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들
1.
시체처럼 살아간 며칠이었다. '돈을 주고 건강을 살 수 있다면 억만금이라도 내겠다'던 어느 노인의 말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던 시간. 아침에는 시간이 왜 흘러 또 해를 뜨게 만드는지 원망스러웠다. 낮에는 기어코 돈을 벌어야 하겠다며 둥지를 벗어났지만 나는 도로를 기어다닐 뿐이었다. 저녁에는 주검처럼 살아 돌아와 땀에 흠뻑 젖어있는 침대에 쓰러졌다. 나는 죽어있었다.
뱃속에서 거대한 얼음덩이가 자라나는 느낌이었다. 아플 만큼 차가웠던 건지 차가울 만큼 아팠던 건지는 모르겠다. 베란다 불만을 은은하게 켜두고 지낸 내게 '끙끙 앓았다'라는 표현이 아주 적합했다. 그야말로 '끙끙'소리를 내며 뒤척였던 밤은 나의 시간감각을 뭉갰다. 어차피 모두 아픈 시간일 테니 나에게는 시각의 구분은 무의미했다.
이마를 타고 들어오는 베란다 불빛이 서늘했다. 평소에는 초록빛 이중창에 부서져 들어와 적당하다며 좋아했던 불빛이었다. 지난 며칠간은 불 꺼진 병동의 비상구 불빛처럼 느껴졌다. 영안실처럼 차가운 불빛이 비치던 밤, 하필 빨래마저 밀려 해버린 탓에 나의 비좁은 원룸 안에는 빨랫대까지 펼쳐져 있었다. 며칠을 내리 누워있기만 했던 탓에 침대보는 땀에 절어 축축했고, 잠옷은 갈아입기도 힘겨워 며칠을 내리 입었더니 쩐내가 났다. 겨우 차려먹었던 밥그릇은 며칠째 치워질 일 없이 앉은뱅이 식탁에 말라붙어 있었다. 설거지도 않고 벌써 며칠째 저 그릇에 밥을 먹었는지도 모르겠다. '폐인의 삶을 재현한다면 꼭 지금 같으리라.'그런 생각이 들었다.
눈을 감으면 뱃속에 꿀렁이는 얼음덩이가 느껴졌고, 눈을 뜨면 돼지우리만도 못한 집구석이 눈에 들어왔다. 집중력도 의지도 사라져서 생산적인 무언가, 하다못해 청소에라도 몰두할 자신이 없었다. 자폐적으로 게임만을 했다. 인생은 살아가는 게 아니라 죽어가는 거라던데, 이런 날이 반복된다면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의인지 타의인지 파악할 힘조차 없이 다가온 죽음에 내 기분은 걷잡을 수 없이 우울해졌다.
2.
죽어가듯 아팠던 어느 밤에 꿈을 꾸었다. 내가 사랑했던, 지금은 사랑할 수 없어진 사람들이 모두 나와 뛰노는 꿈이었다. 절친했던 친구, 결혼도 생각했던 사랑, 고마웠던 인연, 애증의 관계, 모두가 나와 웃으며 대화했다. 그들과의 즐거웠던 때가 새로이 재현되어 마치 지금의 현실에서도 그들을 만난 것만 같았다. 눈을 뜨자 꿈에 그리던 봄 동산은 온데간데없었고, 나는 돼지우리에 있었다. 더러워진 나를 발견했을 때 나는 미뤄둔 슬픔을 몰아서 찾아왔다. 너무 바삐 이별하느라 미처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했던 관계들이 새해부터 아픈 나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아파서 끙끙대는 밤에 어째서 건강이 아닌 아쉬운 관계가 떠올랐을까.
사람은 늘 자신에게 없는 것을 갈구한다. 선은 악의 담대함을 부러워하고 물고기는 새의 자유로움을 선망한다. 기억을 잃어가는 노인이 자신의 작은 숟가락에 집착하는 것처럼, 욕심이란 제 것을 잃었을 때 더욱 두드러지기 마련이다. 나는 평소 무리 없이 쥐고 있던 건강을 잃자 내게 없는 것에 대한 갈증을 더 크게 느끼고 말았다. 나는 불행을 얻자 행복을 찾았다. 내게 없는 수많은 것들 중 내가 가졌던 것, 그 온기와 사랑을 가장 잘 알고 있던 것, 온전한 나만의 것, 그들과 나 사이의 행복했던 기억이다.
잔인할 만큼 달콤한 찰나의 꿈 때문에 돌아와버린 현실이 더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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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되었는데, 펄럭이며 날아다니는 나비가 진실로 기뻐 제 뜻에 맞았더라! (그래서 자신이) 장자임을 알지 못했다.
(그런데) 갑작스레 깨고 보니, 곧 놀랍게도 장자였다.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가, 나비가 꿈에 장자가 된 것인가? 장자와 나비 사이에는, 틀림없이 구분이 있는 것인데.
이를 일컬어 '물物이 되었다'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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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의 꿈을 꾼 장자는 슬프지 않았을까. 나비가 되어 근심 없이 하늘을 날았던 기억을 품고 다시 두 다리가 뻗어 인간이 된 장자는 꿈이 원망스럽지 않았을까. 근심의 굴레에 빠져 쉬어도 휴식을 누리지 못하는 존재가, 발전 가능성의 앎이라는 지식의 저주를 받은 존재가, 잠시나마 망각의 축복을 받았던 기억이 원망스럽지 않았을까. 나는 원망스러웠다. 꿈의 신이 있다면 묻고 싶다. 왜 내게 불가능한 꿈의 달콤함을 알려주었는가.
3.
속앓이로 인한 두통까지 생겨 병원을 찾던 길, 한때 더없이 친했고 지금은 세상에서 가장 증오하는 이를 마주쳤다. 내가 가장 빛났던 시절에 나와 함께해 주었고 내가 가장 어두웠던 시절에 나를 저버렸던 가증스러운 놈. 재미있는 점은 내가 그의 애인과 외따로 친분이 생겼다는 점이다. 교양 수업 같은 조로 인연을 터서는 간간이 연락을 하는 사이가 된 사람. 매력적이었던 그 사람이 내가 증오하는 남자의 애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는 나 말고 아무도 알 수 없으리.
그놈과 나는 서로를 인식했지만 절대 의식하지 않았다. 한순간의 눈길조차 통하지 않고도 그놈과 나는 서로를 자로 잰 듯 말끔하게 도려냈다. 내가 먼저 들어앉은 버스 정류장에 그들은 들어오지 않았고, 나는 병원 시간이 임박했음에도 목전에서 버스를 흘려보냈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했나, 절대적으로 친밀한 사이와 극도로 혐오하는 사이는 말하지 않고도 서로의 행동이 예측된다.
나의 호접지몽에 그놈이 등장했다는 사실은 끔찍이도 개탄스러운 일이었다. 꿈에서 교복을 입던 그때 그놈과 즐거웠던 기억이 재현되었다. 침침한 어둠 속에서 내가 아련함 다음으로 느낀 감정은 분개였다. 힘들 때 나를 걷어찬 놈을 그리워했다는 치욕에 불쾌해진 나는 축축한 침대, 그 침대를 벗어나지 못하는 병약한 내 몸뚱어리가 한층 더 싫었었다.
꿈에는 전 일터에서 나를 괴롭게 했던 이도 나왔다. 나를 괴롭게 했던 만큼 성장시켜 주었던, 나를 성장시켰던 만큼 내게 많은 일거리를 주었던, 결과적으로 내게 커다란 성취감과 그에 전혀 따르지 않는 동일한 보상을 주었던 전 직장 상사.
내가 그들을 그리워했다는 사실은 다소 멀쩡해진 지금에 와서도 격분할 일이지만, 하나 확실한 건 그 때로 돌아가면 나는 다시금 행복해질 것이라는 점이다. 그 시간선의 나와 그대는 행복했고 나는 그 시절을 피카레스크처럼 관망할 뿐이다.
4.
행복이란 무엇이기에 나는 원망하면서도 상처를 회상할까. 돌이켜보면 아무 생각 없이 투니버스를 볼 수 있었던 시절이 가장 행복했던 것 같다. 지금보다 아득히 멍청했던 시절, 나는 근심과 걱정이라는 저주에 옮아버리기 전의 나를 그리워한다. 여름, 땀방울, 시원한 물, 아이스크림, 선선한 고물 선풍기의 바람, 케로로 중사. 기껏해야 저녁 밥상에 고기가 없을까 하는 염려가 전부이던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 지금의 나는 근심과 걱정의 저주가 씌어버렸다. 나 역시 옆집 철수만큼 발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나 역시 옆 나라 기업가와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아버린 나. 무차별적으로 살포된 정보에 깔아뭉개진 나는 숨을 쉬기가 퍽 벅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