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도비만의 게이와 그의 딸이 살아가는 방식

영화 <더 웨일>을 보고

by 연만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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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손으로 떨어진 열쇠 하나 집지 못할 정도로 살이 찐 남자가 안간힘을 쓰며 소파를 비집고 일어선다. 지방이 껍질처럼 굳어진 팔이 휘청인다.


그 작은 움직임으로도 남자는 겨드랑이와 목덜미를 흠뻑 적셔가며 비명을 지른다. 그가 바라보는 곳, 활짝 열린 문에서 쏟아지는 빛을 맞는 그의 딸이 있는 곳, 어찌할 줄을 몰라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있는 딸이 있는 곳으로, 그는 나아간다.


한발 내디디면 나무로 된 마루가 온통 삐걱이고, 또 한발 내디디면 온 집안이 쿠직쿵 울린다. 그럼에도 그는 딸을 향해 나아간다. 한발, 한발. 이윽고 그는 이렇게 살이 찌지 않았던 때를 회상하며, 아직 딸과 가족이었던 때를 회상하며, 자신의 발에 껍질이 없던 때처럼 걸어가며, 눈을 번쩍 뜨고는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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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웨일>의 마지막 장면이다. 딸에게 걸어간 남자의 이름은 찰리. 게이이며, 딸이 있고, 272kg이며, 비만 합병증으로 곧 죽을 인물이었다.


또한 그의 통장에는 12만 달러(한화로 1억 5천 정도)가 있다. 그가 그 많은 돈을 들고도 살에 파묻혀 죽어야 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가 딸을 향해 걸어가다가 죽어야 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영화는 게이 포르노를 보다가 심부전으로 위험해진 찰리의 집에 우연히 사이비 선교사가 찾아와 도움을 주게 되며 시작한다. 음경의 자극을 통한 쾌락 때문이 아닌, 자신을 파묻을 정도로 찐 살 때문에 심부전이 와버려서 비명을 지르는 찰리. 사이비 선교사 ‘토마스’는 선교차 우연히 방문한 집에서 거구의 남자가 죽어가는 것을 보고는, 별안간 그의 책상 위에 놓인 에세이를 읽어달라고 하는 요청을 받는다. 도움을 줘야 할지 어쩔지 우물쭈물하다가,

“당장 죽을 것 같아서 마지막으로 들으려고요.”

라는 찰리의 말을 듣고 종이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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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먼 멜빌이 쓴 걸작 <모비 딕>은 저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책의 초반부엔 작중 화자인 이스마엘이 작은 어촌에서 퀴퀘크라는 남자와 한 침대에 누워있다. 이스마엘과 퀴퀘크는 교회에 갔다가 배를 타고 출항하는데 선장은 해적인 애이해브다. 그는 다리 하나가 없고 어떤 고래에게 앙심을 품고 있다. 고래의 이름은 모비 딕, 백고래다.


내용이 전개되면서 애이해브는 많은 난관에 직면한다. 그는 평생을 그 고래를 죽이는 데 바친다. 안타까운 일이다. 고래는 감정이 없기 때문이다. 자길 죽이려는 애이해브의 집착도 모른다. 그저 불쌍하고 큰 짐승일 뿐.

애이해브도 참 가엾다. 그 고래만 죽이면 삶이 나아지리라 믿지만 실상은 그에게 아무 도움이 안 될 테니까.

난 이 책이 너무 슬펐고 인물들에게 다양한 감정을 느꼈다. 고래 묘사만 잔뜩 있는 챕터들이 유독 슬펐다. 자신의 넋두리에 지친 독자들을 위한 배려인 걸 아니까.

이 책을 읽으며 내 삶을 생각하게 됐다. 그리고 다행이라는 생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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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모비 딕>을 읽고 쓴듯한 에세이, 이를 들으며 찰리는 진정이 된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찰리에게 토마스는 성경을 들이밀며 구원을 읊고 선교를 시도한다.

하지만 찰리는 구원에는 관심이 없다며 토마스에게 손사래를 치고, 그때 마침 찰리의 간병인이자 친구인 ‘리즈’가 찰리의 집 문을 열고 들어온다. 리즈는 왜인지 토마스가 읊는 구원에 치를 떨고 당장 여기서 꺼지라는 이야기를 한다. 이윽고 찰리는 죽음을 직감한 듯, 9년 동안 연락 한 번 하지 않았던 딸에게 연락을 한다.


그렇게 집에 찾아온 딸 ‘엘리’는 역겨워 죽겠다는 눈으로 찰리를 대하며 당장에라도 집을 떠나려고 하다가, 12만 달러를 주겠다는 찰리의 말에 발길을 머무르게 되는데...

초고도비만으로 곧 죽게 되며 그간 글쓰기 강의로 돈을 벌어온 ‘찰리’, 그가 어느 여성과 9년 전 이혼한 뒤 처음 마주하는 딸 ‘엘리’, 찰리 전 남자친구의 애인이자 찰리의 간병인이 된 애증의 관계 ‘리즈’, 불청객처럼 찾아오는 사이비 선교사 ‘토마스’. 아픔으로 얼룩진 이들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 것이 이 영화, <더 웨일>의 내용이다.

앞선 <모비 딕>의 감상은 엘리가 썼던 에세이다.

찰리에게

“당신은 역겨워. 겉모습 때문이 아니야. 제자와 붙어먹고 싶어서 8살짜리 딸을 벌고 떠난 쓰레기라고.”

토마스에게

“내가 종교가 마음에 드는 점은 모두를 바보로 본다는 거야. 스스로 구원도 하지 못하는 바보로 보잖아. 근데 종교가 거지 같은 점은 예수든 뭐든 믿으면 갑자기 자기가 더 나은 사람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같은 날 선 시선으로 세상을 대하는 엘리가 쓴 글이다. 찰리가 삶의 마지막 순간에 유서처럼 읽고 스러지고 싶어 했던 글이, 찰리가 내내 최고의 글이라고 극찬했던 글이 이 글이었다.



찰리가 이 글을 최고의 에세이라 꼽았던 이유는 단 한 가지, ‘솔직함’이었다. 무엇보다 솔직했기에 최고의 에세이라 부를 수 있었던 것. 찰리의 솔직함 예찬은 위 에세이에만 나타나지 않는다. 감정의 동요를 이기지 못해 폭식증이 찾아왔을 때, 자신의 강의를 수강 중인 학생들에게 그는 메일로써 전한다.

‘내 제자들에게 전한다. 글을 잘 쓰는 법이라든지, 문장이라든지, 그딴 것은 아무 필요 없다. 그저 솔직하게 쓰란 말이야. 가장 좋은 에세이는 솔직한 것이야.’

무릇 사람이란 자신에게 없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두는 법이다. 키가 작은 이에게는 큰 키가 최고의 동경 대상이고, 돈이 없는 이에게는 부가 최고의 가치다. 찰리에게는 그 가치가 ‘솔직함’이었다.

찰리는 죽는 그 순간까지도 솔직하지 못했다. 그는 게이였으나 ‘아이를 갖고 싶다’는 이유로 전 아내와 결혼해 딸 엘리를 낳았다.


찰리는 글쓰기 수업으로 번 돈 1억 5천만 원이 있었음에도 늘 돈이 없다는 핑계로 자신의 비만을 치료하려 하지 않았다.


찰리는 음식을 먹고 싶어서 먹은 것이 아니었음에도, 사랑하는 애인의 죽음이 슬퍼 억누르기 위한 행위였음에도 게걸스레 음식을 먹었다.


찰리는 엘리를 사랑했음에도 8년간 연락을 하지 않았다. 찰리는 엘리를 사랑했음에도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했다.

찰리는 평생 솔직하지 못했기에 솔직함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았고, 솔직했던 엘리의 에세이를 최고의 글이라 여겼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찰리의 마지막은 숭고하게 여겨진다. 찰리는 그 마지막 순간에서야 비로소 솔직해질 수 있었다. 자신의 경멸스러운 살집을 이겨내고 일어서서, 떠나왔지만 보기 싫은 것은 아니었던 딸 엘리를 향해 걸어간다. 그리고 비로소, 살아야만 한다는 그 거짓을 떠나 죽음으로 따라 들어간다.


나는 이 영화를 ‘솔직함의 예찬’이라 보고 싶다. 그 어느 순간도 솔직하지 못했던 이들이 솔직해지고서야 비로소 행복해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쩌면 모두가 모두에게 솔직하지 못하다. 이를 페르소나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합리화하고 있지만, 우리 내면에는 모두 솔직해지고픈 욕망이 있다. 누군가는 진정한 나를 알아줬으면 하고, 진정한 나를 사랑하는 진실한 사랑을 하고 싶어 하고, 나약하고 비겁하고 더러운 나를 드러내고 싶어 한다. 단, 어떠한 리스크도 지지 않고. 그럴 수 없으니 우리는 나를 드러내지 못한다.

영화의 제목 ‘The Whale'은 영어로 뚱뚱한 사람을 얕잡아 부르는 말이다. 번역하면 ‘뚱보’ 정도가 될까. 뚱보를 뚱보라 부르고 싶지만 그래서는 안된다. 뚱보처럼 마구마구 먹어대고 싶지만 그래서는 안된다. 뚱보처럼 앉아만 누워만 있고 싶지만 그래서는 안된다.

뚱보를 뚱보라 부르는 건 혐오이기에 그래서는 안된다고. 마구마구 음식을 먹어대서 살이 찌면 보기 흉하기에 안된다고. 누워서만 앉아서만 지내고 싶지만 게으름은 무가치하기에 안된다고. 그렇게 내밀한 욕망을 숨기고 숨기고 숨긴 채로 살아간다.

어쩌면 뚱보의 솔직함 예찬은, 그런 우리를 신랄하게 비웃는 것이 아닐까. 솔직함으로써 구원받는 찰리를 통해, 제약 속에서만 살아가다가 진정 내가 원하는 바를 알지도 못하게 되어버린 우리를 꼬집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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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해지라는 거짓말쟁이의 고백.​

<더 웨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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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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