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문이 닫히면 또 다른 문이 열린다
“이제 시집가야 하지 않아요?” 스물다섯이 되자 오디션 현장에서 나이가 많다는 말을 듣기 시작했다. 한 관계자는 아직 인기를 얻지 못했으면 앞으로도 잘될 가능성이 없다고 말했다. 당시 활발하게 활동하는 여자 연기자는 대부분 20대 초반이었다. 나는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었다.
2004년, 드라마 촬영을 위해 방송국에 갔다. 분장실에서 머리 손질과 화장을 마치고 있는데,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데뷔 전에 같은 소속사에 있던 L이었다. 그녀 얼굴에 후광이 비쳤다. 성공한 사람의 아우라가 이런 거구나 싶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아는 척을 해야 할지 망설이다, 거울 너머로 "오랜만이야."라고 인사를 건넸다. 그녀도 밝게 웃으며 "오랜만이에요."라고 답했다. 5분 정도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유명인이 된 그녀와 여전히 무명인 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나는 열심히 하면 언젠가 나도 잘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다음 해 연말, 연예 시상식 시즌이었다. 어두운 방구석에서 텔레비전을 켰다.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레드카펫에 서서 손을 흔들며 환하게 웃는 또래 배우들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배우라는 꿈이 나를 점점 더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남들은 다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나만 혼자 제자리다.
곧이어 졸업을 했다. 연기를 위해 2년을 휴학한 끝에 6년 만에 하는 거다. 힘들 때마다 기댔던 '미대생'이라는 타이틀도 이제는 사라졌다. 대학 동기들은 취업하거나 외국으로 유학을 떠났지만, 나는 여전히 5년 경력의 무명 배우로 남아 있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점점 커져 원망과 좌절로 변해갔다.
나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게 화가 나기 시작했다. 나를 더 예쁘게 낳아주지 못한 부모님, 나를 위해 더 노력하지 않는 매니저, 나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 세상. 모두가 미웠다. 남들이 나를 실패자라고 비웃는 것만 같았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할까.
스물한 살 때 연기에 집중하기 위해 휴학을 했었다. 다양한 역할을 소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 검도, 대중 연설, 골프 등을 배웠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의 시간을 채운 것은 영화와 드라마였다. 그중에서도 일본 영화에 끌렸다. 일본 여배우들이 조곤조곤하게 대사하는 모습, 그 섬세한 감정 표현이 인상적이었다. 나도 언젠가 그렇게 정교한 연기를 해보고 싶다는 꿈을 가졌었다.
마침 그즈음, <겨울연가>가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며 한류 열풍이 시작되었다. 많은 한국 연예인들이 일본에 진출했고, 일부 기획사는 처음부터 일본 시장을 염두에 두고 신인을 키우기 시작했다. 이 모든 흐름은 내가 일본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갖게 해 주었다. 일본에서 활동하는 배우들을 보면서, 나도 일본어를 배워 일본에서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 보고 싶다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래서 강남역에 있는 일본어 학원에 등록했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과정 자체가 즐거웠다. 언젠가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배우로서 활동할 수 있기를 바라며, 2년 동안 꾸준히 일본어를 공부했다. 그 결과 원어민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만큼 실력을 쌓았고, JPT와 JLPT 2급 자격증도 취득했다.
그러나 애써 배운 일본어를 쓸 기회는 많지 않았다. 같은 소속사 배우를 만나러 온 일본 팬과 매니저 사이에서 잠깐 통역을 해준 게 전부였다. 수년 동안 갈고닦은 칼로 무른 오이를 자르는 기분이었다. 일본어 공부를 통해 새로운 활동 무대를 얻고 싶었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도쿄에서 살면 어떤 느낌일까 궁금해졌다.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으면서 마음이 울적한 나날이 이어졌다. 그럴 때, 벚꽃이 핀 오모테산도 거리를 걷는 나의 모습을 상상하면, 첫사랑에 빠진 것처럼 설렜다. 일본에서라면 또 다른 꿈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강남역에 있는 일본 전문 유학원에 찾아가 상담을 받았다. 도쿄에 있는 어학교 중 어디가 괜찮은지, 어디서 살아야 할지, 비용은 얼마가 필요한지. 처음에는 유학에 대해 한번 알아보자는 생각이었지만, 정보가 쌓일수록 머릿속에 구체적인 계획이 떠올랐다. 세부 사항을 빈 종이에 빼곡하게 적었다.
“나, 도쿄로 갈 거예요” 부모님에게 통보하듯 말했다. 여자 혼자 외국에 사는 건 위험하다며 말리시는 부모님에게 “내가 이대로 죽는 거 보고 싶어요?”라고 내뱉고 말았다. 부모에게 자식이 죽겠다는 말을 듣는 것보다 더 무서운 일이 있을까. 하지만 이 선택이 마지막 희망처럼 느껴졌다. 새로운 곳에서 다시 시작해야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벚꽃이 흩날리던 3월, 혼자 도쿄행 비행기에 올랐다. 낯선 곳으로 향하는 두려움보다는 한국을 떠난다는 해방감이 더 컸다. 앞으로 어떤 미래가 펼쳐질까. 수많은 생각들이 오가는 사이 비행기는 나리타 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 따뜻하고 습한 공기가 온몸을 감쌌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 안심이 되었다.
내 몸만 한 3단 이민 가방을 끌고 공항 밖으로 나왔다. 유학원에서 소개해 준 승합차 운전사가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차를 타고 도심으로 이동하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일본식 한자와 히라가나, 가타카나가 뒤섞인 간판들, 기무라 타쿠야가 거품이 가득한 맥주잔을 들고 있는 전광판을 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도쿄다…”
아저씨는 허름한 5층 건물 앞에 나를 내려주고 떠났다. 현관으로 들어섰는데 엘리베이터가 보이지 않았다. 캐리어를 들고 낑낑대며 계단을 올라갔다. 2층 사무실에서 한국인 남자가 집 열쇠를 주었다. 3층으로 올라가 방 번호가 적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집은 사진에서 본 것보다 훨씬 좁고 어두웠다. 부엌에는 1인용 냉장고와 탁자, 방에는 작은 TV와 싱글 침대 두 개, 붙박이장 하나, 욕실에는 오래된 욕조와 세면대, 세탁기가 있었다. 용도를 알 수 없는 작은 문을 열어보니 변기가 덩그러니 있었다. 뚜껑 위에는 먼지 쌓인 해바라기 조화가 놓여 있었다. 내가 생각했던 집이 아니었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눈물이 쏟아졌다. 이대로 서울로 돌아갈까, 내가 여기서 지낼 수 있을까. 그러나 마음속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서 포기하면 안 돼.'
예상과 다르게, 때로는 더 나쁜 방향으로 상황이 전개될 때도 있다. 그럴 때는 멈춰 서서 내 선택을 돌아보고, 어떻게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있을지 생각해야 했다. 실패는 고통스럽지만, 그 안에서 배우는 것도 있었다. 주저앉아 운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이제 와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새로운 문 뒤에 숨겨진 기회를 찾아가기로 했다. 울음을 그치고 눈물을 닦았다. 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실패는 나를 멈추게 했지만, 동시에 더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기댈 사람이 없는 이곳에서, 나를 일으켜 줄 유일한 사람은 결국 나 자신이었다. 나를 믿고 다시 나아가는 것.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