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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용석 Sep 22. 2016

무관심 사회

이웃, 선한 사마리아인

바야흐로, 우리는 무관심 사회에 살고 있다.


지난 8월 28일, 대전에서 슬픈 사건이 발생했다. 승객 두 명은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가고 있었다.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골프 여행을 가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한창 도로를 달리던 택시에서 택시 기사는 운전대를 잡은 채로 앞으로 갑자기 쓰러졌고 그대로 택시는 앞 차를 들이받았다. 택시기사에게 심정지가 온 것었다. 심정지가 와서 의식을 잃고 쓰러져있는 택시 기사를 그대로 둔 채, 두 명의 승객은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다른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승객이 떠나고 난 뒤 뒤늦게 다른 목격자에 의해서 신고가 접수되었고, 119가 도착해 구조를 진행하였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다. 그렇게 택시 기사이자, 한 가정의 가장은 생을 마감했다.

"대전서 택시기사 심정지로 숨져, 승객 신고 없어", MBC, 이승섭 기자.

해당 기사: http://imnews.imbc.com/news/2016/society/article/4099696_19807.html


로스쿨에서 미국 형법(Criminal Law)을 공부하면서, 큰 충격을 느꼈던 판례가 있었다. 바로 Kitty case로 널리 알려진 State v. Moseley, 228 N.E.2d 765 (N.Y.1967) 였다. 미국 뉴욕에 사는 여성 Catherine Susan Kitty Genovese는 뉴욕 중심가 근처에 위치한 자신의 아파트 앞에서 한 괴한의 칼에 찔렸다. 한적한 저녁이었기에 그녀의 다급한 목소리는 주변에 위치한 수많은 이웃들에게 메아리쳐졌다. "세상에! 이 사람이 날 칼로 찔렀어요! 도와주세요!" "Oh my God, he stabbed me! Help me!" 그녀는 길거리를 절뚝이며 뛰어가면서 있는 힘을 다해 소리 질렀다. 주변에 거주하고 있던 37명에서 38명의 사람들이 실제로 그 현장을 목격했거나 그녀의 구조 요청을 들었지만, 그 누구도 그녀를 도와주거나 경찰에 신고해주지 않았고 그녀는 살해당했다. 법원은 37, 38명의 사람들에게는 그 어떠한 법적 책임도 없다고 판결했다.


이 판례를 보며 형법 교수님은 '부작위(Omission)'라는 법학적 개념을 이해하길 원하셨지만, 내게는 법학적 이해뿐만 아니라 사회학적, 철학적 그리고 성경적인 고민들이 생겨났었다. '단지 미국의 이야기일 뿐이지'라는 생각은 최근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택시 기사 심정지 사건을 통해서 깨졌다. 이는 전 세계의 문제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전의 사회학적, 철학적 그리고 성경적 고민들은 되살아났다.


누가복음 10장 25절 - 37절은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잘 알고 있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담고 있다.

 25.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29.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35.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율법학자는 예수님께 영생에 대해 묻고,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율법에 어떻게 쓰여있는지 되물어보신다. 정답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었다. 율법학자는 이어서 법학 전공자적인 질문을 시작한다. 사용된 용언의 의미(Definition of Term)에 대해서 질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은 이에 대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답변하신다.


TheGood Samaritan, by Walter Rane, courtesy Church History Museum


율법학자의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을 분석해보면 참 재미있다. 율법학자의 질문은 이웃의 '범위'였다. 이웃에 범위에 대해 묻는 순간, 이웃의 범위에 대한 입증 책임(burden of proof)은 예수님(혹은 율법의 해석자)에게 존재하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통해 그 입증 책임을 각 개인에게로 돌리신다. 이웃의 범위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이 누구를 이웃으로 생각하는지에 따라 그 범위는 1명에서 70억 명까지 확대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놀라운 논변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간단하다. 이웃이 되어주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 정말 어려운 것이다. 법적으로 부작위를 처벌하지 못하는 것은 신고 의무를 지키지 않은 것을 형사적 처벌의 대상으로 삼을 시에 과도한 책임이 부과되고, 시민 전체가 잠재적 범죄자가 되기에 사회적 비용이 너무나 커지기 때문이다. 법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사실 위 두 사례(택시 사례와 Kitty 판례)를 비판하기란 어렵다. 왜냐하면,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통스럽고, 아무런 효용이 없으며, 어렵다. 바로 그것이 이웃이 되는 것이며 그 이웃됨에는 '사랑'이 필수적으로 동반된다.


예능 프로그램 '1박 2일'은 우리나라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1박 2일에서 가장 유행했던 한 마디를 꼽으라면, "나만 아니면 돼!"라는 복불복 단골 등장 유행어를 꼽을 수 있다. 나는 이 유행어가 사회학적, 철학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인간이 모든 인간을 그 자체로 존중하는 것을 이상으로 꿈꾸는 포스트모던의 시대에 살고 있던 우리에게, 더 이상 '존중'이 아니라 '무관심'만 남아버린 것이다. 모든 인간이 모든 인간에 무관심한 사회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와 결합되어, '이윤' 이외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 사회로 변모한다.


누군가 아픔을 겪고 있을 때, 도와주는 것은 사랑이고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이웃이 되어주는 것이다. 무관심은 타자의 아픔을 보고 고개를 돌리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 사회와 이 시대가 요구하는 서로에 대한 '무관심'에 젖어 사람들에게 존중이 아닌 무관심을 주고 있다. 이웃이 되라는 예수의 가르침은 작아지고, 우리는 서로 '남'이 되어간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정말 명확하다. "이웃이 되어줘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누구의 이웃이 되어줄 것인가? 다시금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그대는 누구의 이웃이 될 것인가?" 우리 크리스찬 앞에 당면한 질문이다.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질문이다. 질문의 답은 '사랑'만이 채울 수 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그리고 '한 영혼 사랑' 우리는 어떻게 빛과 소금이 될 것인가.


바야흐로, 우리는 무관심 사회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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