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장님 뒷담화를 부장님께 하다

by yobi

한참 전 내가 이직한 지 3년쯤 되었을 때의 이야기이다.

무슨 일이었는지는 이제 기억도 나지 않지만

하여튼 내가 진행한 어떤 업무에 대해 부장님이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셨던 것 같다.

부장님은 방에서 나와 나에게 이런저런 말씀(질책)을 하시고는 담배를 피우러 밖으로 나가셨다.

기억하기론 내가 당시에 예민했는지, 부장님이 예민했는지, 어쨌거나 서로 좀 쌓인 게 있었던 것 같다.

부장님 말씀이 괜히 와닿지 않았고, 납득이 되지 않았고,

모든 걸 떠나 그냥 기분이 나빴다.

옆에 다른 직원도 있었는데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 채팅창을 열고 그 직원에게 한 마디 적었다.


에휴... 내가 이러구 삽니다.


그런데, 답이 없다. 바쁜가?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얼른 채팅창을 다시 확인했다.

오 마이갓.


부장님 채팅창이었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부장님이 보시면 끝장이다. 어떻게든 지우자.

사무실에서 담배 피우는 곳까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14개 층을 내려가야 한다.

담배 한두 대 피우고 오시는 시간까지 감안하면 나에겐 짧게는 10분, 길게는 20분의 시간이 있다.

미션 임파서블 수준으로 머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얼른 몸을 일으켜 살며시 부장님 방으로 잠입했다.

키보드를 건드리자 컴퓨터 화면이 떴다.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아 어쩌지... 정신 차리자. 비밀번호... 아 맞다 회사 컴퓨터는 처음 지급될 때 비밀번호가 사번으로 세팅되어 있다. 부장님이 그걸 공들여 바꾸었을 리 만무하다. 부장님 사번이...

'타다닥 타다닥'. 역시.

화면이 열리자 이메일 화면이 떠 있었고 그 오른쪽 아래에 열린 채팅창에 부하직원의 메시지가 떠 있었다.

"에휴... 내가 이러구 삽니다"


어떻게 지우지? 메시지 삭제 기능이 있었던가?

발을 동동 구르는데 갑자기 암울한 생각이 떠올랐다.

채팅은 PC모드도 있지만 핸드폰 모드도 된다.

그렇다면...

이미 담배를 피우시며 내 메시지를 보고 계실 수도 있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미션 임파서블은 무슨...

포기하자. 자수하자.

엘리베이터 앞에서 부장님이 올라오시길 기다렸다.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오셔서인지 마음이 한결 가라앉은 편안한 얼굴이다.

게다가, 내가 겁먹은 눈빛이지만 만면에 웃음을 띠면서

'부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하고 알랑방귀를 뀌고 있지 않은가.


"부장님, 아까 그러고 나가시니까 제가 그냥 O과장에게 채팅으로 넋두리한다는 게 그만 부장님께 채팅을 했습니다.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


부장님은 아무 말 없이 나와 함께 방으로 가서 컴퓨터를 바라보셨다. 그런데 단 1초만 보시고는 바로 나를 향해 돌아 앉으셨다. 얼굴에 아빠미소가 가득하다.


"이 과장, 내가 아까 한 얘기는 그냥 내 생각이 그렇다는 거예요. 혹시라도 맘 상했으면 내가 미안하지. 잘 한번 들여다보고 다시 한번 가지고 와 봐요."

특유의 느릿느릿한 중저음 목소리. 고마웠다.


당시 일주일에 한두 번은 모두 함께 회식을 하던 때였고

그 일은 한두 번 술안주 거리로 올랐을 뿐 더 이상 거론되지 않았다.


지금도 나는 카카오톡 단체방에 글을 남길 때면 방 이름을 두 번 세 번 확인한다.

다시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그리고 내가 그런 일을 겪으면 그 부장님처럼 멋있게, 뒤끝 없이, 쿨내를 진동시키며 넘겨야지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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