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소중국에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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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Q는 가족도 없고 집도 없어 마을 사당에서 살면서 날품팔이로 먹고살지만 돈이 생길 때마다 술과 노름으로 탕진하는 인간이다. 체구도 볼품없었던 아Q는 머리에 충혈된 부스럼이 있었고, 그 부스럼을 아주 부끄러워했다. 건달들은 그런 아Q를 놀려댔다. 아Q는 건달들에게 대들다가 얻어맞는데,
"나는 자식에게 맞은 셈 치자… 요즘 세상은 정말 개판이야……."
라고 생각하며 정신승리를 하고 만족하여 의기양양하게 돌아가곤 하는 인간이었다.
아Q는 자기가 쓰고 있는 정신승리법을 제 입으로 자랑하듯 이야기하고 다니는 인간이었다. 그 얘기를 전해 들은 건달은 어이가 없어서 아Q를 구타하며 아Q 자신의 입으로 정신승리법을 부정하도록 위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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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Q, 이건 자식이 애비를 때리는 게 아니라 사람이 짐승을 때리는 거다. 네 입으로 말해봐! 사람이 짐승을 때린다고!"
"벌레를 때린다, 됐지? 나는 벌레 같은 놈이다…… 이제 놔 줘!"
<아Q정전>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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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Q는 그 자리에서는 자신의 정신승리법을 부정했으나, 돌아서자마자 그 치욕을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정신승리법을 만들어 낸다. 아Q는 자기가 '자기 경멸을 잘하는 제 일인자'라고 생각했다. '자기 경멸'이라는 말을 빼고 나면 남는 것은 '제 일인자'이다. 장원 급제 한 엘리트도 일인자이고 자신도 자기 경멸의 일인자이므로 자신은 엘리트라는 발상이다.
+ '정신승리'라는 말은 아Q정전에서 가장 처음 나오는 정신승리법을 뜻하는 의미로 자주 쓰인다. 이는 아Q의 수많은 정신승리법의 일부 중 일부에 불과하고, 정신승리법이 깨질 때마다 새로운 정신승리법을 만들어서 덧대는 것이 아Q정전의 백미다. 아Q가 축제의 노름판에서 드물게 돈을 크게 땄을 때, 싸움통에 돈을 도둑맞자 자기 뺨을 후려치고 난 후 그것으로 정신승리를 하는 아래의 문장에서 잘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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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는 금세 패배를 승리로 바꾸어놓았다. 그는 오른손을 들어 자기 뺨을 힘껏 연달아 두 번 때렸다. 얼얼하게 아팠다. 때리고 나서 마음을 가라앉히자 때린 것이 자기라면 맞은 것은 또 하나의 자기인 것 같았고, 잠시 후에는 자기가 남을 때린 것 같았으므로―비록 아직도 얼얼하기는 했지만―만족해하며 의기양양하게 드러누웠다.
<아Q정전> 본문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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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Q는 무고한 약자인 비구니를 성희롱하는 인간이었다. 사람들이 그 행태를 비웃자 그들이 자신의 강하고 멋진 모습을 보고 환호하는 거라며 우쭐거리는 족속이었다. 아Q는 주제도 모르고 동네 부자인 조씨 집 식모에게 들이대지만, 들켜서 신나게 매질을 당하고 마을 사람들도 왕따로 전락하고 말았다.
결국 아Q는 살던 마을을 떠나 큰 성으로 들어갔다. 한동안 보이지 않던 아Q는 명절 직후에 큰 부자가 되어 돌아왔다. 그는 중고지만 쓸만한 옷가지들까지 가져왔고, 때문에 아Q는 사람들이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되었다. 사람들이 어떻게 성공했는지를 묻자 아Q는 그 일대에서 유일무이한 명성을 지닌 위인 '거인'의 집에서 일했다고 말한다. 거인과의 접점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아Q는 존경을 잠시 받지만, 그가 실제로는 좀도둑들의 망을 봐주고 돈을 벌었다는 사실이 들통나자 그는 다시 멸시를 받는 신세로 전락한다.
이후 신해혁명이 일어난다. 부자들이 척살당하는 시기, 소문의 '거인'마저 혁명당을 피해 마을로 도망을 온다. 아Q는 본디 혁명당을 매우 미워했으나, 그 대단한 거인 영감마저 혁명당을 두려워하자 아Q는 스스로를 혁명당이라 칭하기 시작한다. 자칭 혁명당 행세에 마을 사람들에게 아Q는 잠시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으나, 아Q는 진짜 혁명당 입당이 거부되고 알량한 권력을 잃는다.
아Q는 어느 날 절도에 억울하게 연루되어 체포되는데, 그는 감옥에 간 자신을 '그럴 수도 있지'라고 정신승리하며 변호조차 하지 않는다. 그 태도에 아Q가 절도범이라 확신한 관청은 아Q에게 '내가 절도범이다'라고 적힌 서류에 서명을 지시하고, 아Q는 무슨 뜻인지 알지도 못한 채 생전 처음 잡아본 붓으로 동그라미를 그린다.
아Q는 당연히 사형 집행을 위해 묶인 채로 광장으로 끌려나간다. 그러나 아Q는 '사람이 살다 보면 목 한 번쯤은 잘릴 수 있지'라는 정신승리에 빠져있다. 아Q는 불안한 와중에도 구경하던 마을 사람들 속에서 자신이 추파를 던졌던 조 씨네 식모를 보자 안심하고 노래를 부르며 허장성세를 부리지만, 구경꾼들의 이리 같은 눈길을 보고 그제야 무언가가 단단히 잘못됐음을 직감한다.
결국 아Q는 마을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총살형을 당한다. 아Q는 유언이랍시고 "살려줍쇼...!!"라고 말하나, 이마저도 입으로만 웅얼거렸을 뿐 제대로 내뱉지 못했다. 아Q가 죽고 나자, 구경꾼들은 '잘못한 게 있으니까 총살을 당한 것'이라느니, '재미없게 노래 한 곡도 하지 않고 총살이나 당했'다느니, 비난을 일삼다가 흩어진다.
아Q를 비웃던 마을 주민들은 아Q가 사망한 뒤 저마다의 몰락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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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에서 '중국인'이라는 단어는 욕이다. 교양 없고, 돈을 밝히며, 법과 도덕을 무시하고, 떼를 지어 행패를 부리며, 타인에 대한 무시를 갖고 있는 데다가, 어디에서나 보일 정도로 널리 퍼져 해악을 끼치는 족속, 그 언저리의 의미. 이는 비단 한국뿐만이 아니다. 중국인 혐오 단어는 어느 민족의 비하 단어보다 광범위하고, 꾸준하게 있었으며, 새로 생겨나고 있기까지 하다. 최근에는 미국에서 '빙칠링'이라는 새로운 중국인 혐오 단어가 생겨났다.
혐오는 힘이 많이 들어가는 감정이기에, 대상에 대한 깊은 이해와 관심을 갖고 있지 않고서는 품을 수 없다. 때문에 나는 혐오를 사랑의 하위 범주로 본다. 우리가 중국인을 혐오한다는 뜻은, 우리가 그만큼 중국인에 대한 관심이 높고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왜 중국인에 대한 관심과 이해를 가지고 있는가? 혐중을 가진 이들 대부분은 중국인과의 접점이 없을 텐데, 왜 그들과 우리는 중국인을 혐오하는가? 우리는 그 이유를 <아Q정전>이 사랑받는 맥락에서 찾을 수 있다.
<아Q정전>은 유서 깊은 '중국인 까는 책'이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100년도 더 지난 1921년 중국 작가 루쉰의 손으로 쓰인 이 책은, '아Q'라는 인물에 빗대어 당시의 중국인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루쉰이 '아Q'를 통해 비춘 중국인이란 무능해서 패배만을 반복하고, 현실 자각 능력마저 바닥이라 능력을 키울 생각도 않고, 쓸데없는 자존심만 강해 정신승리나 하며, 썩어빠진 전통과 허례허식에 찌든 데다가 부패했고, 조그만 성공에도 거만해지며, 남 탓과 시기와 질투가 가득하고, 자정능력이 없다. 루쉰은 이를 한 단어로 정리하여 중국인의 '노예근성'이라고 했다.
100년 전부터 중국인을 까는 이 책은 고전으로 추대 받으며 지금까지 우리에게 읽히고 있다. 그저 중국인이 중국인을 욕하는 책이 왜 지금까지, 그것도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을까?
우리가 '나'라는 개인의 일상에 큰 해악을 끼치지 않는 중국인을 혐오하는 이유는, 우리가 <아Q정전>을 지금까지 읽는 이유는, 우리가 중국인의 행태에서 스스로를 보았기 때문이다. 루쉰의 말마따나 중국인은 노예근성이 가득한 혐오스러운 족속이다. 그러나, 그 모습이 '중국인만의'모습은 아니다. 우리는 모두 가슴속에 하나 이상의 '중국인 같은'모습이 있다. 니체는 말했다.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면 그 심연 또한 나를 들여다본다."라고. 우리가 혐오하는 중국인의 모습은 우리의 심연이다.
나 역시 패배와 굴욕을 수없이 반복하는 삶을 산다. 사랑에 꿈에 도전에 실패하고,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게 셀 수 없이 많다.
나 역시 현실 자각 능력 바닥에 능력 키울 생각을 하지 못한다. 치기 어린 자신감만 품고 오만하게 드러누운 날이 잦다.
나 역시 쓸데없는 자존심으로 정신승리를 한다. 앞서 나열한 실패에 상처받지 않으려 자위하고 정신으로만 승리한다.
나 역시 부패했다. 알량한 권력을 지녔을 때 내가 남근처럼 휘두른 권위가 떠오를 때마다 부끄러워 숨고만 싶다.
나 역시 조그만 성공에도 거만해진다. 고작 교내 공모전에서 수상했다고 코가 하늘을 찔렀다.
나 역시 남 탓 시기 질투가 가득하다. 그저 티 내지 않으려 늘 안간힘을 쓸 뿐이다.
나 역시 이 모든 흠결을 알고 있으면서 자정하고 극복하려 하지 않는다.
나 역시 노예근성이 있다.
나 역시 중국인이다.
너 역시.
<아Q정전>은 루쉰이 1910~20년 당시의 중국인을 비판 위해 쓴 책이다. 1911년 청 말기에 망조가 들자 일어나 청 왕조로부터의 독립까지 이어진 '신해혁명', 루쉰은 거대한 목표를 달성한 직후 중국에 퍼진 패배주의와 무기력함을 계몽하고자 했다. 당시의 중국인은 중국인 스스로가 신랄하게 비판할 정도로 최하의 인간 군상을 보여줬다.
이는 '중국인'이라는 족속이 저열했기 때문에 벌어진 모습이 아니다. 그저 인간이기에 펼쳐진 인간 군상이었다. 인간이란 치열하게 고민하고 노력하지 않으면 한순간에 무너진다. 우리는 무너진 스스로의 모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한순간에 너무도 쉽게 무너져 자기혐오에 빠질 정도로 한심했던 나 자신. 우리는 루쉰이 비판한 중국인에게서 그때의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그 모습을 정확하고, 정확해서 화가 날 만큼 명확하게 집어냈기에 100년 전의 텍스트가 여전히 살아있는 것이다.
한국인의 자조적인 혐오 단어 중 '소중국'이라는 단어가 있다. 한국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한국을 중국과 비교할 때 쓰이며, '한국은 중국과 동일한 수준이나, 그 크기가 작아 중국만큼 티 나지 않을 뿐이다.'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유사 용어로는 '리틀 차이나', '중화인민공화국 남조선성', '리틀 짱깨', '소짱깨'등이 있다. 한국인 혐오와 중국인 혐오를 동시에 할 수 있는 용어이므로 어디에서도 사용되지 않길 바라지만, 지금도 자국 혐오 성향이 짙은 한국의 커뮤니티들에서는 심심찮게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단어에서 엿볼 수 있듯 우리는 스스로를 중국인에 빗대곤 한다. 중국인을 부정적 이미지의 객관적 상관물로 사용하는 요즘,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서 저열한 면모를 엿보며 늘 자아비판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한국인은, 더 나아가서 우리 모두는 <아Q정전>을 읽으면서 우리 안의 작은 중국인을 엿본다. 이를 끊임없이 경계하는 일이 <아Q정전>의 의미일 것이다.
끝으로 '중국인'이라는 단어를 모욕으로 사용한 이 글에 상처받을 분들께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올린다. 민족을 이유로 어떠한 이들을 싸잡아 욕하는 행태는 자칫 전체주의로 빠질 수 있는 아주 저열한 행위이다. '중국인'이라는 단어의 시대상 맥락, <아Q정전>에서 다루고 있는 맥락을 짚기 위함이었다고 하더라도 중국인에 대한 혐오 발언을 한 일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필자의 능력이 모자라 해당 부분을 극복하지 못하였다고 보아주시면 감사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