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상해간잽이 Feb 14. 2024

대만, 해양강국의 꿈을 돌이켜 보며

 대만은 한국과 비슷한 점이 많다. 작은 국토 면적과 적은 인구, 그럼에도 세계적으로 순위를 다툴 정도로 발달한 산업이 있다는 점이 그렇다. 요즘 가장 자주 언급되는 분야는 반도체 산업이지만, 대만은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만큼 해양 강국이기도 하다. 각국 컨테이너 선사들의 글로벌 순위를 매겨보면 대만 국적 선사인 에버그린(Evergreen,長榮海運)과 양밍(Yangming,陽明海運)이 각각 7위, 9위에 자리하고 있다. 또 대만과 중국을 사이에 둔 대만 해협은 전 세계 물동량의 88%가 지나가는 주요 길목이다.




 지금도 대만은 국제적으로 해상 운송에 있어 세계적인 위상을 떨치고 있지만 과거 더 큰 영광을 누리며 세계 해운 시장을 선도하던 시절이 있었다. 대만 최대 선사 에버그린은 1970년대 해운 업계에 큰 변화를 가져온 '컨테이너선' 추세에 발 빠르게 대응해 기존의 미국과 유럽의 양강 구도를 흔들어 놓았다. *글로벌 순위 10위권 언저리를 머무르던 에버그린은 1984년 단숨에 세계 1위 자리를 차지한 뒤로 7년을 연속으로 세계 1위 자리를 지켜냈다. 그뿐만 아니라 해운 역사상 최초로 세계 일주 항로(RTW, Round -the-world)를 개척하고 효율화에 성공했다. 기존의 항로들은 출발지와 도착지를 정하고 중간에 몇 군데 항구를 기항하는 식으로 짜여 있었기 때문에 적게는 한 개 대륙에서 많게는 세 개 대륙을 거쳐 끝 지점에서 선회하는 항로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세계 일주 항로는 한 번에 아시아에서 출발해 북미와 유럽 대륙을 지나고 중동을 거쳐 다시 아시아로 돌아오는 식이라 기존의 항로와 다르게 끝 지점이나 선회 지점이 없는 순환성 항로인 셈이다.


 1980년대 노동력에 기반을 둔 대만 제조업의 성장은 괄목할 만했다. **1982년 전 세계 인구 9명 중 1명은 대만에서 생산한 신발을 신고(5.2억 켤레 수출), 40명 중 1명은 대만산 우산을 사용했다(1100만 개 수출). 대만에서 생산한 재봉틀과 소형 모터는 각각 세계 시장의 80%(316만 대)와 70%(2.4억 개)를 점유했다. 당연히 대만의 항만 또한 수출입에 있어 큰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대만 최대 항구인 가오슝항은 홍콩항, 싱가포르항과 함께 아시아 지역의 핵심 항만으로 성장해 대만에서 수출, 수입하는 화물뿐 아니라 가오슝을 거쳐 제3 국으로 향하는 환적 화물의 요충지로 자리 잡았다. 환적 화물을 많이 처리하는 항구는 국제노선이 많아 주변 보조 항만을 촘촘히 연결하는 중추 역할을 하게 된다. 아시아와 미주, 유럽을 잇는 곳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과 수출형 제조업의 비약적 성장을 등에 업고 가오슝항은 홍콩항과 코펜하겐항 다음가는 세계 3대 항만으로 발전했다. 



 1990년대 금융위기가 태풍처럼 아시아를 휩쓸고 갈 때에도 대만은 태풍의 눈에 들어앉은 것 마냥 안정적인 시기를 보냈다. 1998년 한국, 일본, 홍콩, 말레이시아 등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들이 마이너스 성장을 하는 동안 대만은 유일하게 4%대 성장을 기록했다. 에버그린 선사는 여전히 글로벌 선사 3위권을 수성했으며, 가오슝항 또한 3대 항만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90년대 말부터 해운 시장을 둘러싼 환경은 크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글로벌 선사들은 적극적인 인수 합병으로 규모를 키우며 시장 점유율을 확대해 나가는 동시에 선사들 간 동맹을 구축해 나갔다. 1996년에는 5위권에서 10위권 사이에 머무르던 P&O와 네드로이드(Nedlloyd)가 합병하면서 단숨에 글로벌 3위까지 오르게 되었고, 1999년 머스크는 글로벌 3-5위권을 오르내리는 씨랜드(Sealand)를 인수하며 글로벌 1위 선사 자리를 더욱 공고히 굳혔다. ***선사들의 글로벌 제휴가 시작되면서 동아시아 지역의 기항지도 변화가 생겼는데, 글로벌 제휴가 시작되기 전인 90년대 초 아시아 지역의 주요 기항지는  홍콩, 가오슝, 고베, 오사카, 부산 등으로 비교적 단순했다. 하지만 90년대 중반 글로벌 제휴가 시작된 이후로는 기존의 일본-한국-홍콩-타이완 중심의 항로에서 벗어나 람차방항, 마닐라항과 같은 동남아시아 항구뿐만 아니라 상하이항, 다롄항 ,칭다오항, 톈진항 등 중국의 주요 항만이 기항지에 포함되었다. 또한 중국 경제가 부상하며 물동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자 아시아의 물류 거점은 점차 중국 동부 연안 항만을 중심으로 이동했다.



 2000년 이후 대만의 에버그린 선사와 가오슝항은 점차 글로벌 순위에서 밀려났다. 해운업 호황기였던 2002년부터 2008년에도 에버그린은 밀려버린 순위를 회복하지 못했고 2016년 전 세계 해운 산업이 장기 불황에 처했을 때는 대만의 양밍해운과 함께 정부 지원을 받아 위기를 넘겼다. 가오슝항은 10위권 밖으로 밀려난 뒤 매년 순위가 떨어져 보조 항만의 기능만 담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바다는 비에 젖지 않는다'라는데, 모든 것을 품어 안고 감내하는 바다는 어떤 모습일까.

 대만 시인 위광중(余光中)이 그리는 비 젖은 바다는 낭만이 있다. 한 시절을 누리던 번영 갔어도 비가 오면 드러나는 낭만에 젖은 모습은 변함없을 듯하다. 



雨落在高雄的港上

빗물이 가오슝 항구에 떨어지네


溼了滿港的燈光

떨어지는 비는 항구를 가득 채우는 불빛을 적시니


有的浮金,有的流銀

금빛이 떠다니고 은빛이 흐른다


有的空對著水鏡

금빛과 은빛 사이로 물을 마주하면


牽著恍惚的倒影

이끌려 온 거꾸로 매단 그림자 흔들린다.  


—— 《雨落在高雄的港上》






*Tri, N.D. (2002). A strategic study of the top 20 liners during the period, 1980-2001.

**台灣大百科全書

*임영태, 한철환(2008) 동북아시장의 역내 항만 얼라이언스 구축 방안 연구, 국토연구원




작가의 이전글 진짜가 이기는 게 아니라 이기는 게 진짜가 되는 세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