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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부마 Oct 16. 2024

1. 미대생이 왜 연기를 해요?

모르겠으면 해 보는 수밖에

학교가 끝나면 혼자 지하철과 마을버스를 갈아타고 네다섯 시간씩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보란 듯이합격했다.



“홍대 미대 다니는데 왜 연기를 하려고 해요?”

배역 오디션을 보러 가면 감독과 관계자에게 수시로 듣는 질문이었다. 그 질문에는 아마 두 가지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하나는, 홍대에 갈 정도로 그림을 잘 그리면서 굳이 왜 연기를 하려는지 정말 궁금해서. 다른 하나는, 연극영화과 출신도 아니면서 연기를 하겠다고 기웃거리는 나에게 텃세를 부리고 싶어서. 2002년 당시만 해도 연예계는 연극영화과 출신들이 꽉 잡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무모하게 연기를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어릴 때부터 나는 그림을 잘 그린다는 칭찬을 많이 들었다. 동네 미술 학원 원장님은 고작 여섯 살이었던 내 재능을 알아봐 주었다. 학원비도 받지 않고, "지희는 꼭 미술 시키셔야 해요"라면서 엄마를 설득했다.  초등학교에 가서는 여러 미술 대회에서 상을 탔다. 5학년 겨울, 언니가 플루트로 선화 예술 중학교에 합격했다. 당시 나는 언니가 하는 모든 것을 따라 하고 싶었다.  학교가 끝나면 혼자 지하철과 마을버스를 갈아타고 네다섯 시간씩 그림을 엄마를 졸라 잠실 집에서 광장동에 있는 선화 예중 근처의 입시 미술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보란듯이 합격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반대했다. 자식 둘을 사립학교에 보낼 형편이 되지 않는다며. 예술 중학교의 학비는 웬만한 대학교 등록금만큼 비쌌다. 삼십 년이 지난 후에, 내가 엄마가 되고 나서야, 자식이 하고 싶어 하는 것을 지원해 줄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속상한 일인지 알았다. 하지만 열두 살의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언니는 되고 나는 안된다는 것은 너무 불공평하게 느껴졌다. 분하고 속상했다. 사흘 동안 울면서 조른 끝에 아버지를 항복시켰다. 그렇게 나는 예술 중학교에 입학했다.


3년 후, 또 한 번의 입시를 치러 예술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하루 24시간을 대학 입시를 위해 썼다. 3개월에 한 번씩 실기시험을 봤지만, 2년 동안 늘 등수가 낮았다. 어릴 때는 내가 그리고 싶은 것을 마음껏 그렸다. 하지만 예술 고등학교에서는 대학에서 정한 기준에 맞춰 매일 같은 것만 그려야 했다. 경쟁이 치열했고, 하루도 쉬지 않고 연습했지만 성적은 좀처럼 오르지 않았다. 그림을 그리는 것이 점점 괴로워졌다.

2학년 학기 말에 실기시험 성적표를 받았다. 53명 중 52등. 성적표에 찍힌 등수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차마 부모님께 보여줄 수가 없었다. 식구들이 다 잠든 밤에 성적표를 꿀꺽 삼켜버렸다. 목이 찢어질 듯 아팠다. 다음 날, 나는 엄마에게 내가 지난밤에 한 짓을 실토할 수밖에 없었다. 이비인후과에서 진료를 받고 나오면서 엄마는 혼내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부모님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유명한 입시 미술 학원으로 옮겨 합격생들이 그린 그림을 죽어라 따라 그렸다. 결국 고3 첫 실기시험에서 1등을 하기는 했다. 그와 동시에 미술에 대한 열정도 사라졌다.



어느 날, 학교에서 드라마 촬영이 있었다. 배우들이 연기하는 모습을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나도 모르게 내가 카메라 앞에 선 모습을 상상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얼마 후, 패션 잡지 '쎄씨'에서 학생 모델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았다. 사진과 자기소개서를 보내고 서류 심사에 합격했다. 명동의 쇼핑센터에서 열린 본선에서는 순위에 들지 못했지만, 쎄씨 기자가 모델이 되어달라고 했다.

방과 후에 교복을 입고 스튜디오로 갔다. 전문 아티스트가 화장과 머리를 만져주었다. 한창 유행하는 예쁜 옷도 입었다. 어두운 방에 커다란 조명과 반사판이 빛나고 있었다. 사진작가의 주문에 따라 자세를 취했다. 카메라 셔터가 터질 때마다 묘한 희열을 느꼈다. 5명의 스텝이 모두 나를 보고 있다. 내가 엄청나게 특별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잡지가 나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발매일에 서점에 달려가 잡지를 펼쳤는데, 사진 속 나는 내 상상과 달랐다. 볼살은 터질 것 같았고 표정도 영 어색했다. 더 예뻐지고 싶었다. 더 나아지고 싶었다. 살을 빼고 혼자 거울을 보며 표정 연습을 했다. 점점 촬영이 재미있어졌다.


고3이 되어, 나는 부모님께 미술을 그만두고 연극 영화과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부모님은 강하게 반대하셨다. 그동안 들인 시간과 노력이 아깝지 않냐며, 연기에서 성공하지 못하면 어떻게 살 거냐고 다그쳤다. 부모님의 걱정이 이해되었지만, 나는 더 이상 미술을 계속하는 나의 미래가 그려지지 않았다. 결국 부모님과 협상해 미대 입시에 실패하면 연극 영화과에 도전하기로 했다. 홍익대학교 회화과에 합격했고, 잠시 연극 영화과에 대한 꿈을 잊었다.

그러나 대학에 입학한 후, 나는 큰 공허함을 느꼈다. 수업은 점점 지루하게 느껴졌고, 학교에 있는 시간이 더 이상 즐겁지 않았다. 종종 강의 시간에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거나, 강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흘려듣기 일쑤였다. 친구들과 함께 있어도 마음은 늘 허전했다. 무언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기분이었고, 그 공허감을 채우기 위해 무작정 캠퍼스를 벗어나고 싶을 때도 많았다. 연기를 하고 싶다는 열망이 다시 찾아왔다. 십 년 넘게 해온 미술을 그만두는 것이 망설여졌지만, 지금 도전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새로운 일을 시도할 때 가장 먼저 발목을 잡는 것은 '매몰 비용'이었다. 그동안 들인 돈, 시간, 노력, 재능이 아깝다는 생각. 그리고 실패에 대한 두려움. 그러나 스무 살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아가는 시기였다.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그냥 해보는 것이 답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림을 그만두고 연기를 하기로 했다.


스무 살, 서른 살, 그리고 마흔. 나는 새로운 시도를 계속해왔다. 세상과 나 자신에 대해 알아가며, 내가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원하는지를 찾아갔다.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두려움을 무릅쓰고 도전했다. 20대와 30대에는 실패를 두려워하기보다, 모험을 즐기며  최대한 다양한 것을 시도하고 경험했다. 좋은 경험도, 나쁜 경험도, 모두 나를 성장시키는 밑거름이 되었다.


마흔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두렵고 불안하더라도, 젊을 때는 가능한 많은 도전과 경험을 해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그것이 나를 지금의 나로 만들어주었고, 앞으로도 계속 나아갈 힘이 되어줄 거니까. 이것저것 따지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내가 잘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직접 해봐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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