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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min lee Apr 21. 2017

33. 행복목욕탕

사람사는 이야기 그리고 행복


"사람사는 이야기 그리고 행복"

우리가 사는 이 공간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나누는 공간이다. 우리는 이 공간에서 태어나고 그리고 이 공간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반드시, 기필코, 꼭 사람들과 어울려야 한다는 전제로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 만약 그것을 어길경우 그 규칙에 벗어남으로 받아야 할 시련과 형벌이 이사회에는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는 사람들과 어울리며 살아가려고 해도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는 가정을 하고 있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 인생의 숙제이고, 그들과 어울리며 나타나는 감성적 상처들에 대해 항상 비상 구급약을 구비해야 하며, 면역체를 길러 어느 기준의 상처들에 대해서는 그냥 넘길 수 있는 자유치유의 능력을 길러야 한다.


고의든, 미필적 고의든, 실수든 우리는 자신 나름의 삶을 살면서 우리가 부딪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다.  어쩌면 사람들이 살아간다는 것은 의도되지 않게 타인들에게 상처를 주는 과정이라고도 볼수 있다. 그러니 나도 그런 상처를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어쩌면 돌이켜 생각해 보면 상처를 주고, 받을 수 있으니 그러지 않을, 최소한의 상처를 줄 상대방을 위한 배려, 동정심, 측은지심이 필요하다.  맹자는 그랬다 한다. 측은지심이 없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고.  그 의미는 측은지심 없이 세상을 산 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것이 필연이라는 것이다.  '최대 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것이 있다. 우리가 실현할 수 없는 목표.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면 또 다른 누군가에게 상처나 피해를 줄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이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니다.




"각기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는 행복목욕탕 가족"

1년전 느닷없이 집을 나간 남편 가즈히로, 그 후로 딸 아즈미와 살아가는 후타바는 누구보다 강하게 가족을 사랑하고 삶을 살아가고 있다. 아즈미는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고 괴롭힘을 당하는 여린 딸. 그녀의 아픔을 아는 엄마 후타바는 그래도 딸의 삶이 멈추지 않도록 아침마다 등을 떠밀어 학교를 보낸다.  미술시간에 물감으로 범벅된 채 초라해진 딸을 보고도 문제를 문제로 보지않고 다른 시점에서 다른 생각을 하도록 "엄마는 빨간색을 좋아해"라며 자신의 유니폼을 바꿔입혀 자건거로 돌아오는 귀가길, 시간에 교복을 숨겨 체육복 차림으로 집으로 오는 딸을 보면서 마음아프지 않을 부모가 어디있을까? 하지만 대신 해주는 삶은 아즈미의 삶이 아닌 걸 알기에, 또한 당신도 그런 삶을 살아왔기에 누구보다 그 아픔과 아픔을 이겨내지 못한 불행한 미래를 알기에 누구보다 더 다그치고 등을 떠민다. 말기암인줄 알면서도 잠깐의 슬픔이외에 허락되지 않은 시간들, 딸의 배고픔과 가족의 미래를 위해 그녀는 슬퍼할 시간이 없다. 그녀의 삶은 이제 끝나가지만 끝나기전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거기에 더해지는 남편과 남편의 또다른 딸. 그리고 또다른 아픔들. 거기에 후타바는 남편이 온전히 가족을 지켜나갈 수 있도록 용기를 주기위해 '행복목욕탕'을 다시 연다.





"각자의 아픔으로 삶을 사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치유하는 후타바"

잘사는 가정에서 태어나서 목적없이 살아가는 타쿠미의 아픔, 딸을 얻고 아내를 잃은 탐정, 태어나자 마자 자신의 딸을 버린 아즈미의 친엄마 사키마키, 딸의 더나은 삶을 위해 딸을 버리고 다른 삶을 찾아 떠난 엄마에게 버려진 아유코.  우리는 스스로를 나름대로 위안하며 살아간다. 그것은 변명에 가깝다. 아픔을 감추려는 변명. 타쿠미는 세번째 새엄마와 이복동생이라는 가족구성에 대해 그 변명으로 자신의 인생을 망가뜨리려 하며, '그래 나 때문이 아니라, 우리 가족이 문제야'라고 규정한다.  탐정은 딸에게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줄어주려 '천국'을 이야기하고 '너무 멀어서 만날수 없다'는 변명으로 자신의 슬픔과 딸의 그리움을 없애려 한다. 아즈미의 친엄마는 장애인으로 듣고 말하기를 할 수 없어 태어난 딸의 울음소리가 마음으로 느끼지 못한다며 어린나이와 자신의 장애를 탓하며 딸을 위한 것이라 생각하며 자신을 합리화하고, 그 미안한 마음으로 또한 매년 그날짜에 게를 보낸다. 그리고 딸이 보낸 답장으로 나름 자기위안으로 살아간다. 언젠가 돌아오리라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아유코는 그래도 '엄마를 좋아해도 되죠?'라며 허락을 받고 싶어하고, 그 믿음으로 가족이되어 살아간다. 그리고 그들의 아픔을 치유해주는 후타바.  



하지만 정작 자신의 아픔을 치유하지 못하는 후타바. 마지막까지 바램이, 관객들도 공감하는 바램이 이루어지지 않는 감정은 스크린을 넘어 나의 가슴까지 먹먹해지는 아픔으로 다가선다.



"나의 삶과 아픔이 겹쳐진 행복목욕탕"

고등학교 들어오자 마자 어머님의 간암 사형선고, 지금 시대라면 내 간의 일부를 이식하여 지금까지 행복하게 살수 있을지 않을까하는 기대감을 갖게되는 나의 삶 그리고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 마지막 생을 마감하려는 후타바의 병원모습은 작가의 어머님의 마지막과 같고, 그 앞에서 울지 않으려 애쓰는 딸 아즈미는 나의 모습으로 투영되어 오래된 기억이 되살아난 영화이다.  나는 가끔 일본영화에서 느끼는 삶의 진한 내음과 감동이 참 좋다라는 느낌을 많이 받을 때도 있다.  매체라는 것이 사람들의 흥미를 위한 전제가 필요하나, 우리의 삶이 들어가지 않으며, 마치 밋밋한 맛을 내는 음식과 같은 것이 아닌가.  마지막까지 가족을 걱정하던 후타바는 가족들의 작은 선물을 받고, '죽기 싫어'라며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내보인다.  그렇게 독하게 가족을 걱정하며 죽음을 준비하던 후타바도 그들의 행복과 함께 하길 바라는 마음은 같은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본의아니게, 진짜 본의 아니게 상처를 주고 아픔을 준다고 나는 전제하여 말하였다. 그리고 그 상처를 덜 줄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측은지심이며, 배려이며, 동정심이라고 말했다.  더욱 노력해야 하는 삶.  오늘 아침에 탈독한 '안현서' 작가의 '민모션증후군을 가진 남자'를 마무리 하면서 '우리가 인생을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끝없이 비우는 과정이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의 그릇이 작기 때문이며, 비우지 못하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비우는 과정에 용서를 배우고, 동정심을 배우고, 배려를 배운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은 결과를 볼 것이 아니라, 과정을 봐야하며 인생이라는 것 자체가 결과보다는 과정임을 알아야 한다.'라고 결론지었다.  삶은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다. 나와 나의 자녀, 또 자녀의 자녀.  나의 인생은 내 육체에서 끝이날지 모르지만 또다른 나의 모습으로 태어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될 것이다. 그런 삶들이 풍족하도록 우리는 노력해야 할지도 모른다.  삶의 풍족이란 무엇보다 마음의 풍족이 아닐까 한다.  


감동의 연기를 보여준 내가 아는 그녀, 어린시절 성적 호기심을 자극했고, 이제는 나의 삶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그녀 미에자와 리에. 그녀에게 끝없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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