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 행운은 불행의 가면을 쓰고 온다
뜻밖에 덴마크 두 달 살이
“여보, 우리 덴마크에 갈까요?” 평소보다 일찍 집에 돌아온 남편이 물었다.
8월 안에 미국을 나가야 했다. 한국에 갈지 했지만 1월과 5월에 두 번이나 다녀왔는데 또 가기는 싫었다. 남편은 친분이 있는 외국 교수들에게 연락해, 자신이 도울만한 연구가 있는지 물어봤고, 다행히 덴마크에 있는 오르후스 대학교의 교수가 실험에 필요한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들어달라고 했다. 월급은 없지만 숙소를 제공해 주는 조건이었다.
오르후스는 덴마크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자 해양 도시다. 지난 12월에 남편이 생명 공학 관련 학회에서 발표할 때 같이 왔었다. 겨울에는 오후 4시에 해가 진다. 기온이 영하까지 떨어져 밖을 돌아다니기가 힘들었지만, 작은 골목 위에서 반짝이는 조명이 빛나는 별 같았다. 사랑스러운 연말 분위기였다.
덴마크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은 코펜하겐에서 보냈다. 3주 전에 예약해 놓은 <코케리에>라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불꽃처럼 생긴 해초 튀김, 검은 조약돌 모양의 젤리 등. 이제까지 경험해 본 적 없는 예술 같은 요리를 맛봤다. 식당에서 나오자 다른 차원에서 현실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찬 바람이 부는 밤거리를 남편의 팔짱을 끼고 걸으며 말했다. “언젠가 꼭 다시 오고 싶어요.”
그로부터 8개월 만에 돌아온 거다. 코펜하겐역에서 기차를 타고 세 시간 후에 오르후스에 도착했다. 택시를 잡으려다 깜짝 놀랐다. 검은색 메르세데스 벤츠 E 클래스가 줄지어 서 있었다. 벤츠 택시를 타고 들뜬 기분으로 대학교 캠퍼스 안에 있는 숙소에 도착했다. 2층으로 올라가 문을 열었더니, 인테리어 잡지에서 본 듯한 공간이 나왔다. 은은한 상아색 벽지에 밝은색 나무 바닥이 깔려있고, 같은 톤의 원목 탁자와 짙은 회색 천 소파가 놓여 있었다. 벽에는 태양과 바다를 연상시키는 커다란 추상화가 걸려있었다. 자연광이 들어오는 커다란 창문으로 녹색 나무들이 보였다. 드디어 꿈에 그리던 신혼집에 온 것 같았다. 덴마크의 여름은 겨울과 180도 달랐다. 백야라 저녁 8시가 되어도 밖이 환했다. 낮에는 따뜻하고 밤에는 선선해서 야외 활동을 하기에 딱 좋았다. 식당 야외 테이블은 일광욕을 즐기며 맥주와 와인을 마시는 사람들로 꽉 찼고 거리에는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지나갔다. 온 동네가 축제 분위기였다. 그 모습을 보고 “여기가 천국이네”라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비자 날짜를 잘못 적은 직원에 향한 원망은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실수하지 않았다면, 북유럽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소원을 이루지 못했을 거다. 이후로 ‘때때로 행운은 불행의 모습을 하고 온다’라는 말을 좋아하게 되었다. 모든 일은 시간이 지나야 그 일의 결과를 제대로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나는 규칙적으로 생활했다. 아침 7시에 일어나 그릭 요구르트, 사과, 잡곡빵, 삶은 달걀, 커피를 먹고 오르후스 대학병원까지 남편 손을 잡고 걸었다. “좋은 하루 보내요!” 포옹하고 시가지로 갔다. 골목 초입에 있는 작은 북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오늘은 어떤 하루를 보낼까?’ 궁리했다. 벽면 가득 꽂혀있는 요리책을 꺼내보기도 하고, 사진집을 넘기기도 했다. 카페에서 나와 시내 중심부로 들어가면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바닥에는 돌이 깔려있고 그 위에 중세 시대 건물들이 서 있다. 사람들은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시간여행을 온 것만 같다. 오밀조밀 모여있는 조명 가게, 소품 가게에 들어가 보고 빵집에서 갓 구운 빵을 골라 담았다. ‘이 골목에는 뭐가 있을까?’ 궁금해하며 매번 다른 골목에 들어갔다.
정오가 되면 마트에 들러 식재료를 구경했다. 언뜻 보기에는 미국 마트와 비슷해 보이지만, 라벨에 적힌 덴마크어를 보면 내가 덴마크에 있다는 것이 실감 났다. 손톱만 한 삶은 새우를 한통 사 와서 바싹하게 구운 잡곡빵에 아보카도와 함께 올려서 먹으면 맛있다. 느긋하게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블로그에 글을 쓰다 보면 5시다.
오전에 사 온 신선한 재료로 요리하고 있으면 남편이 온다. 식탁에 마주 앉아 시원한 백포도주를 마시며 저녁을 먹으면서, 그날 내가 본 것을 이야기했다. 설거지와 뒷정리까지 했는데도 밖이 환하다. 소화도 시킬 겸 나가서 산책했다. 평화롭고 행복했다. 결혼 일 년 만에 두 번째 신혼을 선물 받은 것 같았다.
그때는 몰랐다. 여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역경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꿈 같았던 두 달을 9년 넘게 그리워하게 될 줄은. 살다 보면 가끔 선물 같은 시간이 주어진다. 그럴 때는 앞으로를 걱정하기보다 온전히 즐기는 게 남는 장사다. 행복한 시간은 찰나다. 한번 지나가고 나면 언제 다시 올지 알 수 없다. 지금 마음껏 기뻐하면 언젠가 힘든 일이 닥쳐도 이겨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