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땅에 헤딩하기
나는 수백 명의 관객 앞에 서 있었다. 사방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눈이 부셨다.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겠다. 수백 개의 눈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혹시 옆에 서 있는 청아가 들었을까. 재빨리 곁눈질했다. 강동원이 마이크를 조한선에게 건넸다. ‘내 차례가 오면 뭐라고 하지’ 그때, 청아가 나를 보고 미소를 지으며 마이크를 건네주었다. 서둘러 내민 오른손이 떨렸다. 얼른 마이크를 잡고 두 손에 힘을 주었다. 오전 내내 중얼거리며 연습한 인사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고, 머리털이 쭈뼛 섰다. 이마에 식은땀이 났다. 할 수 없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안녕하세요, 보정 역을 맡은 이연우입니다.” 4년이다. 배우가 되겠다며 달려온 시간. 이내 극장 안 조명이 서서히 어두워졌다. 커다란 스크린 속에 분명 내 얼굴인데 내가 아닌 사람이 서 있었다. 2년 전만 해도 이런 순간이 올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부모님에게 연기자가 되겠다고 큰소리쳤지만 어떻게 할지 몰랐다. 배우가 되는 방법을 알고 싶었다. 인터넷과 잡지를 뒤져 여배우의 데뷔 일화를 찾았다. 공채 탤런트, 미인 대회를 거친 사람이 많았고, 길거리 캐스팅도 있었다. 나는 보통 키에 종종 예쁘장하다는 말을 듣는 정도였다. 대회에 출전할 자신은 없었다. 내세울 건 열정뿐이었다. 연예기획사에서 연기 경험이 없는 신인에게 수업도 해주고, 오디션도 소개했다는 것을 알았다. 이거다. 인터넷에서 좋아하는 배우의 소속사를 찾아 리스트를 만들었다. 15만 원을 주고 어설픈 프로필 사진도 찍었다. 자기소개서와 함께 여러 회사에 보냈다.
처음 들어간 곳은 가수 기획사였다. 아이돌이 되면 연기할 기회를 더 쉽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매일 연습실에 가서 노래하고 춤췄다. 하루는 안무 선생이 춤을 잘 추려면 골반이 잘 움직여야 한다며 나에게 등을 벽에 기대고 바닥에 앉으라고 했다. 곧 연습생 두 명이 내 다리를 한쪽씩 잡고 벽으로 억지로 밀었다. 나는 아파서 비명을 질렀다. 눈물이 났다. 다음날 일어나니, 양쪽 사타구니에 시커멓게 피멍이 들어있었다. 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통증이 심했다. 신호등이 깜박이는데도 뛰지도 못하고 뒤뚱거렸다. 그날 이후로 연습실에 가지 않았다.
하루빨리 다른 회사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스승의 날 고3 때 담임 선생님은 찾아갔다. 큰딸 보연이가 유명한 스타일리스트라고 했다. 선생님이 알려준 번호로 일주일에 한 번씩 전화를 걸어 화사를 소개해 달라 부탁했다. 언니가 귀찮아하는 걸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마침내 기획사 대표를 만났다. 계약 기간 5년에 계약금 500만 원을 받고 소속 연기자가 되었다. 처음 받아보는 큰돈이었다. 무엇보다 나에게 소속사가 생겼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당시 가장 인기 있던 여배우도 있었다. 무명 때부터 함께 해 끝내 성공을 이룬 배우와 매니저의 이야기는 업계에서도 유명했다. 나도 그녀처럼 되고 싶었다. 대표는 연기에 집중해야 한다며 휴학을 권했다. 2학년 때 휴학 신청을 하고, 매일 사무실에 가서 연기 수업을 받으며 연습했다. 배우는 뭐든 할 줄 알아야 한다길래 골프와 검도도 배웠다.
두 달 후에 평소처럼 사무실에 갔다.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여배우가 회사를 상대로 전속계약 효력 정지 소송을 했다고 한다. 유일한 간판스타였다. 그 소식을 들은 나는 걱정이 앞섰다. 보통 주연 배우가 드라마에 캐스팅되면 같은 회사 신인에게 역할을 주는 일이 흔했다. 그녀가 회사를 나가면, 나를 이끌어 줄 견인차도 없어지는 거다. 한편으로는 기회였다. 기획사가 하루라도 빨리 새로운 배우를 키워야 하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몇 달 후에, 나는 KBS 일일드라마 <사랑은 이런 거야>에 남자 주인공을 짝사랑하는 ‘은지’ 역으로 캐스팅되었다. 방송국 드라마 대기실. 텔레비전에서만 보던 배우들이 앉아 있었다. 세트장에서는 스텝들이 카메라, 조명, 마이크를 들고 분주하게 움직였다. PD의 “액션!” 소리와 동시에 모두 쥐 죽은 듯이 입을 다물었다. 혹여 대사를 실수할까 봐 긴장했다. 동경하던 배우와 직접 마주 보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꿈을 이루어 가고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찼다.
그러나 데뷔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드라마를 시작하고 두 달 만에 소속사와 문제가 생겼다. 대표는 마주칠 때마다 자가를 배신하고 더 큰 회사를 선택한 여배우를 험담했다. 일을 도맡아 하던 실장은 내가 질문을 하면 신인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거라며 일축했다. 어느 날 나를 자기 자리로 불러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히더니 여배우가 되려면 이 정도는 알아야 한다며 포르노를 틀었다.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랐다. 민망하고 수치스러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지금이라면 성희롱으로 고소했을 텐데. 불편하고 거북한 환경에서 5년이나 견딜 생각을 하니 끔찍했다. 결국 학업에 집중하겠다는 핑계로 계약을 해지했다.
드라마 국장과 PD의 배려로 드라마에 계속 출연할 수 있었다. 매니저가 대신 엄마가 진녹색 세피아를 몰고 촬영장에 데려다주었다. 남녀 주인공이 결혼하면서 그를 짝사랑하던 내 분량이 줄었다. 다음 역을 맡을 수 있도록 도와줄 매니저가 필요했다. 마침 촬영장에서 나를 눈여겨보던 매니저가 함께 일해보자고 제안했다. 유명한 배우들이 여럿 소속된 큰 회사였다. 이전의 작은 기획사보다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나의 착각이었다. 신경 써야 할 연기자가 많아서인지, 오디션 기회도 얻지 못하고 한 달, 두 달 시간만 흘렀다. 나는 점점 조급해졌다. 반년 만에 두 번째 소속사에서 나왔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어느 날 한 남자가 전화했다. 자신을 캐스팅 매니저라고 소개했다. KBS <결혼 이야기>라는 단막극에 출연할 수 있는지 물었다. 작은 역할이었지만, 연기만 할 수 있다면 상관없었다. 다른 연기자는 커다란 승합차를 타고 매니저와 스타일리스트가 수시로 챙겨주는데, 나는 공중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같은 연기자인데 처지가 다르니 서럽기도 했다. 하지만 카메라 앞에 서서 연기를 하면 행복했다. 지금 이 시간을 잘 보내면 언젠가 좋은 일이 생길 거라 믿었다.
드디어 나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영화 <늑대의 유혹> 오디션을 보게 된 거다. 이미 강동원과 조한선이 남자 주인공으로 정해졌다. 내가 맡을 역은 중요한 조연이자, 악역인 ‘보정’이었다. 영화사에는 내 또래 신인 연기자 수십 명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내 차례였다. 널찍한 방에는 김태균 감독과 남자 스텝 두 명, 카메라맨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 사람이 마주 서서 상대역이 하는 대사를 맞춰주었다. 긴장하면서도 최대한 보정이 되기 위해 집중했다. 며칠 후 1차 오디션을 통과했다는 전화를 받았다. 이후 총 5번의 오디션을 봤다. 캐스팅 매니저는 제작진이 인기 있는 모델 A와 나를 두고 고민 중이라고 했다. ‘하나님, 제발 제가 되게 해 주세요.’ 아침에 일어나서 잠들기 전까지 빌었다.
결국 내가 그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동안 맘고생 했던 시간을 한 번에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으니, 하늘이 다시 기회를 주시는구나. 영화배우가 되다니. 온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촬영 내내 맞고 계단에서 굴렀다. 몸 여기저기 멍이 들었다. 아픈데 신났다. 온몸을 던졌다. 영화는 대흥행이었다. 218만 명의 관객이 봤다. 시사회 때 주연 배우들과 나란히 서서 나도 그들처럼 스타가 될 날을 꿈꿨다.
배우가 되기로 결심하고 4년이 지났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맨땅에 헤딩했다.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도전과 좌절을 반복하면서도, 그사이에 이룬 성공은 다시 도전할 수 있는 희망이 되어주었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영화배우가 되었다. 가슴에 간직했던 꿈이 현실이 된 거다. 시사회 날, 무대에 서서 조명을 받으며 생각했다. 이대로만 열심히 하면 배우로 승승장구할 거라고. 그러나 오늘 날씨가 맑다고 해서, 내일도 좋으리란 보장은 없다.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진다. 현실은 바라는 대로만 흘러가지 않으며, 상황은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거다. 인생의 섭리를 모르는 젊은 나이에 맛본 성공은 때로 독이 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