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만의 방 2020 ver.

by 노력하는 행아


"인간은 자신의 환경을 지배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그 환경에 지배당할 수밖에 없다." 에이모 토올스의 소설 <모스크바의 신사>에 나오는 대목이다. 주인공 알렉산드르 일리치 로스토프 백작은 혁명 정신이 쇠락했다는 이유로 메트로폴 호텔 다락방에서 평생 연금 상태로 지내게 된다. 스위트룸에서 다락방으로 쫓겨난 후 백작은 어떻게 하면 환경에 지배당하지 않을 수 있는지를 고민한다. 고민 끝에 백작이 수를 써서 구입한 건 질 좋은 리넨 침구, 평소 좋아하던 비누 네 개 그리고 밀푀유 한 상자였다.

누군가는 백작이 쓸데없는 데 돈을 썼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백작과 같은 부류인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며 크게 감탄했다. 백작은 공간의 중요성을 아는 자다. 백작의 목표는 단순히 목숨을 연명하는 게 아니다. 그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며 '잘' 살아남고 싶어했다. 그래서 9평 남짓한 다락방에 조금씩 자신의 일상을 묻히기 시작한 것이다.

공간을 지배하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어느 정도의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사실은 정성도) 나는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 혼자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그때는 돈이 없으니까 부모님이 나눠주시는 살림살이로 집을 채울 수밖에 없었다. 집주인이 새로 도배해준 화려한 자주색 꽃무늬 벽지, 제각기 다른 모양과 색인 개성적인 침구, 냉장고 사이 빈틈에 처박아 뒀다가 라면을 끓여먹을 때 꺼내야 하는 작은 접이식 상까지. 내 이상과는 커다란 괴리가 존재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스스로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공간에 대한 지배력이 조금씩 높아졌다. 물론 여전히 돈이 없으니 최대한 인테리어가 깔끔하고 전자제품 옵션이 많은 공간을 구했다. 대신 여윳돈이 생길 때마다 공간을 바꿀 물건들을 구입했다. 바닥생활을 벗어나려 침대를 구입했고, 오래된 차렵 이불 위에는 촉감 좋은 커버를 덧씌웠다. 책상 위 블루투스 스피커는 감미로움을 더해주고, 창가에 놓인 야자나무, 산세베리아, 선인장, 율마는 도시의 삭막함을 감해준다. 벽에 가득 붙여놓은 사진 속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다시 보고 싶은 풍경들이 담겨 있다. 조금씩 이곳은 나라는 사람에게 최적화된 공간이 되었다.

이렇게 하나하나 애정을 담아 꾸몄기 때문인지 이 공간의 의미는 남다르다. 지금껏 여러 자취방을 거쳤지만 내게는 '방'에 불과했다. 잠시 필요에 따라 돈을 주고 머무는 방이었다. 좀처럼 정이 들지 않아, 지방에 있는 본가에 한 번 가면 서울에 있는 방으로 돌아가기 싫었다. 넓고 쾌적한 아파트를 떠나 비좁은 방으로 돌아가면 좁아진 만큼 우울해지곤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실 외적으로 크게 달라진 건 없다. 여전히 세를 들어 살고, 공간의 크기도 거의 비슷하다. 하지만 내 체취를 가득 묻혀놔서인지 이제 그곳은 '방'이 아니라 '집'이 되었다.

"인간은 자신의 환경을 지배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그 환경에 지배당할 수밖에 없다." 나는 이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호시탐탐 환경을 지배할 수 있는 기회를 노렸고, 결국은 내 공간을 만들었다. 서울의 값비싼 부동산 시세가 나를 7평 남짓한 공간으로 내쫓았지만, 백작처럼 굴하지 않았다. 오늘도 나는 바닥에 온기를 더해줄 자그마한 러그와 후식으로 먹을 딸기 초콜릿 조각 케이크를 품에 안고 아늑한 나의 집으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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