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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부마 Oct 17. 2024

3. 꽃길인 줄 알았다

당당함과 방향을 잃으면 생기는 결과



배우로 활동할 당시 내 예명은 ‘이연우’였다. 포털 사이트에 이름을 치면 내 사진과 출연한 작품들이 나왔다. 하루에도 몇 번씩 검색해 보곤 했다. 필모그래피가 하나씩 추가될 때마다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기분이었다. 곧이어 한 방송사의 단막극 여주인공을 맡았다. 조연만 하다가 처음으로 주연을 맡아 기쁘면서도 떨렸다. 실수도 잦았지만, 활동 영역을 넓혔다는 사실에 연기자로서 한 단계 성장한 기분이었다. 내가 열심히 노력한다면 좋은 결과가 따라올 거라 믿었다.


하지만 문제는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생겼다. 소속사 없이 활동하던 시기에 캐스팅 디렉터 K가 여러 오디션을 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는 매니저 역할도 대신해 주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나를 좋아한다고 고백했다. 나는 동료 이상의 관계로 발전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고백을 거절했더니 그는 더 이상 함께 일할 수 없다고 했다. 그렇게 신뢰했던 사람을 잃었다. 일은 나 혼자만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특히 사람과의 관계는 예측할 수 없는 변수였다. 세상사는 언제나 내 계획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후 한 기획사와 계약을 맺었다. 더 많은 작품과 큰 역할을 맡게 될 거라 기대했다. 그러나 오디션도 보고 감독도 만났지만, 2년 동안 이렇다 할 역할을 맡지 못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진 나는 회사에 단역이라도 맡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실장은 이제부터는 좋은 역할만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진심을 믿었지만, 일은 계속 들어오지 않았다. 유명 배우들은 활발히 활동하며 성장해 가고 있었고, 나는 점점 더 뒤처지는 기분이 들었다.

회사에 말하지 않고 직접 독립 영화와 뮤직비디오 오디션을 보러 다녔다. 17분짜리 독립 영화와 몇 편의 뮤직비디오에 출연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종편, OTT, 웹드라마 등 지금처럼 다양한 플랫폼에서 기회가 많지 않았다. 드라마와 영화는 한정된 수의 작품만 제작되었고, 신인 배우가 설 수 있는 무대는 제한적이었다. 인기 있는 연기자들은 드라마와 예능을 쉼 없이 오갔다. 반대로 나처럼 경력이 애매한 신인은 작은 역할이라도 맡기 위해 수많은 오디션에서 경쟁해야 했다. 매번 오디션장에서 떨어질 때마다 나의 부족함이 더 크게 느껴졌다. 점차 '내가 정말 배우로서 자질이 있는 걸까?'라는 의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단순히 아쉬움이었지만, 점차 아쉬움은 자책으로 변했다. 어쩌면 내가 배우로서 자질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의심과 불안이 커졌다. 단지 그 역을 맡지 못한 게 아니라, 나 자체가 거부당한 듯한 기분에 화가 났다. 오디션장에서 감독이나 관계자들이 나를 흘끗 보고는 고개를 돌리거나, 별다른 관심 없이 면접을 짧게 끝낼 때마다 내가 쓸모없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공백기가 길어질수록 배우의 꿈과 점점 더 멀어지는 것 같았다. 영화 무대 인사를 할 때만 해도, 얼마 후에는 길을 지나가면 누구나 알아보는 배우가 되어 있을 거로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나는 어디 가도 별 관심을 받지 못하는 무명 배우에 경력이 애매한 ‘중고 신인’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데뷔한 동료들은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한 친구는 인기 드라마에서 주연을 맡아 큰 인기를 얻었고, 그 드라마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화제가 되었다. 또 다른 친구는 상업 영화에 캐스팅되어 이후 다양한 작품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으며, 여러 광고에도 출연하게 되었다. 반면 나는 여전히 단역 오디션에서 떨어지고, 작은 역할조차 잡기 어려웠다. 그들의 성공을 지켜보며 나와 비교하기 시작하자 자존감은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이미 마음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상태에서도 방송 관계자들의 내 외모에 대한 지적은 계속 이어졌다. “자기는 볼살이 너무 많다. 화면에 얼굴이 부어 보여. 볼살 좀 빼야겠다.” 거울을 보면 내 이목구비 하나하나가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꽃길일 줄 알았던 길은 어느새 가시밭길로 변해 있었다.


부모님의 관심도 부담스러웠다. 우연히 동네에서 만난 아버지 친구는 “아빠가 엄청나게 자랑했어. 탤런트 한다고. 얼른 성공해서 부모님 호강시켜 줘야지.”라고 웃으며 말했다. 오디션을 보고 돌아오면 엄마가 조심스럽게 어떻게 됐는지 물어보곤 했다. 부모로서 당연히 궁금해할 수 있는 질문이었지만, 매일같이 실패를 경험하던 나에게는 그런 관심조차 부담스러웠다. 학교에서도 상황은 비슷했다. “연예인이다!” 장난기 가득한 동기는 나를 볼 때마다 웃으며 외쳤다. 그럴 때면 나는 부끄러워 그대로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일이 없으니, 수입도 없었다. 성인이 되어서 부모님에게 손 벌리고 싶지 않았다. 스무 살 이후 줄곧 돈을 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소속사 몰래 동네 아이에게 그림을 가르치고, 카페에서 아르바이트하며 생활비를 벌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다. 내가 배우로서의 길을 계속 가야 하는지 끝없이 자신에게 물었다.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마지막 시도라는 심정으로 공채 탤런트 시험에 응시했지만,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맥이 확 풀렸다. 그동안 꼭 쥐고 있던 줄이 툭 끊어지는 기분이었다. 한때는 무대 위에서 관객을 마주했던 나였지만, 이제는 그 무대가 우주처럼 멀게 느껴졌다. 배우가 될 수 없다면 살 가치가 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나의 존재가치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제 와서 돌아보면, 꿈을 이루려면 다른 사람의 평가에 신경 쓰지 말았어야 했다. 남의 평가에 휘둘리는 순간 자신의 길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시선과 의견은 언제나 변덕스럽다. 모든 사람이 나를 긍정적으로 평가해 주지도 않는다. 다른 사람의 기준에 맞추다 보면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 나만의 목표와 열정을 잊어버리게 된다. 특히 예술은 주관적이다. 이런 분야에서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열정이 더욱 중요하다. 다른 사람의 평가에 휘둘리면 자신만의 창의성과 독창성을 잃기 쉽다. 다른 사람의 평가가 나의 자존감과 결정을 좌우하도록 내버려 두면, 내 진정한 가치와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게 된다.

결국 내가 꿈꾸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외부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가능성과 노력에 집중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포기하지 않을 힘을 얻고, 흔들림 없이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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