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와 '제사'에 대한 이해, 그리고 '온라인 예배' 이야기
I. 서론
코로나 19 바이러스로 인해 기독교 각종 교파들은 주일 예배를 교회에 모여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온라인이나 가정 예배로 드리는 것을 권고하는 지침을 내놓았다. 본인이 속한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도 총회가 다음과 같은 대응 지침을 내놓았다. 따라서 지난주와 오늘, 우리 가족은 교회에 가지 않았고 집에서 유튜브를 통해서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티비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함께 찬양을 하고, 말씀을 들으며 예배를 드렸다.
이와 관련하여 다양한 반응들이 있었다. 우리 가족처럼 집에서 예배를 잘 드린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몇몇 교회에서는 결코 온라인 예배를 드릴 수 없다며 주일 예배를 강행하기도 하였고, 한 프로 격투기 선수는 인터넷 예배는 진정한 예배가 아니라는 인터뷰를 하면서 본인의 예배에 대한 견해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특히, 이번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대구-경북 지역 종교단체의 집단감염으로 그 심각성이 더 증폭된 탓인지 이러한 다양한 반응과 논쟁에 대해 많은 기사들도 뒤따랐다. 이를 놓고 다양한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의 의견들도 첨예하게 대립했다.
또한 우리 시각으로 바로 어제, 성남 은혜의강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 사람들 중 40명이 집단 감염되어 하루 종일 뉴스의 톱기사로 보도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잠시 멈춰 반드시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보아야 한다.
과연 그리스도인은 교회에 가지 않고서는 예배를 드릴 수 없는 것일까? 소위 말하는 '주일 성수'라는 것이 '성전'이라는 물리적 건물 내부에서만 지켜질 수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 명쾌하게 대답할 수 없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어려서부터 자신의 시험 일정 때문에 일요일에 교회에 못 나왔거나, 아파서 일요일 예배를 빠진 친구들이 종종 자신의 그러한 행위 또는 부작위 때문에 스스로를 정죄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많이 본 기억이 있다. 그 친구들은 모두 잘못된 행동을 했던 것일까? 평생을 교회 울타리와 가깝게 살아왔던 내 주변 사람들도 이와 관련해서 서로 다른 대답을 내놓을 때가 많았다. 따라서, 이번 기회를 통해 이 문제를 한번 정리해보는 것을 통해 예배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독자분들도 이 글을 읽으시며, 예배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시는 시간이 되셨으면 좋겠다.
II. 제사와 예배의 이해
1. 개요
예배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사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해야만 한다. 제사에 대한 설명 없이 예배에 대해서 설명할 수 없고, 제사에 대한 이해 없이 예배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 앞서 소개한 많은 논쟁들과 대립들은 결국 제사와 예배에 대한 다른 이해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한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신약에 나오는 예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구약에 나오는 제사를 이해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구약에 나오는 제사에 대한 이해 없이 신약의 예배를 이해할 수 없고, 제사가 어떻게 예배로 바뀌었는지에 대해서 이해하지 않고서 예배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사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자세하게 다뤘던 바 있다. 이번 글에서는 이 부분은 간략히 요약하는 형식으로 설명하고 넘어가겠다.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길 원하시는 분들은 본인이 성막과 성전에 대해서 설명했던 글을 참고하면 도움이 되실 것이다.
2. 제사와 예배의 장소
1) 제사의 장소
위 글 「그 순간, 성전 이야기」에서 담고 있는 성막과 성전 이야기를 간략하게 소개하는 방식으로 제사와 예배를 '장소'에 따라 3가지로 구분 지어보겠다. 첫 번째, 제사는 움직이는 성막과 이스라엘 성전에서 이루어졌다. 구약 출애굽기에 나오는 모세를 필두로 한 이스라엘 민족의 애굽에서의 노예 생활 탈출은 이들로 하여금 광야에서 살아가게 만들었다. 그 광야에서 하나님은 이 민족에게 성막을 만들 것을 지시하셨고, 백성들은 성막에서 제사를 드리게 된다.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다섯 가지 제사(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가 드려진 장소다. 성막에서 사람들은 동물을 들고 와 제사장을 통해 제사를 드릴 수 있었다. 이후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 다윗과 솔로몬을 거치면서 움직이던 성막은 이제 멋진 건물로 탈바꿈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소위 우리에게 '솔로몬의 성전'으로 익숙한 '성전'의 첫 등장이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에 '제사를 드릴 동물'을 들고 와서, '제사장'을 통해서, '레위기 법'에 따라 제사를 드리게 되었다. 간단히 살펴봤지만, 제사는 크게 '성막'과 '성전'에서 이루어졌다. 제사에 있어서 장소는 너무나 중요한 요소였다. 제사를 위해선 특정한 장소가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2) 예배의 장소
그러한 제사는 신약 초반부까지 진행된다. 예수님 등장 이후에도 제사는 계속된다. 사람들은 살아있는 동물을 반드시 성전에 가져가야 했고 또 반드시 제사장을 통해서만 제사드릴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이후 바뀐다. 십자가에 달려 청년 예수가 죽음에 이르자, 성전의 휘장이 찢어졌다. 기존 성전의 대제사장은 더 이상 제사를 드리는 통로가 되지 않게 되었다. 예수는 왕 같은 대제사장으로서, 동물의 피가 아니라 자신의 목숨을 제물로 단번에 제사로 드려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 더 이상 매번 동물을 들고 가서 그 동물의 죽음을 통해 속죄를 연속적으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속죄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제사는 끝났고, 예배가 시작됐다. 우물가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셨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온다"는 그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다. 더 이상 동물을 들고 성전에 가지 않아도 된다. 제사장을 통할 필요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든 것이 충분한 예배는 장소가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심산도 아니고, 예루살렘 성전도 아니고, 오직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는 시대가 된 것이다.
3) 너희 몸이 성전
그런데,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너희 몸이 성전'임을 이야기한다. 다시 말해, 우리의 몸이 성전 그 자체라는 것이다. 이는 글 「그 순간, 성전 이야기」에서 자세하게 다뤘었다. 쉽게 말하면, 성소는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곳인데, 성막에도 하나님의 영이 거했고, 성전에도 '지성소'에 하나님의 영이 거했었다. 그래서 성막과 성전은 제사를 드리는 장소였다. 예수님은 본인의 죽음 이후 '성령을 보내줄 것'을 약속하셨고, 우리는 성령을 선물 받았다. 우리 안에 성령이 거한다는 것은, 우리 몸이 성전이라는 뜻이 된다. 바울은 바로 이 점을 직접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III.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곳
1. 개요
제사와 예배에 대해서 이야기가 어느 정도 진행되었을 때, 우리는 이 글의 본 주제로 넘어갈 수 있다. 예배는 오직 물리적 건물인 교회에서만 드릴 수 있는 것인지. 또, 유튜브나 온라인을 통한 예배 혹은 가정 예배는 불가한 것일까? 이미 앞선 제사와 예배에 대한 설명을 잘 이해했다면, 다른 구체적 설명이 필요 없지만 논의를 계속 이어가 보자. 앞서 구약의 성막과 성전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것에 기반했을 때, 주의 영이 있는 곳에서 예배는 가능하다. 그렇다면, 간단하다. 어디가 주의 영이 있는 곳이라는 말인가? 앞서 이야기 한 바를 정리해보자.
2.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장소
1) 두 세 사람이 모인 곳
예수님이 자신의 십자가 죽음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자 제자들의 질문 세례가 이어진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이어진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2-3명의 사람이 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자신이 함께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소위 '가정예배'를 드릴 수 있다. 가정예배에서는 2-3 명의 사람이 최소한 모이기 때문이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 18:19-20)
2) 교회
바로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의 대표적인 장소가 '교회'라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렸던 마가의 다락방이 첫 교회의 모습이었고, 나아가 우리는 신약에서 소위 '에클레시아'라고 불리는 초대교회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그 모습은 마치 오늘날 우리네 교회와 동일하게 엉망진창이지만, 공통적으로 여러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모였다는 것이 주요한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다.
3) 어디에서나
하지만, 사실 그리스도인이라면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곳은 '어디에서나'가 맞다. 이는 제사와 예배 그리고 십자가 사건을 제대로 이해했을 때에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 바울은 우리 몸이 성전임을 이야기한다. 처음부터 우리 몸이 성전이었는가? 그렇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 우리 몸은 성전이 되었다. 그 이유는, '성령'이 거하는 장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정말 믿으시는가? 그럼, 우리는 세상 그 어디에서나 예배드릴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닌가? 주의 영이 임하시는 곳에서 예배는 가능하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 3:16)
3. 소결
"나 어제 토익시험 보느라 교회 못 갔잖아, 어떡해.. 너무 죄책감이 들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의 반응은 늘 똑같다. 그 친구에게 되묻는 것이다. 왜 죄책감이 드냐고 말이다. 그러면, 십중팔구는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주일성수'라는 이름으로 교회 건물에 반드시 실체적으로 참석해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어온 사실이 드러난다. 정말 그러한가? 짧게 정리했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교회에서 함께 예배드리는 것은 너무나 복된 일이고, 좋은 일이며, 안전하고 올바르게 예배드릴 수 있는 모범적인 장소 선택이지만, 반드시 이곳에서만 예배드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교회 말고도, 두 세 사람이 예수 그리스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서, 그리고 우리 몸이 성전이기 때문에 그 어디에서나 예배는 가능하다. 구약시대에는 절대 그렇지 아니했다. 반드시 제사장이 있는 '성막' 혹은 '성전'에 실체적으로 참석했어야만 했다. 왜 바뀌었는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IV. 결어: 교회가 나아가야 할 길
모든 상황이 좋고, 행복할 때에는 우리의 약한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 모습을 드러낼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려움이 닥쳐오고 위기가 엄습할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약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이번 코로나 19 바이러스는 전 세계에게 위기이며 큰 어려움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에서는 특히 '종교'와 '교회'에 큰 위기로 부상했다. 그래서 종교와 교회의 약한 모습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예수라는 청년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말했다. 우리의 가장 약한 모습이 드러나는 지금,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종교와 교회를 새롭게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빛과 소금이 되는 길을 걸어갈 수 있을까?
한 기독 언론은 코로나 19 바이러스로 인한 현 상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교인들과 국민들의 건강을 염려하고, 국가의 시책에 협조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중단하는 것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고 본다”며 “어떤 사건이 있을 때마다 교회를 폐쇄하고 예배를 중단하는 것으로 결론을 맺는 방향으로 간다면, 교회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가? 교회 나름대로 철저하게 방역을 하고, 성도들도 개인 청결을 한가운데서 예배를 드려야 되지 않겠는가?”
“우한 폐렴의 확산을 염두에 두고, 외부의 압력이 들어오면서, 교회들이 주일 예배를 폐쇄하는 일들이 늘어나고 있는데 그러나 교회가 예배를 폐쇄한다고 우한 폐렴이 확실히 잡힌다면 몰라도, 현재 온갖 여러 사회 활동들이 이루지고 있는 상황에서, 예배 중단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은, 우한 폐렴 확산 저지에는 미흡하다고 본다”며 “완전히 봉쇄하려면 교회의 예배보다, 비교할 수 없이 위험한 전철 운행을 금지하고, 버스, 택시의 운행도 멈추어야 할 것이 아닌가?”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해당 언론에게 유튜브로 대표되는 '온라인 예배' 형식은 예배로 인식되지 않았다. 그러한가? 우리의 예배는 오직 건축된 교회의 건물 안에서만 드릴 수 있는 것일까?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지 2000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 '예배'가 아닌 '제사'를 드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더 이상 양을 죽여서 그 피를 통해 죄를 사함 받지 않는 것도, 레위 지파 출신의 제사장이 없어도 에배를 드릴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더이상 제사가 아닌 예배를 드리기 때문이다.
많은 크고 작은 교회들은 각각 온라인과 가정예배와 같은 형식을 통해 이러한 위기를 극복해나가고 있다. 이는 예배 중단이 아닌, 언제든 선택할 수 있는 다른 장소에서의 예배다. 교회 건물에서 파이프 오르간 연주를 들으면서 드리는 예배와, 노트북 앞에 앉아서 드리는 예배는 동일하다. 교회에서 떡과 포도주를 마시며 드리는 예배와, 병상에 누워 아픈 몸을 이끌고 라디오를 통해 드리는 예배는 동일하다.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기쁨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지만, 때와 상황에 맞게 우리는 그 기쁨을 잠시 뒤로 놓을 수 있다. 인터넷 예배도 진정한 예배이다. 우리가 이러한 허물 뿐인 예배 논쟁에서 벗어나, 진짜 예수가 말했던 싸움을 했으면 좋겠다. 바로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는 그런 싸움 말이다. 나부터 그러한 길로 걸어가길 진심으로 소망 한다.
끝으로 최더함 박사의 짧은 글을 덧붙인다. 본 글과 조금은 다른 관점에서 그는 하이델베르그 교리분답 제103문답을 인용하며, 주일성수의 중요성을 '목숨을 지키는 것과 같은 일'이라며 강조한다. 그러나, 그는 현 상황을 '비상시국'으로 인식하여 이에 대한 예외적 조치가 필요함을 말한다. 그의 교회는 인터넷 예배를 드리며, 마스크를 구입하여 지역 주민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제103문답은 “안식일 날인 주일에 교회에 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례에 참석하며 주님에게 공적으로 기도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일”을 하나님이 명령한다고 고백한다. 특히 개혁파 교회에게 있어서 주일성수는 목숨을 지키는 것과 같은 일이다.
(중략)
단, 지금은 비상시국이다.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존재로서 세상의 치유자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누구보다 국가의 일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헌신 봉사해야 한다. 주일예배를 함께 모여 드리는 일만큼 국가적 재난을 해결하기 위해 앞장서는 일도 중요하다. 역사적으로 교회는 국가의 위기에 절대로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엔 3.1 만세운동을 비롯한 애국애족 독립운동을 주도했고, 6.25 전쟁 때엔 총을 들고 괴뢰군에 맞서 싸웠다. 서해안 기름 사태 때엔 전교회가 다투어 봉사함으로써 앞으로 30년간은 폐허의 땅이 될 것이라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불과 3년 만에 기적 같은 해안회복을 이루어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