이다. 우선, 이는 시간의 공평함과 관련이 있다. 세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이들은, 단 1명의 예외도 없이 모두 나이를 먹어간다. 태어나기만 했다면, 그 누구도 나이를 먹는 것을 거스를 수 없다. 단 한순간조차도 말이다. 모든 사람은 다른 외모, 키, 환경, 성격을 갖고 태어나지만, 똑같이 공평하게 하루에 24시간을 갖고, 그 누구도 흘러가는 시간을 피할 수 없다. 그러한 연유에서인지, 인간은 모두 나이가 드는 경험을 하기 때문에, 많은 이들은 '나이가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 늘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해왔다. 아름다움을 미덕으로 삼는 누군가는 이를 "아름다운 추억이 쌓여간다는 것"이라고 일컬었다. 반면, 현실적인 누군가는 나이가 들어가는 것을 죽음으로 향해가는 것이라고 냉소적으로 표현했다. 그만큼 나이가 든다는 것은 각자에게 다른 의미로 다가오곤 한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단지 죽음으로 향한다는 의미일까?
2. 누구나 나이가 들었음을 깨닫는 순간이 있다
"난 핸들이 고장 난 8톤 트럭, 내 인생은 언제나 삐딱선...서둘러 내 방에 달력을 넘긴다, 억지로 26번째 미역국을 삼킨다, Oh No! 벌써 넓어지는 이마, 왜 이리 크냐 어린 꼬마들의 키가..." 고등학교 때 즐겨 들었던 노래인 다이나믹 듀오의 '고백'이라는 곡의 가사다. 스물여섯 살이 된 청년 두 명이 자신들이 이 정도 나이가 되어보니, 많은 것이 바뀌더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내가 이 노래를 들었을 때가 중학생 때였으니, 꽤나 오래전 이야기다. 그때 나는 이 노래를 들으며 했던 생각을 기억한다. "내가 스물여섯이 되는 날이 올까?"
슬프지만, 당연하게도 그 날은 찾아오고야 말았다. 말하지 않았는가, 그 누구도 나이가 드는 것을 막지 못한다고 말이다. 이제 서른이 훌쩍 넘은 지금, 저 노래를 들으면 '내가 스물여섯이 되는 날이 올까?'라고 생각했던 꼬꼬마 중학생이었던 나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때는 너무나 멀게 느껴졌는데, 이제 서른한 번째 미역국을 삼키게 되었다니! 순간 확 느껴지는 것이 존재한다. '와 내가 나이가 들었구나.'
다이나믹듀오 - 고백
3. 기대수명의 꾸준한 상승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
어디선가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기대수명'이라는 단어가 있다. 말 그대로, 평균적으로 어떤 이가 얼마나 오래 사는지를 통계적으로 계산한 수치다. 1990년 대한민국 국민의 기대수명은 71.66세였지만, 그로부터 27년이 지난 2017년 우리나라 국민의 기대수명은 82.7세다. 조금 더 길게 보더라도 결과는 동일하다. 현대과학과 의료기술의 찬란한 발전과 함께 우리의 기대수명은 단 한 번도 감소세를 보이지 않고 지난 50년간 꾸준히 증가했다. 이제 우리들은 평균적으로 82.7세까지 살게 되었다. 아마 우리 나이가 한 살씩 들어갈수록, 이 수치는 점점 늘어날 것이다. 내가 마흔이 되는 날에 내 기대수명은 85세쯤 되지 않을까?
보건복지부, ‘OECD 보건통계 2019년’
이를 조금 더 와 닿게 표현하자면, "우리 국민의 평균 수명이 20년간 10세 이상 늘어났다"라고 할 수 있다. 보통 부모님과 자녀의 나이 차이를 약 25-30세라고 했을 때, 한 세대의 나이를 25-30년 정도라고 할 수 있겠다. 그에 따라 지난 30년으로 기대수명의 통계치를 넓혀보면, 한 세대는 그 윗 세대보다 약 18년 정도의 기대수명이 늘어났다는 결과를 쉽게 볼 수 있다. 우리는 우리 부모님 세대보다 평균적으로 최소한 18년을 더 오래 산다는 이야기다. 분명, 이러한 결과는 이 사회를 살아가는 많은 이들에게 표면적으로, 또 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세대가 거듭될수록 기대수명이 크게 증가했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고민을 거듭하던 도중, 한 의사분이 쓴 칼럼이 눈에 띄었다. 우리가 현재 생각하는 우리의 사회적 나이는 의학적으로 맞지가 않는다는 것이다. 참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의학적으로 자기 나이에 0.7을 곱해야 생물학적·정신적·사회적 나이가 나온다는 이론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60세의 노인은 실제로는 42세가 된다. 65세 이상은 노인이기에 지하철과 버스를 무료로 탈 수 있게 하고, 40세가 넘은 사람이 새로운 직장을 찾기 위한 이력서를 냈을 때 그 어느 회사도 받아주지 않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이 의사분은 현재 대한민국이 책정한 사회적 나이와 그 나이에 따른 사회 정책이 잘못되어있음을 꼬집는다. 한국의 평균 수명이 60대일 때 책정한 30년 전 인구통계를 가지고 하는 사회정책들은 평균 수명이 81세로 늘어난 지금과는 너무 괴리가 커서 맞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사회 현실과 의학적 나이에 맞춰 노동인구 계획을 다시 짜야하는 시기가 되었다는 말이다. 단지 노동인구 계획만일까?
물론, 이 글을 읽으시는 인생의 대선배분들도 많이 계시겠지만 후배의 진지한 고민을 귀엽게 봐주실 것이라 믿는다. 요즈음 나이가 드니까 인생에 한 가지 고민이 추가되었다. 바로 '결혼'에 관한 고민이다. 그래서 나는 자주 부모님과 결혼 이야기를 한다. 주로 나의 질문공세가 이어진다. "아빠는 서른에 결혼을 했잖아, 근데 그때 친척들은 뭐라고 했어?" "엄마는 스물여덟에 결혼을 했잖아, 집에서 뭐라고 안 했어?" 등등. 그러면 간단명료한 답변이 이어진다. "그땐 스물넷, 다섯만 되어도 노처녀라고 했어", "집에서 결혼 언제 할 건지 자주 물어봤지" 등등.
우리 부모님의 개인적인 경험이 우러나온 말을 토대로 과연 정말 사회적으로도 시대에 따라 결혼을 하는 나이에 변화가 있었는지에 대해 통계치로 알아봤다. 지금보다 3년 전인, 2016년을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평균 초혼 연령은 가파르게 상승했다. 여성을 기준으로 1990년 24.8세였던 초혼연령은 2016년 30세를 돌파했다. 남성을 기준으로 1990년 27.8세였던 초혼연령은 2016년 무려 32.8세가 되었다. 결혼정보업체 듀오의 2019년 혼인통계 보고서에 따르면, 이 수치는 무려 33.3세(여성), 36.3세(남성)로 나타난다.
이러한 자료들이 보여주는 것은 분명하다. 바로 결혼하는 나이가 변화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무려 8살 이상 증가했다. 이제 더 이상 30세의 여성은 결혼에 늦은 것이 아니며, 36세의 남성 역시 결혼에 늦은 것이 아니다. 1990년의 기준이었다면? 25세의 여성과, 28세의 남성은 얼른 결혼해야 하는 나이다. 집안 어르신들의 한숨소리도 엄청나게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다. 단지 문화의 변화가 아니다. 앞서 상세히 이야기했듯, 과학과 의료기술 발전에 의한 '기대수명 증가'와 더불어 그에 따른 '사회적 나이'의 변화 때문이다.
6. 사회적 나이의 변화, 그리고 그 변화에 대한 인식의 필요성
앞서 통계치를 가지고 이야기했던 사회적 변화의 결과들이 보여주는 것은 간단하다. 과거의 나이와 현재의 나이에 괴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결혼을 예로 들었지만, 다른 영역에서도 이와 비슷한 결과가 나타난다. 사회 진출 시기는 점점 늦어지게 되었고, 육아를 시작하는 시기도 마찬가지로 늦어지게 되었다. 사회적으로 '이쯤의 나이에는 이러한 것을 해야 한다'라는 통념이 계속해서 바뀌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1990년에 우리 사회가 공유했던 통념: 예를 들어 '나이 서른 전에는 반드시 결혼을 해야 한다'와 같은 것은 2019년인 현재 통념이 아닐 수도 있다. 오늘날 나이 서른에 결혼하는 내 주위 친구들에게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오, 결혼 일찍 하네?"
7. 용기를 잃지 않는 삶에 대한 예찬
다시 이 글을 시작하며 했던 말로 되돌아가 보자. "인간은 모두 나이가 드는 경험을 하기 때문에, 많은 이들은 '나이가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 늘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해왔다. 아름다움을 미덕으로 삼는 누군가는 이를 "아름다운 추억이 쌓여간다는 것"이라고 일컬었다. 반면, 현실적인 누군가는 나이가 들어가는 것을 죽음으로 향해가는 것이라고 냉소적으로 표현했다." 하나는 너무 낭만적이고, 다른 하나는 너무 냉소적이다. 앞서 말한 낭만적 표현과 냉소적 표현, 그 중간 지점 어디 즈음에서 나는 나이가 든다는 것을 '조금씩 용기를 잃어가는 것'이라고 이야기해보고 싶다. 보이는 모든 것에 호기심을 가지고, 해보지 못한 것을 다 해보고자 하는 어린아이에게는 엄청난 용기가, 나아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하나씩 줄여나가며 '해야 할 것'을 수행해나가는 청년에게는 그 용기를 가로막는 현실이, 더 나아가 용기를 필요로 했던 '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 채로 '반드시 해야만 하는 주어진 의무'를 다하는데만 급급한 장년이, 마지막으로 용기를 내고 싶어도 그 육신이 용기를 낼 수 없게 하는 노년이 존재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나이를 먹으면서 용기를 잃어간다. 그런데 그 과정을 잘 보면, 많은 이들이 '나이'라는 숫자가 주는 무게로 인해서 용기를 잃어가는 것 같다. '이제 서른이니까', 혹은 '이제 마흔이니까'와 같은 생각들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것에 도전할 용기를 잃도록 만든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그리곤 술 한잔과 함께 작은 목소리로 되뇌게 만든다. '20대로 돌아갈 수 있다면, 이러한 것을 할 텐데... 저러한 것을 할 텐데...' 과거로 돌아가면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늘 사람들에게는, 과거에 갈 수 있다면 새로운 도전을 할 것이라는 마음이 존재하고 그러한 마음의 존재는 현재 새로운 도전에 대한 용기가 현재라는 시간에 가로막혀있음을 보여준다.
앞서 잠시 인용했던, 최일봉 선생님의 나이 이론을 적용해보자. 우리의 사회적 나이를 알기 위해, 현재 실제 숫자 나이에 0.7을 곱하는 것이다. 서른이 넘은 내 나이는 (31 x 0.7 = 21.7) 21.7세가 된다. 이제 나 자신에게 묻는다. '21세로 돌아갈 수 있다면, 넌 뭘 할 거냐?' 그에 대한 대답이 바로 내가 지금 이 순간 해야 할 것이 아닐까? 이는 다시 말해, 21.7세라는 숫자가 주는 '용기'를 잃지 않는 바로 그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세상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인 성경에서는 나이가 엄청나게 많은데 말도 안 되는 용기를 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정복 전쟁을 펼치던 과정에서, 가장 먼저 땅을 선택할 수 있는 특권을 얻었던 인물 '갈렙'은 이미 얻었던 땅들을 편하게 고를 수 있는 환경을 내려놓고, 자신은 아직 정복하지 못한 '헤브론'을 갖겠다며 계속된 전쟁에 지친 사람들에게 귀감이 된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Give me this mountain)"를 외쳤던 그의 나이는 무려 85세다. 그에게 나이라는 숫자는 '용기를 내지 못하게끔 하는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그가 가졌던 기준은 당시 사람들의 사회 통념과는 다른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Nicolas Poussin 1593/94 – 1665, Joshua's Victory over the Amorites, oil on canvas, Museum Pushkin
늦었다고 생각될 때가 있다. 때로는 무언가에 쫓기듯 살게 될 때가 있다. 새로운 것에 대한 용기를 점점 잃어가곤 했다. 그래서, 이제 조금은 다르게 살기로 마음먹었다. 20대였다면 무엇을 했을까? 를 생각한 뒤, 그 생각나는 것을 지금 하기로 결정했다. 이 나이엔 이것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빠져나오기로 했다. 현실과 불투명한 미래가 주는 두려움에서 벗어나 다시 한번 용기를 갖기로 했다. 그래서 난 어제까진 30대였지만, 오늘부터 20대로 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