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를 거닐며 마주치는 풍경과 사람은 산책의 묘미지만, 딱히 인상 깊은 풍경과 사람이 없는 거리를 걸을 때에도 거리 옆에 세워진 길 이름을 알려주는 표지판을 구경하며 걸으면 산책이 훨씬 재밌어진다. 예를 들면 콜라로(可乐路), 흙모래로(沙泥路), 뭐든 되는 로(都会路)처럼 행정 주소인 도로명이 맞나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는 재미있는 이름의 길도 있고, 베이징동(서)로(北京东(西)路), 난징동(서)로(南京东(西)路), 톈진로(天津路) 처럼 중국의 대표적인 도시로 익숙한 길도 있다. 상해의 길을 걷다 보면 유독 충칭남(북)로(重庆南(北)路), 쓰촨로(四川路), 광저우로(广州路), 푸젠로(福州路)와 같이 중국의 지명을 도로명으로 사용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1998년 발간된 《上海地名志(상하이지명지)》통계에 따르면 상하이에서 중국 행정 지역의 이름을 쓰고 있는 길이 840개로 전체의 43%를 차지했다. 상하이에 현대식 거리 명칭인 '로(路)'가 들어선 것은 아편전쟁 패배 후 맺은 1842년 난징조약의 결과로 상해를 서양의 조계지로 사용하면서부터인데, 1846년 영국 조계지에 생긴 현재의 허난중로(河南中路)가 상하이의 첫 번째 현대식 길이다. 그 후로 각 열강들은 자신의 조계지에 앞다투어 길을 닦고 자신들이 원하는 이름을 붙였다. 문제는 1862년 미국과 영국의 조계지를 합치는 미영(美英)공공 조계지 논의가 이뤄지면서 생겼다. 길 이름을 놓고 어느 나라가 정한 도로명을 사용할지 논쟁이 붙은 것이다. 이때 상하이 영국 영사관 직원이었던 메드허스트(Walter Henry Medhurst )가 중국 지역의 이름을 도로명으로 사용하자고 건의했다. 이에 메드허스트가 건의한 대로 미영공공조계지의 도로는 중국 지명을 도로명으로 사용하되 동서 가로로 난 길에는 중국 도시(市) 명칭을, 남북 세로로 난 길에는 중국 성(省)명칭을 붙이는 작업이 이뤄졌고 현재까지도 이 시기에 지어진 도로명을 사용하고 있다.
1912년 청나라 멸망 후 국민당은 중화민국(현재의 대만)을 수립했다. 그리고 1929년 서구 열강이 조각낸 상하이 땅에서 외세를 견제하고 중국인의 부흥을 위한 신 시가지 구축 프로젝트인 대상하이계획(大上海计划)에 돌입했다. 현재의 우쟈오창(오각장, 五角场) 일대를 신 시가지 중심으로 잡고 세로로 난 길에는 "중中, 화华, 민民, 국国" 글자를 넣어 길 이름을 짓고, 가로로 난 길에는 '상上, 해海, 시市, 정政, 부府'를 넣었다. 아홉 가지 글자를 합치면 "중화민국 상해시정부"가 완성된다. 현재에도 우쟈오창 일대에는 中原路,民庆路,国和路,市光路,政立路,民府路 등 아홉 가지 글자가 들어간 길이 대부분이다. 또 상하이 시정부 건물을 가운데 두고 중(中)자 모양을 잡아 동서남북으로 뻗은 도로에 각각 五权路-오권로(현 民星路), 三民路-삼민로(현 三门路),大同路-대동로(미준공), 世界路-세계로(현 世界路)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네 도로명은 중화민국의 건국이념인 삼민주의(三民主義)와 오권분립(五權分立), 중화민국이 목표하는 대동세계(大同世界)를 나타낸다.
1949년 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현재의 중국)을 선포한 뒤에는 국민당과의 내전(중국에서는 해방전쟁이라고 부른다)에서 거둔 승리를 기념하는 명칭을 길 이름으로 사용했다. 국민당과의 내전에서 승리를 기념하는 解放路(해방로), 화이하이(淮海) 지역에서 거둔 승리를 기념하는 淮海路(화이하이로), 마오쩌둥을 주석으로 하는 중화 소비에트 공화국 수도 루이진(瑞金)을 딴 瑞金路(루이진로), 국민당의 공격을 피해 루이진을 떠나 옌안(延安)까지 12500km를 행군한 대장정을 기념하는 延安东(中, 西)路(옌안동(중,서)로) 등이 대표적이다.
길을 뜻하는 '로(路)'외에도 '농(弄)'이나 '가(街)'를 사용하는 길을 볼 수 있는데 '농'과 '가'는 중국의 전통적인 주소 표기법이다. 따라서 농과 가를 사용하는 거리는 서구 열강이 상하이에 들어오기 전부터 번화했던 지역이다. 지금은 금융가가 되어버린 와이탄 일대는 과거에 큰 시장이 있던 곳으로, 여전히 外咸瓜街 -절인 생선 가 (咸瓜는 소금에 절인 생선(咸鱼)을 뜻한다), 火腿弄- 햄농, 豆市街-두시가(콩 시장 길), 猪作弄-저작농(돼지 잡는 길)라는 도로명에 과거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
벽돌이 부서지고 시멘트가 떨어진 아담한 낡은 판잣집 골목을 지나 하늘에 닿을 듯 뻗은 고층 빌딩이 즐비한 거리로 나오며 까마득히 먼 과거와 짐작할 수 없는 미래, 그 중간 어디쯤인가에서 흐르는 현재의 시간을 느낀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 누군가의 존재는 잊히고 새로운 존재로 그 공간이 채워지겠지만 내가 이 땅을 딛고 이 시간을 거닐고 있음을 이 거리는 기억하겠지. 지나온 세월이 그러했듯 말이다.
참고:么孝颖、郑宝军, 上海街道行政地名命名的历史探源, 《大家》 2011年18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