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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용석 Oct 29. 2019

뇌물을 취하고, 판결을 굽게 하다

사법불신과 사법부패, 특히 판사의 부정부패에 관한 이야기

1. 미술 작품을 걸어놓는 것의 의미

유럽과 미국을 비롯한 서양 국가에는 어느 도시에 가던 멋진 예술 작품이 걸린 미술관이 즐비하다.  그래서, 여행자들로 하여금 반드시 발길을 이끌게 만든다.  사람들은 미술관에서 그림을 보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집에 미술작품을 걸어놓는다.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이나, 자신에게 영감을 주는 작품을 걸어놓고 자주 보는 것이다.   재미난 사실은 미술관과 집뿐만 아니라, 공공기관에서도 언제나 좋은 그림들을 걸어놓는다는 점이다.  그 예로 내가 일했었던 미국 앨라배마주 대법원에도 수많은 판사들의 초상화뿐만 아니라 다양한 그림들이 걸려있다.  물론, 일하면서 그런 작품들을 볼 시간은 없지만 말이다.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그러한 일은 자주 일어난다.  법원이나 의회 같은 기관에 좋은 작품들을 걸어놓는다.  그냥 걸어놓는 것일까? 그럴 리가.  그 작품에는 큰 의미가 있다.  그 기관이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Kimbell Art Museum


2. 캄비세스의 재판 (The Judgment of Cambyses)

여느 유럽의 공공기관이 그렇듯이, 벨기에에서도 예술 작품에 대한 문화가 존재했던 거 같다.  16세기경, 벨기에 브뤼헤에서는 화가 Gerard David에게 해당 시의 법정으로 사용되는 시의회 건물에 걸어놓을 미술 작품을 주문한다.  그 작품의 이름은 캄비세스의 재판(The judgment of Cambyses).


이 작품은 BC 6세기 페르시아에서 일어났던 일을 그린 그림이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따르면, 페르시아 제국 시대 당시 시삼네스라는 재판관이 돈을 받고 판결을 내리는 사건이 발생했고 페르시아 제국의 왕 캄비세스 2세는 해당 재판관에게 끔찍한 처벌을 내렸다.  그림은 왕이 해당 재판관에 찾아가 처벌을 명령하는 것과, 해당 재판관이 피부를 벗겨내는 잔인한 형벌을 받고 있는 장면을 담고 있다.  산사람의 껍데기를 벗기는 형벌이었다.  이야기를 찾아보면, 이후 왕은 그 껍데기를 재판관 의자에 깔도록 명령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의자에 앉을 새 재판관으로 시삼네스의 아들인 오타네스를 임명하였다.  이 두 그림은 그 이야기를 담고 있다.

Gerard David, The Judgment of Cambyses, 1498 Oil on wood, Groeninge Museum, Bruges, Belgium


이 두 그림은 도대체 왜 법정 건물에 붙어있었던 것일까?  당시 페르시아는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이었고, 해당 형벌을 내린 왕 캄비세스 2세는 이집트 정복을 이룩하고, 에티오피아와 카르타고에 이르는 거대한 제국을 거느린 페르시아 황제였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그에게 있어서 고위 공무원의 부정부패를 눈감아주거나 덮어주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황제는 왜 이토록 잔인한 형벌을 내린 것일까?  벨기에 판사들과 정치인들은 판사들로 하여금 매일 이러한 물음을 스스로에게 물어볼 것을 전하려고 한 것은 아닐까?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했을 때, 온몸의 피부가 벗겨졌던 시삼네스 재판관을 기억하며 재판을 하라고 말이다.


3. 사무엘의 아들 요엘과 엘리야의 재판

성경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구약 시절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었던 위대한 리더들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손꼽히는 선지자인 사무엘이 있었을 때 생긴 일이다.  이스라엘을 잘 이끌던 사무엘은 결국 늙게 되고, 그를 이어 두 아들들이 사사가 된다.  그러나 그 아들들은 사무엘이 기존에 맡고 있던 재판관의 역할을 맡아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는 일을 저지른다.  재판관의 부정부패는 이미 제사장나라 법에서 금지되어있던 범죄였다.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출23:8)
너는 재판을 굽게 하지 말며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며 또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지혜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인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신16:19)


그러자 이러한 사무엘의 아들들의 부패를 참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에게 나와 '왕을 달라'라고 요구한다.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게 무슨 문제인가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는 그들이 하나님과 약속했던 것들을 어기는 일이었고 결국 이스라엘이 망하는 길로 가는 시작이 되었다.


사무엘이 나이가 많이 들자, 자기 아들들을 이스라엘의 사사로 세웠다. 맏아들의 이름은 요엘이고 둘째의 이름은 아비야였다. 그들은 직무를 맡아 브엘세바에서 일했다. 그러나 사무엘의 아들들은 그와 같지 않았다.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뇌물을 받았고, 재판에서 부정을 일삼았다.  그들에게 진절머리가 난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가, 라마로 가서 사무엘에게 따졌다. 그들은 이런 주장을 내세웠다. “보십시오. 당신은 이제 늙었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을 따르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다른 모든 나라처럼 우리에게도 우리를 다스릴 왕을 세워 주십시오.”  유진 피터슨, 『메시지 성경』, 삼상8:1-5
사사가 된 사무엘의 아들들 사무엘이 늙으매 그 아들들로 이스라엘 사사를 삼으니 장자의 이름은 요엘이요 차자의 이름은 아비야라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사사가 되니라 그 아들들이 그 아비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를 따라서 뇌물을 취하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 (삼상8:1-3)


4. 판사들은 왜 동료들에 대한 탄핵을 외쳤을까?

앞의 이야기들은 오늘날에도 일어난다.  특히, 작년 겨울 대한민국에서는 사실 엄청난 일들이 일어났었다.  대한민국 헌정사상 처음으로 판사들이 같은 판사에 대해 탄핵 소추를 외친 것이다.  그 대상은 대한민국 최대의 거대 로펌이 일본 전범기업들의 변호를 맡았던 일본 강제징용 재판을 그에 유리하게끔 고의지연하는등의 혐의를 받고 있던 양승태 대법관을 비롯한 대법관들이었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이 불거진 행위가 징계 절차 외에 탄핵 소추 절차까지 함께 검토돼야 할 중대한 헌법 위반 행위라는 데 인식을 같이한다."  
전국법관대표회의, 2018년 11월 19일


소위 "사법 농단" 혹은 "사법행정권 남용"으로 불리는 의혹의 핵심은 사법부 고위 관계자가 정권에 협력하여 법관의 독립성을 침해했다는 것이다.  의혹 제기 이후 법원행정처는 박근혜 정부 당시 청와대와 법원행정처 사이에 특정 재판들에 대한 의견 교류가 있었음을 발표했다.  이 때문에 당시 일부 법관들이 정권이 관심을 두는 특정 사건에 대해 정권의 입맛에 맞게 정치적인 판결을 내렸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간단히 말해, 권력자에게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한 것이다.


특별조사단의 보고서에 따르면, 법원행정처가 당시 상고법원을 새로 만들기 위해 행정부의 협조가 필요했고 이를 위해 판결을 굽게 했다는 것이다.  상고법원이 신설되면 상고법원의 판사들에 대한 인사권도 대법원장이 갖게 되므로 대법원장의 권한은 더 커지게 되고, 이를 의식해 상고법원 신설에 회의적이었던 청와대 우병우 당시 민정수석 등을 설득시키기 위해 '현안 자료'가 만들어졌다는 게 보고서의 주 내용이다.


페르시아 제국에서 일어났던 일이, 그리고 성경에서 일어났던 일이 우리나라에도 일어났다는 것이 구체화되었고, 제 식구 감싸기에 바빴던 법률가들도 이에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가죽을 벗기자는 이야기까지는 아니지만, 헌정 역사상 처음으로 판사를 탄핵해야 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1년이 지난 오늘 무엇이 바뀌었을까?  많은 사람들에게 이 일은 잊힌 지 오래이며, 이러한 일에 대한 조사 처벌 및 탄핵에 대한 책임을 지는 국회는 이런 일이 있었냐는 듯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놀랍게도 바뀐 것은 단 하나도 없다.


5. 무엇이 국민으로 하여금 사법을 불신하게 만들었을까?

우리 헌법은 말한다.  법관은 양심에 따라 독립적으로 재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앞서 잠시 언급한 전국 법관 대표회의에서는 법관들이 '정부' 때문에 양심에 따라 독립적으로 재판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재판관의 부정부패는 오직 외부요인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것일까?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은 이미 국민들의 정서에서 드러난다.  대한민국 71%의 국민은 재판을 신뢰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는 재판이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6. 판사를 비판하는 시대

사법부에 대한 신뢰, 특히 법원과 판결의 주체인 법관에 대한 신뢰가 바닥을 치면서 대한민국에는 신기한 일이 생겨났다.  불공정했다고 생각하는 재판에 대해, 해당 판결을 내린 판사가 누군지, 그리고 어떤 잘못된 논리로 판결을 내렸는지를 비판하기 시작한 것이다.  요즘도 소위 "영장판사 신상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러한 시민들의 조사는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과거 사법부를 신뢰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욕을 하던 것이 이제 인터넷과 매체들을 통해 공공연히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과거 불공정하다고 생각한 판결에 대해 물리적으로 복수를 했던 '석궁 사건'은 굉장한 충격을 안겨주었었다.  물론, 폭력적인 방법 때문이기도 하지만 당시 기억으로는 재판의 주체인 '판사'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직접 전달했다는 사실 자체가 큰 충격이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제 사람들은 석궁은 아닐지라도, 인터넷의 글을 통해서 판사의 판결을 비판한다.

몇 년 전 현직 고등법원 부장판사가 퇴근길에 자신에게 재판을 받은 당사자로부터 석궁을 맞은 사건으로 한국 사회가 떠들썩한 적이 있었다.  사태가 발생한 초기에는 법치주의의 근간이 무너졌다는 법률가들의 탄식이 줄을 이었으나, 얼마 뒤 놀랄만한 반전이 이어졌다.  석궁을 맞은 판사가 아니라 석궁을 쏜 피의자를 동정하는 시중의 여론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고조되었기 때문이다.  이국운, 『법률가의 탄생』, 후마니타스, 2012, 7쪽.
나는 석궁 사건에서 드러난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사법 불신이 새파란 청년 판사 앞에서 대한민국 사람들이 이따금씩 마주치게 되는 곤혹스러운 상황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한국 사회에서는 사법 시스템의 정당성을 추궁하는 앞서의 근본적인 질문들이 아직까지 한 번도 제대로 답변되고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누구보다 진지하게 답변해야 할 대한민국 법률가들은 '짜증 섞인 무표정'으로 그것들을 한사코 무시하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해서는 한국 사회의 저변을 관류하는 사법 불신이 해소되기는커녕 더욱 깊어지는 것이 당연하다.  이국운, 『법률가의 탄생』, 후마니타스, 2012, 7쪽.


7. 나는 왜 저 청년에게 재판을 받아야만 했는가?

지금까지 정권들은 이러한 사법불신과 사법부패를 모르쇠로 일관하거나, 시간이 지나면 조용해질 문제로 치부해왔다.  이에 대해 법조계 내부에서도 이런저런 목소리가 있었지만, 그런 목소리는 제대로 된 자기반성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이제 곪을대로 곪아버린 이 문제는 조금 더 근본적인 해결책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 해결책의 시작은 단 하나의 질문에서 시작한다.  "나는 왜 저 청년에게 재판을 받아야만 했는가?"


"나는 왜 저 청년에게 재판을 받아야만 했는가?, 아니 나로 하여금 저 청년에게 재판을 받게 만든 사람들은 누구인가?"

이국운


대한민국에서 법정을 한두 번이라도 드나들었던 사람들 가운데는 다음과 같은 경험을 가진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법정에서가 아니고, 법원 갈 일이 없어진 뒤 몇 달쯤 지나 집안 결혼식 피로연 자리에서 말이다.  몇 자리 건너 갈비탕을 먹고 있는 청년 하나가 자꾸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왠지 낯이 익은 얼굴.  반듯하게 양복을 입고 단정하게 머리를 빗어 넘겼지만, 어딘지 청바지와 티셔츠가 더 어울릴 것 같은 새파란 얼굴이다.  누굴까?  ...  그러다가 불현듯 생각이 떠오른다.  무표정하게 앉아 있던 그 얼굴.  법대 위에서 원고와 피고의 가시 돋친 공방을 처량한 듯 내려다보던 얼굴들 가운데 왼쪽 가장자리에 앉아 있던 그 얼굴.  얼마 전 법정에서 보았던 젊은 판사의 얼굴이 지금 맞은 편에서 갈비탕을 먹고 있는 청년의 얼굴이라는 것을 갑자기 깨닫게 되는 것이다 ... 누군가의 소개로 그 청년과 악수라도 하게 되면,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돌아설 때쯤, 근본적인 물음 몇 개가 '툭'하고 불거져 나오는 것이다.  '나는 왜 저 청년에게 재판을 받아야만 했는가?'  '나로 하여금 저 청년에게 재판을 받게 만든 사람들은 누구인가?'  이국운, 『법률가의 탄생』, 후마니타스, 2012, 6-7쪽.


생각보다 어려운 이야기다.  분명  헌법이 저 청년으로 하여금 나를 재판하게 했는데, 법률가들이 이야기하는 '국민이 썼다는 그 헌법'에 나는 한 번도 펜을 쥔 적이 없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우리가 선택한 대통령과 우리가 선택한 국회의원에 의해 법을 집행하고 만드는데, 그 판단을 내리는 사법부에 대해서는 정해진 대로만 수동적으로 받아야 하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 드러난다.  이를 조금 어렵게 이야기하면,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문제라고 부른다.


8. 토요일마다 왜 고속도로 상행선은 막히는가

선출된 권력과, 그에 이어지는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부패는 사람들은 분노하게 만든다.  하지만, 분노한 사람들은 캄비세스 2세와 같이 산 사람의 가죽을 벗겨낼 힘이 없다.  그 대신 사람들은 거리로 나오기 시작했다.  이러한 문제를 만든 근원에 다가가기 전 기술적인 문제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부패한 사람들을 처벌하는 기능을 하는 기구에 무엇인가 문제가 있다는 소리를 외치기 시작했다.  나아가 그들과 함께하는 언론인들에게 문제가 있다는 소리가 광장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마치 사무엘의 아들들의 사법 부정부패를 보고, 사무엘에게 나아와 왕을 요구했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사람들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움직임이 여느때처럼 잠깐의 미동에 그칠 것인지, 아니면 개혁을 이루어낼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 국민들은 '정의'와 '공정'에 목말라있다는 것이다.  공의로운 나라를 만드려는 움직임은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그저 움직임으로만 끝나선 안된다.  한나 아렌트가 그녀의 저서 『혁명론』에서 말했듯, 성공한 혁명은 언제나 새로운 '법'을 쓰는 형태로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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