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조미료 기업 하이티엔(海天味业,해천미업)이 시총 6000억 위안을 기록해 부동산 그룹 완커(万科)와 석유 공룡기업 시노팩(中国石化)의 시총을 넘어서면서 화제가 되었다. 3일 만에 1000억이 빠져 9월 11일 기준 시총 5200억 위안(한화 90조) 수준에서 장을 마감했지만 여전히 완커(3200억 위안)와 시노팩(4700억 위안)에 비해 높은 가격이다. '조미료계의 마오타이(茅台)'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었는데, 조미료계의 진정한 대장은 따로 있다. 조미료 시장에서 하이티엔((海天味业,해천미업)보다 3-4배를 더 버는 이금기그룹(LEE KUM KEE,李錦記)이다. 2019년 하이티엔이 총매출로 약 200억 위안(한화 3.4조)을 벌었는데 2017년 이금기그룹 총매출은 약 600억 위안(한화 10.4조)에 달했다. 현재 이금기그룹의 총매출은 700위안 정도로 예상한다.
찌개와 국을 주식으로 하는 한국인에게는 칼칼하고 시원한 맛을 내는 라면 스프가 마법의 가루라고 한다면, 볶음 요리를 주로 하는 중식에서의 마법 소스는 묵직한 단 맛을 내주는 굴소스다. 굴소스는 1888년 설립한 이금기그룹 창시자 이금상(李锦裳)이 실수로 너무 많이 졸인 굴에서 나는 단맛에서 착안해 낸 상품으로 오늘날 이금기그룹을 있게한 1등 공신이다.
이금기그룹 창시자 이금상이 사망한 후 이금상의 세 아들이 기업을 공동 운영하면서 이조남(李兆南)을 대표로 하는 2세대 경영을 시작했다. 1932년 이금기그룹의 본거지를 마카오에서 홍콩으로 옮기고, 후에 이금상의 손자들, 3세대도 하나 둘 회사 경영에 참여했다. 가장 마지막으로 합류한 손자가 현재 이금기그룹 CEO이자 2020년 포브스 선정 중국 부호 13위에 이름을 올린 이문달(李文达)이다. 1970년, 기업은 정체기에 접어들고 기업 전략을 놓고 가족들 간에 충돌이 발생했다. 이금기는 굴소스와 새우장 등 제한적인 상품을 모두 수제로 제작하는 고가 브랜드였다. 이문달과 이문달의 아버지 이조남은 대량 생산 시설 도입을 통해 가격을 낮춘 대중화 전략을 원했지만 다른 형제들의 생각은 달랐고, 이는 1972년 경영권 싸움으로 이어졌다. 한차례 경영권 다툼 끝에 이문달이 경영권 분쟁에서 승리하고 본격적으로 대중화와 상품 다양화를 표방하는 3세대 경영이 막을 올리면서 이금기는 세계적인 조미료 기업으로 다시 한 번 도약했다. 현재는 이문달의 아들 이혜중(李惠中)이 경영 일선에서 회사를 이끌면서 4세대 경영을 이어가는 중이다.
2002년 이금기그룹은 가족 간 소통을 강화하고 기업 경영에 힘을 모으기 위해 가족 위원회를 구성하고 가족 헌법을 만들었다. 외부에 알려진 내용은 이렇다.
1.이금기그룹은 가족 기업으로 남녀 구분 없이 혈연 가족만이 주식을 보유할 수 있고 승계할 수 있다.
2. 자신의 선택으로 기업 경영에 참여할 수 있지만 반드시 대학을 나와야 하고 3년-5년의 경력이 있어야 한다. 그룹 입사 후의 평가와 승진은 다른 사원들과 똑같은 기준을 적용한다.
3. 기업 경영을 원하는 가족 중 선출을 통해 가족 이사회 구성원이 될 수 있다.
4. 만혼, 이혼, 외도는 금한다. 만일 외도나 이혼 시에는 가족 이사회에서 퇴출되나 가족 위원회 구성원 자격은 유지할 수 있다.
'부자는 3대를 못 간다'는 말은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비슷한 맥락을 공유한다. 미국 속담에는 '셔츠 바람으로 시작해서 3대 만에 다시 셔츠 바람로(Shirtsleeves to shirtsleeves in three generations)'라는 말이 있고, 독일 속담에도 '아버지는 재산을 모으고, 아들은 탕진하고, 손자는 파산한다(Erwerben, Vererben, Verderben)'라는 말이 있다. 중국에서도 '富不过三代(부자는 3대를 못 간다)'라고 하는데, 4대째 건실하게 운영 중인 이금기그룹은 3대의 저주를 깨고 여전히 승승장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