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냥의 시간> 리와인드
<파수꾼>의 멤버가 다시 뭉쳐 기대를 모았던, 그리고 의도치 않게 개봉과 공개에 차질을 겪으며 나름의 이슈를 생산한 영화 <사냥의 시간>. 영화는 네 명의 젊은 청년들이 한탕을 노렸다가 적의 목표물이 되어 벌어지는 추적 스릴러이자 네 남자의 우정, 의리, 로망을 담아내려고 한 것 같다.
주요 사건이 보이고, 흥미가 유발되며 그것으로 주제를 자연스럽게 유추할 수 있는 것이 영화의 좋은 로그 라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냥의 시간>은 다소 혼란스럽다. 영화를 보고 나면 “아 이런 걸 그리고 싶었구나”, “어? 근데 그건 어떻게 된 거지?”, “왜 그런 거지?” 등의 물음이 꼬리의 꼬리를 물게 된다. 철학적 질문을 던진 영화를 본 것도 아닌데 나는 왜 끊임없이 의심하고 묻게 되는가.
3~4년 전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도 그랬지만 제일 의문이 들었던 점은 대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인가?라는 물음이다. '묻지 마 다쳐!'라는 말이 생각난다. 많이 물으면 다친다. 의문은 잠시 접어두자.
정리가 안 된 느낌이다. 어쩌면 의도적으로 정리를 안 한 느낌이다. 히치콕의 맥거핀도 아닌데 중요한 것 같은 요소들이 어떠한 정리나 설명을 하지 않고 사라져 버린다. 관객 입장에서 끝까지 궁금하지만 어떤 속 시원한 해답을 내놓지 않는다. 내러티브에서 중요한 주인공의 동기로 마무리되지 않고, 결말은 내가 다른 영화를 본 것은 아닌가 착각까지 하게 만든다.
“외국영화들에선 사연이 없는 악당이 종종 나옵니다. ‘로드 투 퍼디션’에서 주드 로 같은 인물이죠. 한국 영화에선 모든 인물의 이유를 밝히려 하는데, 이 경우 공포감이 약해집니다. 우주가 무서운 이유는 낯설기 때문이죠.” -윤성현 감독 인터뷰 중에서-
사실 엔터테인먼트 영화에서는 사실의 개연성이라든지 캐릭터의 전사가 굳이 필요하지 않을 수 있다. 그렇게 하려면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몰입시켜야 한다. 긴장감 넘치는 장면이 있긴 하지만 궁금증을 잊기엔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감독의 인터뷰를 보면 특히 악역 '한'에 이런 의도성을 심었다고 보인다. 그러나 낯선 공포감만 심었던 것이 문제랄까. 사실 공포감도 캐릭터에서 나온다기보다는 다른 장치들을 통해 유발한 것 같아 아쉽다.
‘한’의 캐릭터를 보며 가장 많이 떠올랐던 것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안톤 시거’다. 두 캐릭터는 낯섦에서 오는 공포감은 흡사하지만 그 캐릭터가 주는 무게감과 매력이 다르다. 캐릭터에 매력을 느끼기 위해서는 트라우마로 인한 연민의 감정이 느껴지면 쉽다. 하지만 악역에게 지나친 연민은 위험하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영화에선 악역에게 정당한 이유를 요구하지만 현실에선 그렇지 않은 경우를 많이 본다.
악역에게 꼭 정당한 이유를 부여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동의한다. 하지만 전사가 필요 없을 정도의 매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한’의 근육질 외모, 대사, 먹잇감을 잡고도 다시 놓아주는 미스터리 한 부분으로 매력을 살리려 했지만 역부족이란 느낌이 든다. ‘안톤 시거’가 더 무섭고, 매력적이었던 점은 현실적이면서도 동시에 기괴했다는 점이다. ‘안톤 시거’는 근육질도 아니고, 외모가 뛰어나지도 않았음에도 매력적으로 다가온 이유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한'은 재미(의지)로 주인공을 그냥 놓아주지만, '안톤 시거'는 동전(운명)을 던져서 총을 쏠지 정한다.
“청년세대가 한국사회를 지옥에 빗대곤 합니다. 그 지옥에서 생존투쟁을 벌이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장르물로 풀었어요 남미와 미국 등에서 봤던 슬럼화 된 도시 이미지를 가져와 우화적인 공간으로 지옥을 만들었어요. 그리고 범죄와 서스펜스, 서부극 엔딩까지 차용해 지옥도를 그려냈어요." -윤성현 감독 인터뷰 중에서-
"우화적인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결과물로 나온 배경적) 세계관을 가져갔다. 그렇다고 SF영화는 아니다. 사이언스(과학)는 안 들어간다. 개인적 욕심으로는 정말 제대로 된 세계관을 펼치고 싶었지만, 제작비 여건상 현실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영역에 집중했다. 남미나 미국 디트로이트의 슬럼가 등을 참고했다. 근미래라고 말하기는 조심스럽다." -윤성현 감독 인터뷰 중에서-
감독의 말처럼 현실적 문제로 세계관 설정이 다소 헐겁다. 상상의 배경일 수록 조금 더 탄탄한 세계관이 설계되어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동의를 얻을 텐데 그런 부분에서 디테일이 떨어진다. 그러나 후기 서부극의 특징은 잘 묻어난 것 같다. 선과 악의 뚜렷한 구분이 아닌 인간의 광기와 불안정한 내면이 잘 표현된 것 같다.
영화를 보고 나면 디스토피아 영화 시리즈 <블레이드 러너>가 생각나지 않을 수 없다. <사냥의 시간>은 <블레이드 러너>에 비해 세계관과 주제의식이 아쉽다. <블레이드 러너>는 장르성은 물론이고, 내러티브와 주제의식이 함께 묻어나기 때문에 훌륭했다. 물론 <사냥의 시간>의 배경이 근미래가 아닌 '은유적이고 우화적인' 공간이라고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지옥 같은 곳'에 대한 세계관의 상징이나 주제의식이 느껴져야 하는 것은 아닐까. 장르성으로만 풀기에는 조금 아쉽다고 느껴졌다.
<블레이드 러너>는 암울한 미래를 통해 인간 가치의 존엄성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사냥의 시간>은 왜 현실의 문제를 이런 장르로 풀었는가? 그래서 결국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었는가? 이런 질문에 대한 마땅한 대답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암울한 공간 배경에서의 시사점이 필요하다.
“’ 사냥의 시간’은 순제작비 90억 원으로, 큰 제작비를 들이니까 더 쉬울 것으로 생각했어요. 하지만 ‘파수꾼’이 쉬웠어요. 감정과 인물에만 집중하면 됐으니까요. 이번에는 이미지 중심으로 표현하다 보니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어요. 왜 한국에서 이런 영화가 안 나오는지 이해가 되더군요." -윤성현 감독 인터뷰 중에서-
<파수꾼>이 훌륭한 이유는 인물의 미세한 감정과 심리를 잘 표현했기 때문이다. <사냥의 시간>에서는 대사와 설명이 많이 없다. 사운드와 이미지 중심, 비언어적 표현으로 보여준다. 감독이 의도한 낯섦이 모든 면에 적용되는 것 같다. 장르도 그렇지만 표현방식에서도 그 낯섦이 존재한다. 일반화일 수 있지만 국내에서 성공하는 많은 한국영화들은 낯선 요소에도 현실적인 요소가 다분하다. 낯설지만 동시에 친숙해야 그 낯섦이 신선함으로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냥의 시간>은 너무 낯선 요소들의 독무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우들의 연기와 서스펜스는 훌륭했다. <파수꾼>이 오버랩되는 순간들이 나름 재미있다. 차라리 20분 내외 옴니버스 영화로 제작했으면 어땠을까 생각도 해본다. 이미지적인 부분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라면 비슷한 주제를 가진 4가지의 버전의 옴니버스 영화로 묶는 것은 어떨까. 아니면 네 명의 주인공의 이야기를 각각 보여주는 방식도 흥미롭다. 네 청년이 살고 있는 각각의 지옥을 보여주고, 한 탕 하려는 사건 혹은 비극적 결말로 합치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영화는 순제작비 90억, P&A 약 30억 원 미만이 들었다. 손익분기점은 약 350만 정도다. 극장계 상황이 좋았더라면 스코어는 어땠을까. 그러나 넷플릭스에 120억 원에 판매했다고 한다. 결코 실패하지 않았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의 느낌과 3~4년 전 처음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의 느낌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독특한데 왠지 잘 모르겠다. 잘 그려지지 않는다. 당시 글쓴이 외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 감독과 배우를 보고 영화의 가능성을 점쳤다. 그렇다. 이 조합은 충분히 매력 있다. '준석'의 꿈처럼 그들이 다시 모인다면 언젠가 꼭 다른 작품으로 한 번 더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