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 대하여>를 읽고

by 버리이아

한 사람의 마음을 온전히 안다는 것. 과연 가능한 일일까요? 누군가의 마음을 확실히 아는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일 겁니다. 그건 타인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죠.


나는 남편이 남겨준 집 한 채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 있는 딸과 나의 생계를 위해 젊었을 때부터 교사, 보험 판매원 등 안 한 일이 없었습니다. 현재도 요양보호 병원에서 요양보호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나의 딸은 대학 시간강사인데, 현재 동성의 애인과 함께 내 집에서 월세로 살고 있습니다. 아닌 걸 아니라고 말 못 하는 딸아이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입니다. 그래서 내 집에 월세로 들어온 첫날,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2층의 남자와 말싸움을 하고 경찰에 신고를 하죠. 내 딸은 2층의 피해자 아내가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핑계로 사건 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경찰에게도 항의합니다. 그만큼 주변 눈치를 보지 않는 어떻게 보면 참 당돌한 성격의 아이입니다. 나는 내 딸아이를 그린이라 부르며 딸아이와 7년 동안 교제하고 있는 딸아이의 애인이 밉습니다. 마치 그 아이가 내 딸아이의 평범한 미래를 빼앗는 것 같습니다. 시간강사로 일하며 경제력이 부족한 내 딸아이를 식당의 주방보조로 일하며 7년 동안이나 뒷바라지한 그 아이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요양병원에서 내가 간호하고 있는 '젠'은 빛나는 젊은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젠은 가족 하나 없는 볼품없는 치매노인일 뿐입니다. 빛나던 젊은 시절의 활동 경력으로 병원에서 특별 관리를 받던 젠이었지만, 사람들에게 잊혀져 가는 치매 노인은 결국 병원에서마저도 그 이용 가치를 잃어버리고 폐기 처리돼 듯 여기보다 더 질 낮은 요양 시설로 옮겨지게 됩니다.


내 딸은 동성애 동료의 부당한 해고에 맞서 대학과 싸웁니다. 그러나 그 싸움은 처음부터 끝이 보이는, 승패가 결정된 싸움이었습니다. 다수의 주류와 소수의 비주류의 싸움이기 때문이죠. 소수자인 딸을 이해하기보다 다수의 주류사회로 돌아오라고 말하는 나처럼 주류사회는 소수자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딸은 그런 나에게 엄마가 나를 한 번이라도 이해해 주면 안 되냐고 소리치죠. 내 딸과 내 딸아이의 동료들은 싸움을 하면 할수록 더한 고통과 피해를 겪게 되고, 나는 그 싸움에서 내 딸애가 아닌 다른 사람이 다친 것에 죄책감을 함께한 안도만 할 뿐, 딸아이의 싸움에 어떠한 도움도 줄 수가 없습니다.


나는 이 사회에서 내 딸아이가 평범한 삶을 살기를 바랐습니다. 그저 내 딸아이가 다른 이들처럼 적당한 남자와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기 바랐습니다. 나는 딸아이가 내가 누리지 못했던 걱정 없는 인생을 살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왜 딸애는 내가 다른 사람에게 떳떳하게 말할 수도 없는 그 길을 가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해하기를 노력할 수 있음에도 그것이 이 사회에서 얼마나 큰 아픔과 큰 멍에가 되는 것인지를 잘 알기에. 나는 나의 딸을 끝끝내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딸에 대하여>는 주인공 나의 독백 소설이면서 한국 사회 소수자의 단면을 그리고 있는 사회소설입니다. 주요 인물만 봐도, 나는 젊었을 때 남편을 잃은 과부로 남편이 남겨준 집이 있지만 늘 돈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내 딸아이는 동성애자이자 계약직 대학 시간강사입니다. 그리고 젠은 가족이 없는 무연고자 노인이죠.

주요 인물 외에도 주인공의 2층 집에 세 들어 사는 가족, 주인공의 요양보호사 동료인 교수부인과 새댁도 돈에 여유롭지 않습니다. 이들은 자의건 타의 건 한국 사회에서 소외자가 되었습니다. 어렸을 때 가장 쉬운 일인 줄 알았던 평범한 삶이 그들에게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주류가 되지 못한 소외자의 삶이 얼마나 비참한 지 주인공인 나는 그동안 살아온 나의 날들로, 그리고 젠의 비참한 말년을 보며 체득합니다. 작가는 한 번 삐끗해서 평범의 단계에서 떨어지면 다시 그전 단계로 돌아가는 것이 이 한국 사회에서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이 소설에서 반복적으로 말합니다. 젊었을 때 이 사회를 위해 얼마나 노력을 했던, 불의를 참지 못하고 정의를 위해 앞장을 서도 그게 사회의 비주류가 되면 모두 말짱 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가족이라는 가치에 목숨을 겁니다. 마지막에는 내 속으로 낳은 내 피붙이만이 유일한 버팀목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생식 활동을 할 수 없는 딸과 딸의 애인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유분방하고 젊은 날을 보낸 젠에게서 내 딸의 미래가 투영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돌봐주는 가족도 없는 비참한 말년. 젠이 평생을 후원했던 필리핀 소년은 그녀의 비참한 소식을 듣고도 시큰둥한 태도를 보이고, 그녀의 젊음을 증명해주는 것은 쓰레기나 다름없는 몇 개의 표창장이 전부이죠. 그런 젠에게서 나는 아마도 미래의 딸아이의 모습을 보았고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처럼 그녀를 매정하게 뿌리치지 못했을 겁니다. 그렇게 가족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던 내가 친가족이 아닌 젠을 집으로 데려오고 젠의 인생의 마지막을 함께하죠.


이 소설에서 나와 소외자들은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하다못해 성도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기득권층은 사회에서 그들이 차지하는 직급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젠을 사무적으로 처리하는 요양병원의 권과장이 대표적입니다. 그리고 사회의 비주류이지만 사고방식은 사회의 주류와 다름없는 교수부인은 주류의 입김이 강한 '교수'부인이란 직함으로 불리죠. 익명의 이름 뒤에 숨은 소외자들은 글을 읽는 이들에게 이것이 어느 특정인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소설의 마지막, 나와 딸아이와 딸의 애인 그리고 젠이 함께한 평화로운 오후. 이들은 단란한 가족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런 일련의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내 딸과 딸의 애인의 관계에 대해서 어느 정도 마음의 문을 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나는 나의 입으로 내 딸과 딸의 애인의 동성애를 인정하지 못합니다. 내가 그녀들의 관계를 인정한다 해도 이 사회에서는 그것이 아무런 도움도 안 된다는 걸 몸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문학은 사회의 한 면면들을 반영합니다. 우리가 이 소설에서 소수자들이 사회에서 받는 고통과 괴로움에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면, 그것은 우리 사회가 소수자들에게 이 소설보다 더 잔인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소설의 저자가 여자이고, 등장인물이 모두 여자라고 해서 이 소설이 여성만의 문제로 한정하고 그리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레즈비언 커플을 게이 커플로, 여성 독거노인을 남성 독거노인으로 바꿔도 전혀 이상하지 않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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