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잊지 못할 시간
매주 목요일 오전에는 오르후스 뮤지엄에서 하는 모임에 나갔다. 이탈리아, 독일, 폴란드, 러시아 등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을 만났다.
카멜리아는 이탈리아에서 온 50대 여성으로 음식 이야기를 하다가 친해졌다. 하루는 바다가 보이는 그녀의 아파트에서 같이 요리했다. 그녀는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오래된 나무판을 꺼내 파이지를 만들고, 그 안에 딸기잼을 듬뿍 넣어 ‘크로스타타’를 만들었다. 나는 해물파전을 부쳤다. 마침 학교에서 돌아온 그녀의 아들이 음식을 먹고 있던 우리 사진을 찍어주었다.
그날 저녁, 블로그에 사진을 올리고 일기를 쓰다 그런 생각을 했다. 좋든 싫든 외국에서 나는 ‘한국’을 대표하는 존재구나. 그러니 제대로 행동해야겠다.
폴란드에서 온 조안나는 오르후스의 역사와 문화에 해박했다. 사람들을 데리고 다니며 도시 곳곳에 있는 건축물과 예술 작품을 보여주었다. 설명은 또 얼마나 재밌게 해주는지. 전에는 있는 줄도 모르고 지나쳤던 설치미술도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도시에 대해 알아갈수록 애정도 커졌다. 사람처럼. 나도 언젠가 내가 사는 도시에 온 사람들에게 그곳에 대해 알려주고 싶다.
온 김에 북유럽의 다른 나라에도 가보고 싶었다. 마침 한국에서 퇴사한 친구가 오기로 했다. 우리는 코펜하겐 공항에서 만나 기차를 타고 오르후스로 왔다. 사흘 후에 기차를 타고 스웨덴 스톡홀름에 도착했다. 높은 건물보다 널찍하고 웅장한 건물이 많았다. 사진에 담아보려고 해봤지만, 아무리 멀리서 찍어도 다 담을 수가 없었다. 기념품 가게에서 엽서를 뒤져봐도 실제만큼 나온 사진을 찾을 수 없었다. 세상에는 내 눈으로 직접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다.
스웨덴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예테보리와 친환경 도시로 유명한 말뫼에도 갔다. 도시마다 독특한 매력이 있었다. 그런데 어디를 가도 공통으로 보이는 것이 있었다. 자기 자리에서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수산시장에서 부지런히 생선을 진열하는 직원, 집중해서 커피를 내리는 바리스타, 아이 셋을 자전거 앞뒤에 태우고 가는 엄마. 그들을 보며 나도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정성스럽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어느새 한 달 반이 지났다. 남편 일도 마무리되었다. 숙소는 무료지만 생활비가 비싸다 보니 수중에 남은 돈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핀란드와 노르웨이에 가기로 했다. 돈도 중요하지만, 북유럽을 여행할 기회는 쉽게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지금 할 수 있는 경험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 선택은 ‘신의 한 수’였다. 특히 ‘송네 피오르’ 여행은 평생 기억에 남을 만큼 특별했다. 동이 트기 전에 베르겐역에서 기차를 타고 보스라는 동네에서 버스를 탔다. 구불구불한 절벽을 따라 내려오는데 낭떠러지가 내려다보였다. 자칫하면 굴러떨어질 것만 같아 오금이 저렸다. 구드방겐에서 페리를 타고 잔잔한 호수와 시원한 폭포를 지나 플롬에 닿았다. 산 위에 있는 식당에서 푸짐한 폭찹 하나를 둘이 나누어 먹었다. ‘미스터 리’라는 이름의 컵라면도 먹고 싶었지만 한국돈으로 만 원이나 했다. 빨간색 산악 기차를 타고 뮈르달 역에 내려서 야간 고속열차를 타고 5시간 반을 달려 오슬로에 도착했다. 십 년이 지난 지금도 몇몇 장면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누구나 살다 보면 문제가 생긴다. 문제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문제는 새로운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만약, 남의 실수로 비자가 만료되어 미국을 나가야 했을 때, 우리가 화를 내며 한국으로 갔다면 어땠을까? 두 달 동안 덴마크에서 살지도, 북유럽 나라들을 여행하는 기회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그 시간을 소중한 선물처럼 간직하고 있다. 이후 힘들 때마다 떠올리면 큰 힘을 얻었다. 지금도 나는 문제가 생기면 그 당시를 떠올린다. 그리고 스스로 상기시킨다. ‘때때로 행운은 불행이라는 가면을 쓰고 온다. 그리고 그 가면을 벗길 수 있는 것은 나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