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한국 자살률, OECD 1위…2위와도 압도적 격차 '씁쓸'
2023년 5월 8일, 머니투데이에 차유채 기자가 쓴 기사의 헤드라인이다.
2018년 부터 2020년까지, OECD 42개의 회원국 중에 한국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나는 그 기사를 읽으며 여러 얼굴을 떠올렸다.
스물다섯 살의 설리, 스물여덟 살의 구하라, 스물일곱 살의 정다빈, 그리고 스물여섯 살이자 나와 같은 해인 1981년에 태어난 유니. 지금 이 세상에는 없지만 영원히 젊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아있을 그들.
나는 만약 그들이 살아있었다면,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를 상상한다. 어쩌면 설리는 자신이 패션브랜드를 론칭했을지도 모른다. 구하라는 자식이 겪은 경험을 나누고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 여성들을 돕는 강연자가 되었을 수도 있다. 정다빈은 자신의 눈웃음을 꼭 닮은 여자아이를 키우고 있을 것 같다. 2024년 마흔두 살이 된 유니는 어떻게 되었을까?
모르겠다. 누구도 알 수 없을 거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제 이곳에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시간은 그날 멈춰버렸다.
마흔 정도가 되면 한 번 정도는 수면마취를 해 본 적이 있다. 나는 여러 번 해봤다. 편도선 수술, 위내시경, 대장내시경, 입술 필러 시술, 그리고 굳이 말하고 싶지 않은 경우까지 포함해서다. 침대에 누워 눈부신 조명을 보고 있으면 마취과 의사가 와서 말한다.
"천천히 하나부터 열까지 세어보세요."
"하나, 둘, 셋......"
나는 정신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과 함께 잠이 든다. 아니, 잠이 들었다는 것도 알지 못한다. 누군가 나를 깨운다.
"환자분, 괜찮으세요? 메슥거리지는 않으시고요?"
분명히 이제 막 셋을 센 것 같은데 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그대로 더 자고 싶다. 이대로 그냥 내버려 두었으면 좋겠다. 아쉽지만 다음 환자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비현실적일 만큼 깊고 달콤한 잠에 다시 빠지고 싶다고 생각하며 침대에서 일어난다. 내가 겁 없이 다시 수면 마취를 받고 싶어 하는 이유는 깨어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성공 가능성이 낮은 수술을 받게 되어 이대로 영영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면 어떨까? 나는 마취약이 효력을 나타낼 때까지 숫자를 세면서 어떤 생각을 할까. 어떤 감정을 느낄까. 나의 시간이 이대로 멈춰버린다는 것을 아는 사람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내가 느낀 것은 두려움과 미안함이었다.
스물여섯에 죽어야겠다고 다짐했을 때. 나는 어떤 식으로든 내 몸이 상처를 입은 채로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느끼게 될 고통이 무서웠다. 그리고 자신이 애지중지 키운 자식의 망가진 모습을 보게 될 부모에게 미안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엄마와 아빠는 그런 일을 감당해야 할 만큼 잘못한 것이 없었다. 특히 아빠는 이미 자신의 막내 동생을 그렇게 보냈다. 그리고 한동안 혼이 나갔었다. 오래도록 동생을 구하지 못한 자신을 원망했었다. 심성이 착하고 마음이 약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아끼던 막내딸이 죽는다면 제대로 살아갈 수 없을 가능성이 높다. 그 때문에 나는 죽고 싶지만 맘대로 죽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진짜 나 대신 스물여섯 이전의 자아를 죽이기로 했다. 새로운 나를 데리고 다른 세상으로 가서 새롭게 키워보기로 했다. 죽지 않기 위해 살았던 하루하루였다.
어느새 나는 마흔두 살이 되었다. 스물여섯 살에 인터넷에서 '고통 없이 죽는 방법'을 검색하던 나는 이후로 십육 년을 더 살았다. 그 사이 여러 명의 자아를 더 죽이고, 그때마다 새로운 자아를 데리고 다른 곳으로 갔다. 지금은 십 년 넘게 미국에서 살고 있다. 교외에 마당이 있는 집에서 남편과 아이와 함께 산다. 이십 대의 나는 사십 대의 나를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현재의 내가 아는 것을 반도 알지 못했다.
한국에서 20대, 30대 자살률이 높아진다는 뉴스를 볼 때마다 설리와 구하라와 정다빈과 유나를 떠올린다. 스물여섯에 죽으려고 했던 나로 돌아간다. 지금 같은 선택을 할까 말까 고민하는 20대의 당신을 생각한다. 세상과 내가 분리된 것 같은 괴리감. 나만 공기가 통하지 않는 방에 갇힌 것 같은 답답함. 아무도 나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은 소외감. 그래서 수면마취에 빠져들듯 달콤하고 편안한 잠에 빠지려고 하는 당신.
나는 당신이 얼마나 힘든 상황인지 모른다. 당신이 겪는 고통을 감히 상상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오늘은 죽지 말고 살아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언제 숨통이 트일지는 모른다. 나도 6년 넘게 깊은 바다에 들어갔다가 겨우 수면에 올라와서 짧은 숨을 쉬고 다시 잠수하는 해녀처럼 살았다.
그렇게 살다보니, '그때 죽지 않기를 잘했다'라고 생각하게 될 날이 왔다. 살다 보면 온다. 살아야만 온다.
이제까지 나는 <브런치>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생각나는 대로 써왔다. 이번에는 더 이상 이십 대에 스스로 세상을 떠나는 사람이 없기를 바라면서 소설 형식으로 글을 쓰기로 했다.
이 이야기의 일부는 현실에서 영감을 받았다. 그러나 등장인물과 사건들은 모두 상상으로 만들어졌다. 실제와 닮아 보일 수 있지만, 이는 우연의 일치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