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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용석 Oct 22. 2019

높은 곳에는 진리가 없다

진리란 무엇입니까? (Quod Est Veritas?)

1. 배우 김응수씨의 한마디

"묻고 더블로 가!" ⓒ타짜 / Sidus

요즘 배우 김응수 씨가 인기다.  사실 본명보다 '곽철용'이라는 타짜 극 중 캐릭터 이름으로 많이 불리고 있다.  "묻고 더블로 가", "화란아 나도 순정이 있다", "내가 달건이 생활을 17살 때부터 시작했다", "범인은 이중에 있단 말이야" 등등 수많은 타짜의 유행어가 다시 되살아나고 있다.  제2의 전성기를 맞은 김응수 배우다.  그의 최근 인터뷰를 읽어보면서 한 구절 내게 큰 영감을 준 말이 있었다.


높은 곳엔 진리가 없어요, 낮은 곳에 있지


장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마지막 그가 덧붙이는 말은 바로 "높은 곳엔 진리가 없어요, 낮은 곳에 있지"라는 간단한 말이었다.  이 간단하면서도 짧은 말이 왜 이렇게 내게 여운을 주는지 모르겠다.  그의 말 한마디가 나로 하여금 '진리(the truth)'에 대해 다시 깊이 생각하게끔 만들었다.  분명, 높은 곳에 진리가 없고 낮은 곳에 진리가 있다는 말은 '성경'에 나와있기 때문이다.


장자(莊子)의 ‘천도(天道)’에 목수 ‘윤 편( 扁)’ 일화가 나와요. 왕이 책을 읽고 있고, 그 앞에서 목수가 수레바퀴를 깎다가 왕에게 무슨 책이냐고 물어요. 왕이 옛 성현의 말씀이라 답하죠. 그러자 목수가 ‘그것은 술 찌꺼기 같은 것’이라고 응수해요. 왕이 불같이 화를 내니까 목수가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죠. ‘수레바퀴를 덜 깎으면 뻑뻑해서 굴대가 돌아가지 않고, 더 깎으면 헐거워서 튼튼하지 못하다. 더도 덜도 아니게 정확하게 깎는 건 손의 감각이지, 성현의 말씀 같은 것이 아니다.’ 연기도 똑같아요. 무한히 훈련하고, 고생하고, 때론 실패도 하면서 감을 기르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1년에 한 편씩 연극을 해요. 나를 심판하고 점검하기 위해서. 높은 곳엔 진리가 없어요, 낮은 곳에 있지.  아래 인터뷰에서 발췌.


2. 한 인간의 질문: "진리가 무엇이냐?"

세상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 성경에서는 '진리'의 문제를 깊게 다루고 있다.  특히 로마의 한 높은 관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부분은 읽는 이로 하여금 진리에 대해 생각해보게끔 만든다.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로마의 법정에 세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사형 판결을 내리고 싶다.  당시 이스라엘을 담당하던 로마 총독인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를 심문한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는 질문에서부터 시작한 그의 심문은 나사렛 출신의 가난한 목수 청년 예수가 심문 시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을 고백하면서 "나는 진리를 증명하기 위해 태어나서 이 세계에 왔다"라고 말한 뒤, 마지막 질문을 끝으로 끝난다.  그가 마지막 예수께 툭 내뱉은 질문 한 마디가 참 인상적이다.


"진리가 무엇이냐? (Quod Est Veritas?)"
(요한복음 18:38)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뇨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 (요한복음 18:33-38)
그러자 빌라도가 말했다.  "그래서, 네가 왕이냐,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네가 사실을 말했다.  나는 왕이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이 세상에 왔다.  누구든지 진리에 마음이 있는 사람, 조금이라도 진리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내 음성을 알아듣는다."  빌라도가 말했다.  "진리가 무엇이냐?"...  요한복음 18장 37-38절, 『 메세지성경 』, 유진 피터슨, 368-69쪽.
Nikolai Ge, "Christ and Pilate"


3. 청년 예수, 진리가 무엇인지 대답하다

예수가 빌라도의 질문에 대답한 대답은 성경에 쓰여있지 않지만, 성경의 다른 부분에선 예수가 진리에 대해서 확실하고 분명하게 말한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 확실하고 분명한 대답은 다소 당돌한 대답이다.  '나'라는 대답이다.  하지만, 그 앞뒤 문맥을 잘 살피면 조금 더 깊은 의미를 살펴볼 수 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


예수가 말하는 '아버지'는 '하나님'을 의미하는데, 그 하나님께 가는 방법이 오직 자신이기 때문에 자신을 진리라고 말한 것이다.  결국 궁극적인 진리의 방향은 '하나님'인 것이고, 그곳으로 가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라는 것이다.  이게 성경의 핵심 내용이다.  그래서 성경이 '기쁜 소식' 즉, 복음(福音)이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요한복음 14:1-7


4. 예수가 살았던 하향성의 삶

앞서 간단히 말했듯, 성경이 말하는 '진리'는 결국 '예수'라는 답이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진리에 대해 알기 위해선 예수의 삶을 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예수의 삶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하향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사실 나의 말이 아니라, 신학자 헨리 나우웬(Henri Jozef Machiel Nouwen)의 말이다.  인카네이션(incarnation): "신(神)이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셨다".  그분은 시작부터 하향성의 삶을 사셨다.


그분은 집요하게 낮아지는 길을 가리키셨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마 20:26-28).  낮아지는 것은 십자가의 길이다.  헨리 나우웬, 『세상의 길 그리스도의 길』, IVP, 23쪽.
제자란 낮아지는 길을 가시는 예수님을 좇아 그분과 함께 새로운 삶에 들어가는 사람이다.  복음은 상향성 중심의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기본 전제를 근본적으로 전복시킨다.  이것은 충돌을 야기하는 동시에 사회를 뒤흔드는 도전이다.  헨리 나우웬, 『세상의 길 그리스도의 길』, IVP, 23쪽.
하향성은 신적인 길이요, 십자가의 길이며, 또한 그리스도의 길이다.  바로 이 신적인 생활 방식이 우리 주님이 그분의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고 싶어 하는 것이다.  헨리 나우웬, 『세상의 길 그리스도의 길』, IVP, 28쪽.


예수는 그 누구보다 하향성의 삶을 살았다.  가난한 자, 소외된 자, 갇힌 자, 억울한 자들을 찾아다니셨고, 언제나 그들의 손을 잡아줬으며, 같이 웃고 웃으며 식사하셨다.  삶의 마지막 순간, 그는 가장 치욕스러운 방법으로 가장 낮은 곳에서 모든 사람들의 멸시를 받으며 죽어갔다.  나사렛 시골 어촌에서 사셨던 그분의 전 생애는 상향성을 전적으로 거부하는 일생이었다.


그는...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립보서 2:6-8)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중심부에는 하나님이 전적으로 자신을 낮추어 복종시킴으로써 자신의 신성을 계시하기로 선택하셨다는 신비가 있다.  하나님은 과거 수세기에 걸쳐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택하여 구원의 말씀을 전파하셨을 뿐 아니라, 이 소수의 남은 자들을 택하여 자신의 약속을 성취시키셨으며, 또한 갈릴리의 이름 없는 마을에 사는 비천한 여인을 택하여 말씀(The Word)이 거하는 성전이 되게 하셨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결국 도시의 외곽에서 치욕스러운 죽음으로 생의 종말을 고했던 한 사람 안에서 자신의 충만한 사랑을 나타내셨다.  헨리 나우웬, 『세상의 길 그리스도의 길』, IVP, 20-21쪽.
사실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이셨던 그분은 조그맣고 연약한 아이로 자신을 나타내셨다.  그리고 애굽의 피난민으로, 순종적인 청소년으로, 또한 평범한 어른으로, 세례자 요한의 참회하는 제자로, 몇몇 소박한 어부들이 추종하던 갈릴리의 전도자로, 죄인들과 더불어 먹고 낯선 자들과 함께 대화했던 사람으로, 소외당한 자로, 죄인으로... 나사렛 예수의 전 생애는 상향성을 전적으로 거부하는 일생이었다.  헨리 나우웬, 『세상의 길 그리스도의 길』, IVP, 22쪽.


5. 높은 곳에는 진리가 없다

자유주의의 그림자에 가려진 우리 시대의 삶은 효용과 부의 증대 그리고 자본의 극대화를 향해 달려가는 삶이 되어버렸다.  자유주의의 이름만 남았을 뿐, 정작 그 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의 자유는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우리의 삶은 성공을 향해 끝없이 달리는 상향성의 삶이 되어버렸고, 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올바른 것이라고 우리는 끊임없이 설득당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에서 높은 곳으로 대변되는 성공의 길에 올라가지 못하면, 그것은 실패이며 슬픔이 된다.


철학자 한병철 씨는 이러한 사회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피로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상향성의 시대에서 시민들은 언제나 피로하다.  끊임없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사람들의 일상은 피로 그 자체가 될 수밖에 없다.


헨리 나우웬의 말처럼, 이들의 삶은 승리하거나 패배하는 이원론적 삶이 되며 승리는 주위의 이상에 부응한 것이며 패배는 각자의 모자람 때문이 된다.  승리는 무엇을 주는가?  일시적인 만족감과, 영원한 허무감을 준다.  성공으로 마음은 채워질 수 없다.  우리는 자유를 갈구하며 돈을 찾고, 명예를 찾으며 높은 곳과 더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가지만 그곳에는 자유가 존재하지 않는다.  높은 곳에는 진리가 없다.


신자유주의라 이름 붙여진 횡포한 자유주의의 확산에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고, 능력을 박탈당하고, 가정을 잃고, 삶을 잃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보자면 현재의 자유주의에는 자유가 없다.  다만 효용과 부의 증대, 자본의 힘만이 있을 뿐이다.  김만권, 『자유주의에 관한 짧은 에세이들』, 9쪽.
오늘날과 같이 경쟁적인 기술 혁신 사회에서, 우리 삶은 전반적으로 상승을 지향하는 추세를 보여 준다.  이와 같은 상향성의 생활양식에서 벗어나는 것은 생각조차 하기 힘들어졌다.  우리 삶의 방식 전체는 성공으로 향하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맨 꼭대기에 이르는 것을 중심으로 짜여 있다.  우리는 상승하는 흐름에 편승하고 있다는 것과 상승할 때 얻는 보상이 주는 즐거움을 통해 활력을 얻는다.  헨리 나우웬, 『세상의 길 그리스도의 길』, IVP, 16쪽.
따라서 삶은 우리가 승리하거나 패배하게 되는 일련의 투쟁으로 여겨진다.  우리가 승리했을 때, 그것은 우리가 주위의 이상에 부응한 것인 반면, 우리가 패배하는 것은 분명히 자신의 모자람 때문이다.  헨리 나우웬, 『세상의 길 그리스도의 길』, IVP, 16쪽.


6. 낮은 곳에 자유가 있고, 그 자유는 진리로 향한다

헨리 나우웬은 성경의 메세지가 "완전한 참 자유는 하향성을 통해서만 발견할 수 있다"라며 하향성에 있는 자유 이야기를 시작한다.  낮은 곳에 자유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왜냐?  바로 본인을 진리라고 소개하신 예수가 낮은 곳을 향했기 때문이다.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위대한 역설은 완전한 참 자유는 하향성을 통해서만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내려오셨고, 종의 신분으로 우리 가운데 사셨다.  하나님의 길은 실로 낮아지는 길이다.  헨리 나우웬, 『세상의 길 그리스도의 길』, IVP, 20쪽.


도대체 왜 그럴까?  왜 예수가 갔던 낮은 곳에는 자유가 존재하고, 그 자유는 진리로 향할까?  그것은 낮은 곳으로 가기 위해서 반드시 '사랑'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일찍이 철학자 하이네는 이를 이야기한 바 있다.  가장 깊은 진리는 가장 깊은 사랑을 통해서만 열린다는 것이다.  예수라는 시골 청년이 그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낮은 곳으로 직접 가서 그들과 함께 했던 것은 '사랑' 때문이었다.  다른 무엇도 아닌 바로 '사랑'이다.


"The deepest truth blooms only from the deepest love"
-Heine-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한복음 8:32)


7. 가자, 낮은 곳으로

2000년이 훌쩍 넘었지만, 예수라는 시골 청년의 죽음 이후에도 사람들은 '진리'가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민해왔다.  "YOLO"(You Only Live Once)라는 단어가 요즘은 한 번 사는 인생이니 마음껏 너 안의 욕구와 욕망을 채우라는 의미를 갖지만, 과거 있었던 YOLO는 한 번 사는 인생이니 '진리'를 추구하자는 의미였다.  수없이 많은 철학자들과 사람들이 진리가 무엇인지를 갈구했다.  세상 대부분의 종교는 '진리'에 대해 이야기한다.  자신들의 가르침에 진리가 있다는 것이다.  위대한 소설가 톨스토이는 "가장 위대한 진리는 단순하다"라고 말한다.  다양한 사람들이 진리에 대해 말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진리는 정말 단순하다.  "낮은 곳에 자유가 있고, 진리가 있다.  오직 사랑에 의해서만 우리는 낮은 곳으로 갈 수 있다"


"The greatest truths are simple"
-Leo Tolstoy-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이 우리 인류가 언제나 풀지 못했던 영원의 숙제였던 것처럼, 진리에 대한 추구도 그의 연장선상에서 같은 숙제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진리를 추구하는 삶을 살길 원했기 때문이다.  진리라는 것은 결국 옳고 그른 것을 구분하는 기점이다.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하는 지표다.  성경은 이에 대해 놀라운 답을 내놓는다.  '사랑하라!  그리하면 낮은 곳으로 갈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진리가 있다.'  헨리 나우웬은 이에 대해 도전적인 이야기를 거든다.  "살아있는 그리스도가 되어라!  지금 여기에서 살아있는 그리스도가 되어라!"  낮은 곳에 진리가 있다.


사실상, 영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살아있는 그리스도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최대한 그리스도를 닮으려고 애쓴느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일깨워 주는 것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에서 영감을 얻는 것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오히려 영적인 삶은 우리에게 훨씬 더 철저한 요구를 한다.  즉 그것은 시공간 속에서, 즉 지금 여기에서 살아 있는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헨리 나우웬, 『세상의 길 그리스도의 길』, IVP, 13-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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