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앞에선 항상 입을 조심해야
저희 집사람은 넘겨짚기 대장입니다. 물론 본인은 넘겨짚는 게 아니라 상황의 이면을 꿰뚫어 보는 것이라고 합니다만. 상황의 드러난 면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저 같은 사람은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이고, 자신처럼 항상 전후 좌우의 연관성을 살피고 상대의 숨은 의도를 정확히 따져야 어디 나가서 호구 노릇을 하지 않는다고 저를 나무랍니다. 당신이 넘겨짚은 의도가 사실이 아닐 수 있다고 열을 올려 얘기해봐도 제 말을 믿지 않습니다. 외부 정보를 비판 없이 일단 수용하는 제가 아무 생각 없는 축에 드는 걸 지적해주는 것은 감사한 일이지만, 매번 상대의 의도를 따지며 사는 것도 피곤한 일이고 또 어떨 때는 모르는 체하는 게 인관관계에서 바람직할 때도 있다고 얘기해줘도 그 말도 그대로 믿지 않습니다. 자기를 안심시켜 놓고 뭘 하려는 꿍꿍이냐는 거죠.
모르는 새 넘겨짚기를 당하는 사람들 중에는 제 고등학교 동창들이 있습니다. 가끔씩 그 친구들과 술 한 잔 하고 헤어지면 비실비실한 제가 걱정된 친구들이 제게 계속 전화하다가 제가 택시나 지하철에서 조느라 전화를 안 받으면 저희 집사람에게 전화를 합니다. 요즈음 모르겠습니다만, 제 또래 남자들이야 평소에 연락도 없던 친구 와이프에게 술 마시고 전화하는 게 별로 큰 일은 아닙니다. 술기운에 남의 여자와 당당하게 농담도 하고 친구가 잘 들어갔는지 챙기기도 하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저희 집사람은 제 친구들이 자기를 편하게 보니까 자꾸 전화한다고 생각합니다. 만만하게 보는 게 아니래도 제 말을 믿지 않고 그 밤중에 아녀자에게 전화하는 게 편하게 보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주장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내가 그리 좋냐고 물어봐!'라고 착각에 빠져 있는 집사람을 위해 나중에 친구들을 집에 데려와 3차를 하면서 3자 대면을 한 번 시켜봐야겠습니다.
최근에는 어머니도 넘겨짚기를 당하는 대상에 포함되셨습니다. 올해 생신을 맞아 어머니와 식사 한 날 오히려 어머니께서 며느리들에게 용돈을 주셨습니다. 그것도 각자 5백만 원씩이나 말입니다. 만약 제가 장모님으로부터 그런 용돈을 받았으면 아무 생각 없이 고마워 어쩔 줄을 몰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집사람은 그냥 감사히 받는데서 멈추지 않고 또 넘겨짚었습니다. 제일 사랑하는 막내아들을 챙겨주려는 게 어머니의 원래 목적이고 나머지 며느리들에게 준 건 그냥 구색 맞추기 아니냐고 말입니다. 같은 액수이고 공개적으로 주셨는데 어머니에게 무슨 의도가 있겠느냐고 설명을 해도 자기가 받은 5백만 원과 막내네가 받은 5백만 원이 다르다는 집사람의 주장은 요지부동입니다. 이 건은 삼자대면을 하면 안 되는 건이지요?
딸내미도 부지불식간에 넘겨짚기를 당한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집사람은 르완다에 있는 제게 전화해서 딸내미가 못됐다고 고자질을 했습니다. 딸내미가 외출했다 돌아오면서 엄마한테 귀가 인사도 없이 현관이고 지 방문이고 세게 쾅 닫고 들어가 버렸다고 합니다. 아침에 노출이 심한 외출 복장에 대해 한 마디 했더니 '왜 남의 옷 입는 것에 참견하냐'라고 딸내미가 짜증을 내길래 욕을 한 바가지 해주었답니다. 그걸 저녁까지 안 풀고 삐져 있는'속 좁은 년'이라고 넘겨짚은 겁니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급똥이 마려운 딸내미는 인사할 정신도 없었다더군요. 더 나아가 딸내미는 저와 통화에서 아침에 자기가 엄마한테 짜증 낸 것도 기억 못 했습니다. 물론 그렇게 맥락을 설명을 해줘도 집사람은 아직도 딸내미가 삐졌던 게 맞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애니팡 게임 때문에 카톡으로 날아온 초대장에 대해서도 그 의도를 의심한 적이 있습니다. 초대장을 보내면 몇 게임할 수 있는 코인이 생기기 때문에 연락처에 있는 아무나에게 보내는 게 초대장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집사람은 몇 년 연락도 없던 친구가 초대장을 보낸 건 분명히 저의가 있을 수 있다고 우겼습니다. 이런 집사람과 맞서 가정의 평화를 지키면서 그 넘겨짚기에 당하지 않는 방법은 황희 정승의 전법이 최고입니다. 무조건 너도 맞고 그도 맞다고 해주는 거지요. '어! 당신 말이 맞아! 그런데 그 사람에게 그런 의도가 없었을 수도 있어. 물론 당신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당신이 맞겠지 뭐. 아님 할 수 없고... '
2020년 10월 10일
묵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