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테판 May 03. 2020

망각할 수 있어 행복한 <망각의 삶>

영화 <망각의 삶> 리와인드

<망각의 삶> 포스터

망각의 삶 Living In Oblivion, 1995

미국 / 코미디 / 청소년 관람불가 / 90분

감독 : 톰 디칠로

배우 : 스티븐 부세미, 캐서린 키너, 더못 멀로니


저예산 영화 촬영 현장 속 예기치 못한 사건들이 쉴 새 없이 터지고, 인물들의 숨겨진 욕망과 망각이 꿈으로 뒤섞이며 벌어지는 코미디다. 영화는 잔인할 정도로 저예산 영화 현장의 현실 그대로를 보여준다. 카메라가 흔들리거나 프레임 안으로 붐 마이크가 나오고, 장비가 고장 나고, 배우의 대사가 엉키는 등 현장에서 실제로 있을법한 사건들이 벌어지면서 영화를 완성하기 위한 감독과 스태프의 고군분투를 보여준다.

     

우리가 극장에 앉아 보던 장면 하나하나가 여러 사람의 노력과 시행착오를 통해 만들어지는 과정임을 볼 수 있다. NG로 인해 다시 처음부터 촬영을 하고, 그것이 반복되면서 웃음을 자아낸다. 영화인들에게는 공감을, 일반인들에게는 현장의 모습이 신선하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도 지나치게 반복이 되면 웃음기가 사라지듯, 수도 없이 이어지는 NG로 짜증이 나려 할 때, 결국 ‘닉’이 폭발하며 우리는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망각의 삶> 스틸 - 계속해서 사건이 터지는 촬영 현장 / 쓰러져 버린 감독 '닉'
망각한 자는 복이 있나니, 자신의 실수조차 잊기 때문이라
Blessed are the forgetful, for they get the better even of their blunders
프리드리히 니체


영화를 보면서 필자가 겪었던 영화 현장의 경험이 떠올랐다. 그 순간 영화는 코미디가 아닌 공포물이 되어 버렸다. 뜻대로 되지 않는 현장에서 고군분투하는 감독 ‘닉’의 모습에 연민이 간다. 망각하고 살았던 당시의 힘들었던 나의 감정, 사람들의 말과 표정이 장기기억에서 인출되었다. 신기하게도 그 당시엔 힘들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아름다웠던 추억으로 남는다. 망각하는 동안 그 기억은 아름다워지고 있었나 보다. 우리는 망각 속에 산다. 영화를 촬영하는 것이 엄청난 육체적, 감정적 노동임에도 불구하고, 그 힘든 시간이 지나면 다시 또 촬영하고 싶어 진다. 흔히 영화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영화는 마약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망각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걸음마를 시작한 어린아이가 넘어져도 계속 일어나는 것처럼 니체는 망각을 타자성의 보존으로 본다. 고통은 외부 조건 속에서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일 뿐, 나의 본원적인 소유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화 속 감독과 스텝, 배우들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실수를 잊고, 다시 시작한다. 조금 전의 실수를 망각하고 다시 새롭게 출발하는 것이다. 실수하고, 실패해도 끊임없이 새로 시작하는 망각의 삶을 살고 있다.

<망각의 삶> 스틸 - 여주인공 '니콜' / 고군분투 스태프 / 감독 '닉'

- ‘닉’은 영화 촬영 도중 배우가 그만두고, 중요한 장면에서 스모그 효과를 사용할 수 없게 되자 촬영을 포기한다. 그러나 누구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지고, 씬이 너무나 완벽하게 촬영이 된다. ‘닉’은 다시 촬영을 재개하기로 결심한다.

- 연기에 자신감을 잃은 ‘니콜’은 상대 배우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 자신의 정서적 기억이 살아나고, 리허설에서 완벽에 가까운 연기를 보여주며 모든 스태프를 감동시킨다.


이렇듯 우리 삶은 항상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영화 현장도 계획대로 진행되기란 쉽지 않다. 가끔은 거슬러 올라가지 않고,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것이 더 좋았던 적도 있다.     

<망각의 삶> 스틸 - 사이가 좋지 않은 두 배우 / 그들을 달래는 감독 '닉'

기술적인 표현도 흥미로웠다. 영화 현장의 현실 장면과 촬영 장면이 컬러와 흑백으로 나뉘어 현실과 영화 속 세계를 잘 구분 지어 준다. 각 시퀀스는 문을 열고 닫는 트랜지션을 활용하여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이런 효과는 지나치게 현실적인 촬영 현장을 영화답게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한다. 결국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도 영화이니까. 기억과 망각은 마치 문을 열고 닫는 행위 같기도 하다.


마지막 현장 앰비언스를 녹음하는 30초 동안 각 인물들의 생각을 보여주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우리는 침묵 속에서 많은 생각을 한다. 욕망을 생각하기도 하고, 훗날의 걱정을 하기도 하며, 각자의 상상 속에 시간을 보낸다. 망각했던 것이 떠오르거나 혹은 떠오른 생각이 망각될 것이다.

<망각의 삶> 스틸 - 몰래 썸타는 스태프 / 영화 속 꿈 씨퀀스 장면

우리는 망각하는 삶을 산다. 그것은 단순히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게 하며, 새로운 시작을 하게끔 만드는 인간의 신비한 능력이다. 우리는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망각하고, 망각할 수 있어서 행복한 것일지도 모른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냥의 시간> 우리 꼭 다시 만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