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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min lee Oct 25. 2015

먹고 사는 것

먹고 사는 것

                                                               이 영 민

돌아가신 아버지는 생전에  '사람이 사는데 제일 중요한 것은 먹고 사는데 있다' 라고 하셨다.  과일나무 아래 떨어진 잘익었지만 썩은 과일보다는 나무에 달린 싱싱한 과일을 따서 먹을 줄 알아야 한다고.   나는 가끔 생각해 본다.  그 말씀을 잘듣고 살아왔는지.  그저 쉬운게 편해서 떨어진 과일을 주워먹고 살아왔지는 않은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가끔 과일을 주워먹기는 했지만 그맛에 반해 싱싱한 과일을 먹으려고 나무를 타는 방법을 익히고 아주 높은 곳의 햇살을 듬뿍받은 과일은 아니지만, 싱싱한 과일을 먹었던 것 같더라고.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그저 쉬운 것, 편한 것을 찾게 되는게 세상의 이치, 진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로인해 꿈도 잃고 이상도 잃고 사는게 아닌지 혼란스러울 때도 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내가 행복하고 좋은 것이 제일 좋은 것이 아닌가.  누군가의 가치보다 더 소중하고 중요한 것 그것이 나에게 소중하면 더욱 그렇다는 진리를 잃고 살아간다.

어머니는 살아계실때 누구보다 정이 많으신 분이셨다.  그리고 가족을 생각하는 사랑의 마음이 크신 분이셨다.  보릿고개 시절은 아니지만, 어릴적 제대로된 간식 한번 먹기 힘든시절.  우리 아이들은 과자하나 우습게 먹는 지금 이시절. 우리는 그러지 못했던것 같다.  어머니는 그런 우리를 위해 밀가루를 질게 반죽하여 넓은 쟁반에 펴고, 줄기콩을 따서 콩알을 넣고 솥에 찌어 개떡을 해주셨다.  겨울에는 우리 작은 주먹보다 더 큰 만두를 빚어 주셨고, 커다란 솥에 김장김치와 쌀을 넣어 끓이는 김치죽을,  기름에 튀긴 도너츠에 설탕을 뿌리 설탕도너츠를, 떡복이, 김밥, 김치전 등 집에서 농사지은 작물만으로도 훌륭한 간식을 만들어 주셨다.  그래도 그시절에는 어린아이 입에 맞는 과자가 먹고 싶어서 몰래 쌀한되를 비닐봉지에 담아 슈퍼에 가서 바꾸어 먹으려다 돌뿌리에 넘어져 흙과 섞인 쌀을 담으며 엉엉 운적도 있다.  과자를 먹겠다는 신념이 과해서 신나게 달려가다 넘어졌으리라.  슈퍼아주머니는 먹지도 못할 흙과 섞인 쌀을 받아주고 과자 한봉지를 쥐어 주었다.  얼마나 고마웠는지라는 마음도 잠시 저녁에는 빗자루로 매를 맞아야 했다.  "먹고 싶으면 사달라고하지 도둑질이냐, 이눔아!"  아마도 그 매타작은 어머니의 슈퍼아주머니에 대한 창피함과 아들에게 먹고싶은 과자 한봉지 못사준 미안함.  나의 작은 도둑질이 걱정되는 뭐 그런 마음이 묻어나는 것이라라 생각한다.

산에가서 칡뿌리 캐먹고, 들에가서 는 새순이 돋아난 하얀 솜털같은 연한 풀잎을 뜯어먹고, 아카시아 향이 날리는 날에는 아카시아 꽃을, 감자, 고구마는 이웃밭에서 서리해서 불을 놓아 구워먹고, 향긋한 사과가 먹고 싶으면 동네 입구 과수원에 몰래 들어가 007 작전을 연상케하는 이웃아이들과의 짜릿한 맛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어린시절에는 오로지 그런짓들로 배을 채우는,  간식을 삼는 것 뿐이구나. 참 이제야 돌이켜보아도 참 어린시절이 그렇구나. 싶다.



중학생이 되자 아버지는 막내인 나에게만 용돈이라는 것을 주셨다.  조그만 지갑을 사주시고 항상 오백원짜리 종이돈을 넣어 주셨다.  그리고 항상 '이건 비상금이야, 급할때 써야해.' 라고.   나는 그돈으로 시골읍내에 있는 '태극당'이라는 빵집에서 친구 기영이와 토요일이면 쫄면 삼매경에 빠졌다.  달콤하면서 매콤한 맛에 취해 그렇게 비상금을 쓰고나면, 후회, 그리고 아버지는 다시 지갑을 보고 또 넣어주시고, 다시 쫄면, 또 넣어주시곤 했다.  그렇게 막내인 내가 좋으시고 소중했던 모양이셨다.  그리고 아버지가 말씀하시는 먹고사는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 나가는 모습을 뿌듯하게 지켜보신는 듯 했다.  

한때는 이런 먹고사는 문제보다 더 소중한 일이 생겼었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와 영화에 빠져 우리가 저지른 일들은 일요일 자율학습을 하는 날, 일찍 집에서 나와 청주시내 소극장을 돌아다니며, 포스터를 떼고 모우기, 그때에는 포스터가 흔하지 않던 시절, 어찌보면 칼라 프린터로 찍어내는 포스터 제작비용이 장난이 아니라 희귀했었나 보다.  누가 더 희귀한 포스터를 모으는지 내기도 하고, 스틸사진도 모으고, 우리의 이런 장난아닌 장난은 극장업주들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기 시작하여 새벽에 그들을 일찍 출근시키거나, 포스터 둘레를 모두 압정으로 박아 손톱으로 제거하는 데 무려 한시간 이상이 소모되는 날도 있었다.  그때 친구놈은 나에게 이렇게 이야기 했었다 "이일을 하기위한 첫번째 조건은 긴 손톱이라고,  이것이 우리의 연장임을 잊지 말아라" 했다.  경찰에 신고한다는 경고에 겁을 먹고 나는 그만두었지만 친구놈은 아랑곳하지 않고 작업을 지속하여 나에게 자랑질을 해대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다시 먹고사는 문제로 돌아와야만 했다.  대학에 입학하고 그저 학교만 다니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대학도 역시 먹고사는 문제가 필수 였다.  동기들과 어울리다 점심때면 매점이나 정문앞 떡볶이 집에서 뚝배기 떡볶이로 끼니를 해결하곤 했는데, 이게 하루, 이틀이 아니니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점차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고 그러다 친구들과 거리도 멀어지고, 무언가 해야만 했다.  그래서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새벽 네시에 일어나 신문을 돌리기 시작했다.  오토바이 타는 재미에, 돈버는 재미에 빠졌던 시절 막 창간한 신문사라 부수는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재미가 쏠쏠한 부업이었는데, 아침 배달을 끝나고 집에 오면 여섯시, 까딱 잠들었다가는 열두시에 눈이 떠져 학교를 지각하기 일쑤였다.  그러다보니 성적도 안좋고 또 친구들과 멀어지고, 참 나보고 어떻하라는 말이냐.  먹고사는 문제가 이렇게 풀기 어려울줄은 몰랐다.  그러니 아버지가 그렇게 강조하셨겠지.  역시 우리 아버지는 똑똑하시구나. 새삼 깨닫게 되었다.

진짜로 아버지는 똑똑하셔서 그시절 어렵다는 중학교를 졸업하셨다.  요즘은 들어가기도 힘든 공무원, 당시에는 '면서기'라고 불렀던, 하라고 권유를 받으실 정도였으니,  그런데도 아버지는 뭔 "빽"이 있으셨는지 그걸 마다하고 농사를 지으셨다.  '참 우리 아버지도 집에 땅도 별로 없는데  그 힘든 농사일은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아마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고 싶으셨나 보다.  젊은 시절엔 인기도 좋으셨다니.  사실 어머니는 그렇게 미인은 아니시다.  성품하나는 누구보다 좋으셨지만, 외모는 사실 지금 내가 봐도 치아교정과 양악수술은 기본으로 하셔야 할 듯 하다.  아무튼 똑똑하신 우리 아버지는 정당활동도 하시고, 마을이장도 연속으로 하셨다.  인맥도 넓으셔서 항상 마을에 우선적으로 좋은 것들이 들어오게 하여 이웃주민들의 선망을 받으시고, 마을 창고를 경로당으로 만드셔서 효행도 높게 평가 받으셨다.  하지만 욕심이 없는 분이시라 나가는 돈은 많고 들어오는 수입은 별로 없으셨다.  때로는 당시 신진세력인 밀양박씨 동네 청년들이 평화민주당의 당원으로 가입하면서 기득권 세력인 민정당의 당원이신 우리 아버지를 모함해서 이장을 바꾸려 했다.  그 모함은 마을길을 포장하는데 담은 시멘트 포대를 팔아서 이득을 챙기셨다는.  지금이라면 지나가시는 폐지 줍는 분들이 배꼽빠지게 웃을 일이었다.  그때도 아버지는 그려셨다. "내가 마을창고가 경로당으로 완성되는 걸 보고 그만 두겠다.  내가 시작한 일이니 내가 끝을 보겠다."라고.  참 책임감이 막강한 분이시구나.  그리고 아버지는 이장일을 그만두셨다.  홀가분하셨으리라 생각했는데 이내 아쉬운 마음이 많으셨는지 그 이후로 어깨가 축 쳐지셨다.  먹고사는게 문제였는데.  정작 아버지도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지 못하셨는가 보다.  참 어려움 문제구나. 먹고사는 문제가.

친구하나도 먹고사는 문제가 심각했다.  홀어머니에 형은 나이가 되도 취업도 하지 않고 이친구도 안해본 알바가 없을 정도로 참 치열한 삶을 살았다.  매일밤 술집에서 알바하고 학교다니고, 주말에는 더 벌려고 공사장 막노동하고, 특히 방학때는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더 많은 돈을 주는 공사현장을 찾아다녔다.  그러다 소장의 눈에 띄어 대학생때 건설현장 십장을 할 정도였다.  그러다 결핵에 걸리고, 군대는 가기 싫어 겨우 겨우 약으로 버티던 그 친구. 노는 건 좋아해서 함께 놀고 싶은데 병이 옮을까봐 방밖에서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떠들던 그친구.  

대학시절 친구들도 먹고사는 문제는 심각해서 중간고사시절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배가 고파 조교님과 남학생들이 도서관안에서 밥을 해먹다 걸린 사건도 있었다. 무사히 조교님은 피신을 시켜 망신살을 피했지만, 잡혀간 일당들은 교무처에서 반성문을 써야만 했다.  그중 제일 어린 후배놈이 구구절절한 반성문으로 교무처 직원의 마음을 감동시켜 풀려난적도 있었다.  가끔 남학생들은 학교 가로등불빛아래 모여 돼지고기를 구워먹기도 했는데, 불빛이 그리 환하지 않아 고기가 익었는지 구분도 되지 않았던 때, '고기는 두번만 뒤집으면 먹어야한다'는 시커먼 얼굴의 후배놈.  그놈의 먹고사는 방법도 참 특이했다.  내가 눈여겨 둔 후배에게 찝쩍거려 나의 대학시절 사랑을 방해하고, 자기를 더 좋아했다고 면박주던 놈.  벌써 연락이 끊인지가 서너해가 넘어간다.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에 빠져 학교도 중퇴한 후배놈의 먹고사는 문제, 어릴적 동네 냇가에서 빨개둥이로 같이 헤엄치던 개구쟁이들의 먹고사는 문제, 어릴적 단짝이자 개울가에서 나를 살려준 기영이의 먹고사는 문제, 과학고등학교를 다니며 항상 과학잡지만 읽는다는 최씨 고집 아들내미의 먹고사는 문제.

다들 잘 해결하고 있겠지.  나는 잘 살고 있는것이겠지.  이제는 내가 먹고사는 문제보다 우리 아들 딸의 먹고사는 문제도 같이 고민해야 하는 두배로 겹치는 나이가 되었다.  너희 들은 어떻게 해결할런지, 나는 그아이들에게 어떤 먹고사는 문제의 힌트를 주거나 해답을 줄것인지, 이렇게 시끄러운 세상속에서 어떻게 견뎌나갈것인지 걱정이다.  이왕이면 나보다 나았으면 좋겠다.  우리 아버지는 내가 지금 살면서 해결하는 먹고사는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는지 잘 보시고 계시겠지.  그렇겠지.  항상 응원해 주시고 어린 시절처럼 내가 소진될때 나의 작은 지갑에 종이돈 오백원을 넣어주시며 '비상금이다'라고 해주시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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