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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부마 Oct 18. 2024

6. 결혼이 가장 어려웠다

100번의 선


스물여덟에 처음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회사 생활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깔끔한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회의실에 모여 토론하고, 커피와 도넛을 들고 나누어 먹는 장면을 상상했다. 의사인 남자친구와 어울리는 멋진 커리어 우먼이 되어 결혼에 골인하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그 꿈은 갑작스러운 이별로 무너졌다. 뒤통수를 세게 맞은 것처럼 정신이 아찔했다.


다음날 아침, 억지로 몸을 일으켜 집을 나섰다. 만원 버스에 올라탔다. 창밖은 잿빛이었다. 버스 손잡이를 잡고 서 있는데, 가슴이 답답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아무리 참고 숨을 깊이 들이마셔도 멈출 수 없었다. 이런 상태에도 회사에 가야 하는 내 처지가 안쓰럽고 한심했다. 달달한 커피라도 마시면 기분이 나아질까 싶어 회사 건물 1층에 있는 스타벅스에 들러 캐러멜 마키아토를 마셨다. 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울적하고 무거웠다.


압구정동이 한눈에 보이는 70평 사무실. 직원은 다섯 명뿐이었다. 외딴 섬처럼 떨어진 책상에 앉아 투자를 원하는 영화 시나리오와 공연 기획서를 읽었다. 문화 창업투자회사는 예술과 공연 기획에 투자하고 수익을 나누어 받았다. 회사가 투자했던 작품 중에는 내가 출연했던 영화 <늑대의 유혹>도 포함되어 있었다. 연기에 미련이 남아 있었기에 관련된 일을 하고 싶어 선택한 직장이었다. 그런데 종일 책상에 앉아 문서만 읽으니 지루했다. 가끔 참석하는 시사회와 월급이 없었다면 버티기 힘들었다.

직속 상사인 주 실장은 종종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지희 씨는 일 왜 해요? 그냥 결혼하지 그래요?" 어떻게든 내 밥벌이는 하면서 사회에 적응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그런 말을 들으면 “네가 뭘 안다고 함부로 말하냐"라고 따지고 싶었다. 동시에 ‘내가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게 맞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앞으로 뭘 할 수 있을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 열심히 하고 싶은데, 도대체 뭘 열심히 해야 하나. 열여덟 살 때부터 일에서도 사랑에서도 성공한 여자가 되고 싶었지만, 현실은 달랐다. 하루라도 빨리 여기서 벗어나고 싶었다.


딱히 내세울 경력이 없는 20대 후반 여자가 상황을 바꿀 방법이 뭐가 있을까. 주 실장의 말을 인정하는 것 같아 자존심이 상했지만, 결국 결혼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제까지 내가 바라던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여성'과는 다른 길이지만, 지금은 그 방법밖에 없었다.

친구들도 한 명씩 결혼하기 시작했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서른이 넘으면 결혼 시장에서 경쟁력이 떨어진다고 하지 않나. 그런데 갑자기 남자를 어디서 찾는단 말인가.

마침 언니 친구가 결혼정보 회사를 통해 만난 남자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청담동에 있는 사무실에서 커플 매니저를 만났다. 그녀는 노트에 나의 조건을 하나씩 적어 나갔다. ‘스물여덟 살, 나이가 조금 많지만 20대, 서울 4년제 대학교 졸업, 외모 좋음, 회사 정규직, 부모님 송파구에 자가 소유, 등급 A.’ 여성 회원은 소개를 5번 받을 수 있었다. 매니저는 내가 결혼할 때까지 소개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렇게 결혼 시장에 뛰어들었다. 남부럽지 않은 결혼을 하고 싶었다.‘

다음 날 회사에 있는데 커플 매니저에게 전화가 왔다. "지희 회원님, 남자분 조건을 알려드릴게요. 나이는 32세, 정형외과 의사, 집은 여의도, 아버지 의사, 어머니 주부, 연봉은 2억 정도예요." 그녀는 숨도 쉬지 않고 상대 남성에 대해 설명했다.

그 후로 주말마다 선을 봤다. 어떤 날은 점심과 저녁에 두 번 나가기도 했다. 2년이 지났다. 의사, 변호사, 회계사, 변리사, 사업가, 교수, 금융 종사자, 대기업 회사원, 공무원 등 한국에서 좋다는 직업군은 거의 다 만나봤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싱글이었다. 직업도 인간성도 좋은 사람이 간혹 있었지만, 특별한 감정이 생기지 않았다. 세상 일은 원래 마음대로 되지 않는 법이지만, 인연을 찾는 일은 그중에서도 가장 어려웠다.




남들은 잘만 하는 결혼, 나는 사람 한 명 찾기가 왜 이렇게 힘든 건지. 혹시 나에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무렵, 한 남자를 만났다. 이전까지는 서울대 출신 남자가 최고인 줄 알았는데, 그는 말로만 듣던 미국 명문대 하버드를 졸업했다고 했다.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을 만나는 기분이었다. 갸름한 얼굴에 호리호리한 몸매, 중저음의 목소리를 가진 그를 보자마자 호감이 생겼다. 당시 나는 이직에 성공해 전시 기획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는 직접 작품을 살 정도로 예술에 관심이 많았다. 다음 날, 그가 내가 다니는 회사에서 기획한 전시를 보러 오면서 우리는 금방 가까워졌다.

교제한 지 한 달 후, 그가 자신의 집에 초대했다. 집은 청담동 주택가에 있었다. 연예인, 정치인들이 많이 살기로 유명한 동네였다. 높은 담장 안에 녹색 잔디가 깔린 정원이 있는 단독주택이 있었다. 그를 따라 대문을 향해 걸어가며 생각했다. '이렇게 멋진 삶도 있구나. 나도 이 세상에 속하고 싶다.'

그러나 그림 같은 집에는 중요한 것이 빠져 있었다. 바로 자유였다. 돈과 명예를 다 가진 부모는 자식의 삶까지도 마음대로 하려 했다. 하루는 그의 어머니가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자마자 날카로운 목소리로 따졌다. "너, 내가 천천히 하라고 했지?!" 영문을 모르는 나는 통화가 끝날 때까지 계속 "네..."라는 말만 하며 듣고 있었다. 그에게 전화해 어찌 된 일이냐고 물었다. 그는 결혼을 빨리하고 싶다고 했고, 어머니는 천천히 하라고 하다 감정이 격해져 다툰 모양이었다. 그의 말을 들으며 문득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나에게 전화를 걸어 따질 일인가?' 그는 나를 만나기 이전에도 결혼하고 싶었던 여자가 두 명 있었는데, 부모님이 반대했다고 했다. 한 명은 여자 집이 남자 집보다 잘 산다고, 다른 한 명은 몸이 약하다고. 그 순간, 나는 이 결혼이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부모님의 간섭을 받으며 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와 이별을 택했다.




그 일을 계기로 나는 결혼에서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됐다. 배우자가 꼭 한국에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나의 기준은 내가 세우기로 했다.

결혼을 일찍 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다. 그때 나는 결혼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나 자신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고,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은지도 막연했다. 내 인생인데, 뚜렷한 목표와 방향이 없었다. 2년 동안 비싼 수업료를 내고 배웠다. 좋은 관계를 위해서는 나 자신부터 단단하게 가꾸는 게 우선이라는 사실이다. 내 내면을 먼저 정돈하고 나서야, 진정으로 나와 함께할 사람을 찾을 수 있었다.


인생에서, 특히 결혼과 배우자를 선택할 때 나만의 기준이 필요한 이유는 분명하다. 결혼은 두 사람이 함께 살아가며 만들어가는 삶이다. 상대방의 조건이나 사회적인 기준에 맞춰 선택하면, 내가 원하는 삶과 점점 멀어질 수 있다. 각자의 가치관, 생활 방식, 미래에 대한 기대는 다 다르기 때문이다. 남이 설정해 놓은 기준에 맞춰 배우자를 선택한다면, 그 차이에서 갈등을 겪을 가능성이 크다.

배우자는 평생 함께 살아갈 파트너다. 나의 삶의 방향이나 가치와 맞는 사람이어야 서로를 이해하고 함께 성장할 수 있다.

결국, 삶에 대한 기준은 스스로 찾아야 하는 거다. 남들이 정해준 길이 아닌, 내가 원하는 삶의 방향과 가치를 찾아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행복으로 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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