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용석 Sep 24. 2016

저항 사회

사울의 목과 옷자락 중 무엇을 벨 것인가에 대한 짧은 고민

  "나에게는 '권리'가 있고, 이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나는 '저항할 권리'가 있다"라는 이 짧은 말속에는 많은 이야기가 함축되어있다. 그 기반에는 소위 '혁명'으로 불리는 인류사의 멋진 사건들이 있고, 주어가 위치한 자리에 '우리'를 넣게 되면 소외된 사람들의 손을 맞잡으며 일어나는 다양한 인권운동을 비롯한 사회활동들이 있다. 역사의 또 다른 측면에서 바라보면, 십자군 전쟁으로 대표되는 수많은 전쟁들이 자리한다. 일정한 권리 보호를 목적으로 결의하여 총을 들게 된 혁명군이 있고, 신문은 그들을 혁명군으로 명명하거나 반란군으로 명명한다. 그 반대편에는 정부군이 존재하고, 그들 간의 전투가 있다. '저항할 권리'라는 단어 속에는 수많은 행복과 기쁨도 존재하지만, 동시에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양의 피가 공존한다.


  우리에게 저항은 언급하기 어려운 단어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저항은 우리 일상 깊숙하게 녹아들어 있다. 민주주의를 통해서, 또 근대화를 통해서 우리는 표면적이지만 누구나 평등한 권리를 갖게 되었고 그것은 인권 혹은 시민권이라는 다양한 단어로 불리지만, 결론적으로 이러한 권리는 나의 '이익'(원하는 것)을 위해 저항하는 나의 행동을 정당화 시켜주는 도구가 되곤 한다. 말하고 싶은 것이 권력에 의해서 제지받을 때 우리는 "나는 말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며 표현의 자유(권리)를 외친다. 부당한 처분을 받았을 때, 우리는 나는 인간이고 인간으로서의 권리가 있다는 것을 외친다. 인권은 그렇게 권리에 기반한 저항을 통해 사회 속으로 메아리쳐진다.


  우리 사회는 점점 서로가 서로에게 저항하는 것을 장려하는 사회로 변해가고 있다. 데이비드 이스턴(David Easton)은 정치를 '가치의 권위적 배분(authoritative allocation of values)'이라고 정의했다. 많은 구성원들이 함께 있는 사회에는 다양한 가치들이 존재하고, 그 가치를 서로 나눠 가지기 위해 사람들은 서로 갈등하게 된다. 이스턴의 말처럼 그 갈등을 '정치'라고 보았을 때, 사람들은 공통된 가치를 취득하기 위해 이해관계의 교집합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연대하게 된다. 서로 다른 집단들은 한정된 사회적 가치를 위해서 서로가 서로에게 저항한다. 여성과 남성의 갈등, 지역과 지역 간의 갈등, 인종과 인종 간의 갈등 그리고 종교와 종교 간의 갈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저항이 나타난다. 저항하지 않으면 가치를 배분받지 못하고, 저항하면 가치를 배분받았다는 역사책의 내용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가 서로에게 저항하는 것을 장려하고, 사람들은 그 장려에 성실히 따르게 된다. 그 과정에는 매번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은 외침이 함께한다. "내게는(우리에게는) 권리가 있고, 그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저항할 수 있는 권리가 존재한다"


  모두가 권리를 위해 저항할 권리를 행사하는 이 시대에서 잠시 멈춰 생각해본다. 우리는 반드시 저항해야 하는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 생각하면서, 큰 고민이 뒤따른다. 나는 크리스찬인데, 크리스찬으로서 이러한 만인의 저항에 동참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다. 당연히 불의와 부정의가 나의 앞에 나타난다면 그것을 저항하는 것이 맞다. 힘없는 사람들의 편에 서고, 권력자의 횡포에 저항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당연히 양립할 수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다윗의 이야기를 보면서 한 단계 더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다윗의 사람들이 가로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붙이리니 네 소견에 선한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그리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을 인하여 다윗의 마음이 찔려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다윗이 이 말로 자기 사람들을 금하여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하니라 사울이 일어나 굴에서 나가 자기 길을 가니라

사무엘상 24:4-7


사울의 옷자락을 자르는 다윗의 모습


  구약의 사무엘상에는 다윗과 사울의 이야기가 나온다. 사울의 끈질긴 추적을 피해 힘들게 도망을 다니던 다윗은 동굴에서 자고 있는 사울을 만난다. 다윗은 완전무장된 상태이고, 사울은 아무런 방비도 되지 않은 채 자고 있는 상태였다. 다윗의 신하들은 다윗이 사울의 목을 치길 원하지만, 다윗은 사울의 목이 아닌 옷자락을 벤다. 그리고는 자신이 그냥 도망치지 않고 옷자락을 벤 행동에 대해 후회하며 자신의 부족함을 하나님께 회개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왕으로 세운 사울을 죽이지 않은 다윗의 결정에 기뻐하셨을 것이고, 나아가 그 옷자락을 벤 것에 대해 회개하는 것에 더 기뻐하셨을 것이다. 다윗의 이 결정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든다. 나는, 저런 상황에서 단 한 번의 예외 없이 '목'을 베고 있지는 않은가? 그 목을 베어 미소를 머금고 모두에게 자랑하고 있지는 아니한가? 나의 저항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는 때'에 '내가 생각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은가?


  저항 사회에 살고 있는 나는 사울의 목과 옷자락 사이에서 어떠한 것을 취할 것인가? 고민이 깊어지는 밤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무관심 사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