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과 사우나에 진심인 나라, 일본
도쿄까지 가서...
사우나라고?
3일 전, 급하게 찾아봤던 한 줄의 기사 때문이었다. 이번 도쿄여행에서 '사우나'를 해봐야겠다고 급결심하게 된 순간은. 기존 일정에 넣어두었던 동네를 빠르게 포기하고, 부랴부랴 사우나 일정을 아침 8시에 끼워 맞추었다. 결론적으로 그 선택은 옳았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흥미로운 경험 중 하나였으니까.
바로 도쿄 시부야에 위치한 <시부야 사우나스>의 이야기다.
일본은 사우나, 목욕 문화가 매우 발달된 나라다. 그중에서도 일본 MZ세대 사이에서 사우나 붐이 빠르게 퍼지고 있는데, 여러 계기 중 하나로 '사도(サ道)' 라는 드라마가 있다. 한 중년 남성이 오직 '사우나'를 위해 세계를 여행하는 이야기를 담은 동명의 만화가 원작인데, 인기를 끌면서 드라마 제작으로도 이어졌다고 한다.
이번에 방문한 도쿄의 <시부야 사우나스>는 바로 이 만화의 원작자, 타나카 카츠기가 프로듀싱을 맡고 + 웰니스 기업 토요쿠(TOYOKE)가 기획과 운영을 맡아서 만들어졌다. 와, 너무 흥미롭지 않은가? 만화가가 프로듀싱한 사우나라니! 기획과 공간에 관심이 많은 나로서는, 궁금해서 군침이 돌 지경이었다.
공항으로 떠나는 길, 티빙에서 '사도 2021' 드라마를 다운 받아서 미리 예습까지 하면서 더욱 기대감을 품었다. 드디어 그날이 왔다.
시부야역에 도착했다. 여러 지하철역과 대규모 트래픽이 다니는 시부야역은 그야말로 '대도시'다운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이런 곳에.. 사우나가 있다고?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구글맵이 안내하는 길을 따라간다. 저곳이구나.
라이트 그레이의 매끈한 석재 소재로 모던하게 마감된 3층짜리 건물. 일본어 가타카나로 사우나를 뜻하는 'サ' 글자가 큼지막하게 걸려있다. 모르고 지나간다면 그냥 숙소나 카페라고 생각할 만큼, 소란스럽지 않은 외관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신발장과 카운터가 보인다. 카운터에서 능숙하게 영어를 할 줄 아는 직원이 매뉴얼을 보여주면서 안내를 시작한다.
가격은 주말 기준 1인당 3,850엔(한화 약 35,000원). 음... 솔직히 저렴하진 않은 수준이다. 심지어 시간제한도 있다. 남성 2시간 30분, 여성은 3시간 30분을 기본으로 이용할 수 있고, 라운지에서 음료나 식사를 주문하면 연장되는 시스템이다. 함께 방문한 남자친구와는 이따 만나기로 하고 각자 찢어졌다.
사우나 전용 모자와 간단한 음료를 살 수 있는 간이매점 옆, 입구가 있다. 여기서 여탕과 남탕이 나누어진다. 날마다 홀수-짝수날에 맞춰 남녀 순서가 교대로 바뀌는데, 내가 방문한 날엔 4가지 사우나와 2종류 탕을 이용할 수 있었다. (궁금한 테마가 있다면, 해당 테마를 이용할 수 있는 날인지 확인해 보고 방문할 것을 추천한다)
참고로 일본은 기본적으로 누드로 목욕을 즐기는 문화다. 혼욕은 절대 불가! 수영복도 안된다. 무조건 맨몸으로 입장을 해야 한다. 바꿔서 말하면 3시간 동안 휴대폰을 포함한 전자기기로부터 홀연히 떨어져서, 혼자만의 휴식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뜻이 된다. 개인적으로는 디지털 디톡스를 하는 것처럼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단지 휴대폰을 락커에 두고 입장했을 뿐인데 말이다.
(내부는 휴대폰 반입이 금지라, 일부 이미지는 공식 홈페이지의 사진으로 대체한다.)
간단한 샤워를 하고 본격적으로 사우나를 즐겨본다. 개인적으로 3층 공간이 찐이었다. SOUND SAUNA 그리고 KELO SAUNA가 준비되어 있었다.
먼저 사운드 사우나. 20명은 족히 수용될만한 널찍한 공간에, 거대한 원뿔형 스피커가 자리하고 있다. 커다란 타올을 하나 준비해서 구석자리에 앉았다. 사람들이 띄엄띄엄 앉아있는 후끈하고 정돈된 공간에 오직 음악소리만이 들린다. 가사 없는 노래, 굳이 표현한다면 명상 음악과 비슷하달까? (궁금한 분들은 '앰비언트 뮤직'을 찾아서 들어보길 권한다.)
고요히 앉아있으니 쿵쿵 울리는 진동만이 나무 의자를 타고 고스란히 나에게 전달해 온다. 사우나에서 제일 참기 힘든 게 '지루함'이다.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땀을 흘리는 시간이 너무너무 지루해서 곤욕스러운데, 여기서는 달랐다. 음악이 들리니까. 가만히 눈을 감고 앉아서 음악에 정신을 기대었다. 고요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이 순간에 빠져드는 기분이 들었다. 따뜻한 열기가 발 끝에서부터 구석구석 차분하게 차올랐다.
5분이나 되었을까? 점점 더워지는 게 느껴졌다. 밖으로 나와 간단히 주물 바가지로 물을 끼얹어 땀을 씻어내고, 이번에는 냉탕으로 향한다. 이곳에 있는 탕은 모두 냉탕인데, 써보고 나니까 이유를 알게 되었다. 진짜 뼛속까지 시원해지는 느낌이 든다. 정신이 번쩍 든다. 차마 전신입수는 못하고 살짝 다리를 담가 열기를 낮춘다.
... 아, 이젠 너무 추워져버렸다. 어떡하지? 다음 사우나로 향할 수밖에.
이곳은 맞은 편의 KELO SAUNA다. 딱 2명 들어가는 아담한 동굴 같은 공간이다. 실제로 가면 훨씬 어두운데, 너무 좋은 게 나무 냄새가 솔솔 난다. 원래는 사우나 공기가 너무 뜨거워서 입으로만 숨을 쉬는 편인데, 여기서 코로 한 번 숨을 쉬어보고 깜짝 놀랐다.
숲 한가운데 들어와 있는 것처럼 신선한 향기가 훅 치고 들어왔다. 알고 보니 사우나의 본고장, 핀란드에서 직접 수입한 나무라고 하더라. 골방처럼 후끈한 나무 냄새 가운데 둘러싸여서, 수건을 덮고 후하후하 숨을 쉬어본다. 참을 수 없게 뜨겁지만 또 참을만하다.
맞은 편의 일본인이 '물을 더 부어도 되겠냐'는 뉘앙스로 내게 묻는다. 고개를 끄덕였다. 취이이이익- 뜨겁게 달구어진 돌 위로 물이 한 국자, 두 국자 또르르 떨어진다. 곧바로 뜨거운 증기가 사우나 안을 뒤덮는다. 하.... 너무 뜨거운데 좋잖아.. 이중적인 마음이 들면서 잠시 후 바깥으로 나왔다.
나무통에 담긴 미온수로 간단하게 땀을 씻어내고, 이번에는 가운데 펼쳐진 중정에 앉는다.
여기.. 진짜 미쳤다. 이 성스러운(!) 경험은 세상 사람들이 다 해보면 좋겠다. 차가운 야외의 바람을 그대로 맞을 수 있는 공간이다. 어디선가 부드러운 자연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이런 걸 '풍욕'이라고 하던가? 뜨거워진 온몸 곳곳을 매섭도록 차가운 겨울바람이 훑고 간다.
뇌 속까지 뜨겁고 지끈지끈했던 머릿속이 한 줄 바람에 가뿐해진다. 생각해 보자. 홀딱 벗고 맨몸으로 자연의 쌩바람을 맞아볼 일이 살면서 몇이나 있을까. 그 귀한 경험을 바로 이곳에서 할 수 있다. 뜨거운 사우나에 머물다 나온 터라 겨울 공기 속에 맨몸으로 있어도 생각보다 썩 춥지 않다. 무척 시원하고 개운하다.
이런 식으로 나무에 둘러싸여서 자연의 바람을 고스란히 즐길 수 있다. 중간중간 하얀 안개처럼 미스트도 뿌려주어서 더욱 몽환적이고 시원한 느낌이 든다. 고백하자면 나는 원래 사우나를 별로 즐기지 않는 편이었다. 뜨거운 게 싫어서. 참을성이 없어서 금방 뛰쳐나오는 바람에 '땀 빼는 시원함'에 대해서 평생 잘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그 기분이 뭔지 이곳 '시부야 사우나스'에서 눈을 떴다. 뜨거운 사우나 10분 - 냉수욕 2분 - 바람 맞기 10분. 이 루트를 반복하는데.. 후반에는 정말이지 극락 가는 기분이 들더라.. ㅋㅋ 특히 자연 바람을 그대로 맞는 시간이 참 좋았다. 발꼬락 하나하나에 산뜻한 바람이 싹 훑고 가는데 여행의 고단함이 함께 사라지는 것 같았다. 바깥으로 나가면 시부야가 아주 엄청난 교통의 요지이면서 수많은 관광객이 드나드는 복잡한 입지인데도 불구하고 - 사우나 안에 있는 시간만큼은 멀리 핀란드로 여행을 떠나온 듯, 조용한 자연 속에 침전하는 듯한 심리적 착각이 들었다.
사우나 자체도 물론 훌륭했다. 4가지 테마로 각각 다른 방식의 사우나를 체험해 볼 수 있고, 하나하나의 완성도가 엄청났다. 고급 자재로 꼼꼼하게 설계한 고객 경험이었다. 게다가 모든 방식이 그 자체로 '자연'스러웠다. 기계식으로 00도에 맞춰서 일정하게 유지하는 온도가 아니라, 뜨겁게 달군 돌에 손님이 직접 물을 부어서 기화하는 수증기로 공간을 데우는 자연 그대로의 방식이었다.
또한 물바가지 하나도 플라스틱을 쓰지 않았다. 모두 돌, 나무 같은 천연의 재료로만 활용해서 사우나를 구성했다. 인위적인 방향제가 아니라, 나무에서 뿜어 나오는 자연 그대로의 향기가 솔솔 느껴졌다. 모든 것은 마치 내가 '자연 속'에 들어와 있다는 생생한 착각이 들도록 만들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여긴 너무나도 도심 속에 위치한 공간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뜨거운 사우나와 찬바람 맞기를 반복하다가 - 가볍게 씻었다. 샴푸, 바디워시는 물론이고 페이스 워시와 각종 스킨, 로션까지 모든 씻을 거리가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었다. 누구나 준비물 없이 편하게 들러도 언제든지 사우나를 즐기고 갈 수 있겠더라. 구비된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고 한결 산뜻해진 기분으로 바깥으로 나왔다.
로비에 위치한 라운지. 여기서 간단한 식사와 카페음료를 즐길 수 있다. 목욕을 마치고 바나나 우유 대신 - 카레, 라멘, 콜라, 맥주 같은 음식을 먹는 셈이다. 실제로 현지인들은 여기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한편에 위치한 굿즈. 사우나 티셔츠 하나 사 입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보았다.
마지막으로 손목 밴드를 기계에 넣고, 정산을 하면 끝! 평일, 평일 오전에는 할인도 되던데 다음에 도쿄에 놀러 온다면 평일에 부담 없이 오고 싶더라.
마치고 나니, 확연하게 개운해진 몸과 마음으로 하루의 일정을 시작할 수 있었다. 모든 건 사우나 덕분이다. 휴대폰을 락커에 놓아두고 2시간 30분 동안 - 오롯이 나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면서 머릿속을 텅 비우고 온전히 휴식을 즐길 수 있었다.
맨몸으로 바람을 맞으면서 '내가 여기에 있다'라는 날것의 감각을 생생하게 느꼈다. 매일 집과 사무실을 반복하는 일상 속에서는 체감하기 힘든 기분이다. 살아있다. 단순한 진리를 오롯이 피부로 감각하는 순간이었다.
문득 오감은 '벗게 하는데서 시작하는 게 아닐까?' 재미난 상상도 해보았다. 신발 벗고, 옷 벗고, 스마트폰을 내려두고, 온전히 내 피부와 두 눈과 코로 감각하는 시간들 속에서 그간 둔해졌던 오감이 생생하게 살아났으니까. 어쩌면 쏟아지는 정보와 광고로 지쳐버린 우리들에게는 태초의 나로 돌아가는 시간이 필요했던 게 아니었을까.
다시 도쿄에 온다면, 시부야 사우나스는 다시 한번 들러보고 싶다.
방문 전, 보고 가면 좋은 읽을거리들
1. 사우나 굿즈 매출이 연 3억? 시부야 SAUNAS 기획 비하인드
https://www.folin.co/article/8595
2. 명상하고 음악 듣고… 굿즈까지 만든 사우나 [비크닉]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59754
3. 만화가의 철학이 기획한 사우나, '계획적인 비집중'을 권하다
https://cityhoppers.co/content/story/shibuyasaunas
* 시부야 사우나스 공식 홈페이지
https://saunas-saun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