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보는 세상
회사에 다닌 지도 어느덧 일 년. 결혼을 통해 삶에 변화를 주고 싶었지만, 결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숨통이라도 트여 보자는 마음에 여름휴가에 뉴욕으로 떠나기로 했다. 대학원에 다니는 미대 동기도 만나고, 나 자신에게 휴식을 주고 싶었다.
14시간 후, 뉴욕 JFK 공항에 도착했다.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영화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에서 노라 존스가 연기한 엘리자베스가 뉴욕 공항에서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던 장면처럼, 나도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경험들을 상상하며 설렜다.
짐을 찾아 공항 밖으로 나오니, 드라마 <섹스 앤드 더 시티>에서 봤던 노란 택시들이 길게 줄지어 서 있었다. "줄 서요!" 두리번거리던 나에게 안내원이 소리쳤다. 택시를 타고 맨해튼으로 들어서자, 창 너머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눈에 들어왔다. 차들은 경적을 울려대며 정신없이 움직였다. '진짜 뉴욕에 왔구나!' 실감이 났다.
친구네 집에 도착 이후로 아침부터 밤까지 도시 곳곳을 누볐다.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었고, 3시간을 돌아다녔지만 겨우 반쯤 본 듯했다. 사라 제시카 파커처럼 한 손에 커피를 들고 센트럴파크를 산책하며 뉴요커가 된 기분을 만끽했다. 현지인이 알려준 맛집에서 햄버거를 먹었다. 브루클린 다리도 건넜다. 1887년에 문을 연 오래된 식당에서 먹은 두툼한 스테이크는 내가 지금까지 먹어본 것 중 가장 맛있었다. 차이나타운에서 딤섬과 버블티를 즐기며 걸을 때는 마치 영화 <첨밀밀> 속 장만옥이 된 기분이었다.
뉴욕은 도시라기보다는 작은 지구 같았다. 리틀 이탈리, 차이나타운, 코리아타운처럼 특정 민족들이 모여 사는 구역이 있는가 하면, 브루클린처럼 다양한 민족이 어우러진 곳도 있었다. 세계 각국에서 온 문화의 씨앗들이 이곳에서 자라 새로운 문화를 꽃피우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서로 다른 문화들이 융합되며 뉴욕만의 독특한 퓨전 문화가 태어났다. 그 덕분에 뉴욕에서는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색다른 음식을 손쉽게 접할 수 있었다.
거리에서 마주친 사람들은 저마다 개성이 뚜렷했다. 머리에 터번을 두르고 말쑥한 제복을 입은 남자, 코에 피어싱을 하고 팔에 문신을 한 여자, 60년대 영화 속 장면처럼 드레스를 입고 다니는 노부인까지. 이곳에서 사람들은 각자 자기만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28년 동안 한국에서만 살아왔던 나에게 뉴욕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이곳이라면 나도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나만의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휴가가 끝나고 한국에 돌아온 지 세 달 만에 전시 기획사로 직장을 옮겼다. 외국의 유명 작품을 다루면서 외국인과 일할 기회가 많았지만, 내 영어 실력은 간단한 대화 정도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영어가 능숙하면 일도 수월하고 더 좋은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영어를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졌고, 지난여름 뉴욕에서 보낸 시간들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다시 뉴욕에 간다면 최소한 일 년은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더욱이 2년 동안 열심히 선을 봤지만 소득이 없었다.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인연을 기다리다 뉴욕에서 살아보지도 못하고 나이만 먹는다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결국, 미국 유학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도쿄에 갔을 때처럼 인터넷에서 어학원을 검색하고 유학원 상담도 받았다. 헌터 칼리지라는 공립 대학의 영어 프로그램이 눈에 들어왔다. 수업 평판도 좋고, 학교 시설도 이용할 수 있었으며, 수업료도 다른 곳보다 저렴했다. 학교를 결정하고 예산도 짰다.
이제 남은 건 부모님의 허락이었다. 예상대로 아빠는 내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소리쳤다. "너 나이가 몇 인 줄 알아? 스물아홉이야! 지금 미국에 갔다 오면 나이 차서 결혼도 못 해!" 당시엔 서른이 넘으면 ‘노처녀’라는 말을 듣기 일쑤였다. 나도 혼자 처량하게 살게 될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결혼은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딱 일 년만 영어 공부하고 올게요. 남편도 데려올게요." 어떻게든 떠나고 싶었던 나는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하고서야 부모님의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회사를 관두고 3개월 동안 토플 학원에 다녔다. 미국에 있을 수 있는 기간이 일 년밖에 없었기에 수준이 가장 높은 반에 들어가야 했다. 미국의 벼룩시장 겸 구인 사이트인 ‘크레이그 리스트’에서 숙소도 찾아냈다. 다행히도 룸메이트는 한국인이었다. 도쿄에서처럼 덜컥 계약했다가 실망할까 봐 이번엔 뉴욕에 사는 친구에게 미리 집을 확인해 달라고 부탁했다. 친구의 말에 따르면 집도 괜찮고 위치도 좋았다. 드디어 뉴욕행 비행기표를 샀다.
혼자 비행기를 타고 JFK 공항에 도착했다. 뉴욕에 두 번째 오는 거라, 이번에는 자신 있게 택시를 타고 맨해튼 83번가 아파트에 도착했다. 무거운 이민 가방을 들고 3층까지 올라갔다. 오래된 나무 문을 두드리자, 페이스북 사진으로 본 메이 언니가 문을 열어주었다. 공간은 15평 정도였고, 창가에는 퀸사이즈 침대와 공기 침대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처음 접한 공기 침대는 움직일 때마다 뿌드득 소리를 냈다.
어퍼이스트는 조용한 지역이었지만 매일 아침 사이렌 소리가 자명종처럼 울렸다. 집을 나서면 모든 것이 다 있었다. 길거리 핫도그부터 고급 레스토랑, 센트럴파크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까지.
매일 아침 학교에 걸어갔다. 로비는 아직 십 대 티를 벗지 못한 학생들로 붐볐다. 그 속에서 출입구를 통과하면서 마치 대학생 새내기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었다. 그 시절 배우의 꿈을 좇느라 제대로 누리지 못했던 대학 시절을 이제야 되찾은 느낌이었다.
매일 4시간씩 문법, 회화, 듣기, 쓰기, 문학을 배웠다. 수업이 끝나면 혼자 뉴욕의 곳곳을 다녔다. 지하철 안에서 백인, 동양인, 흑인, 라틴계 사람들이 어우러져 있는 모습을 보며 ‘이 세상에서 나는 정말 작은 존재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이 무한한 세계를 더 알아가고 싶다는 욕구가 커졌다.
뉴욕에서 보낸 날들은 나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바꿔놓았다. 마천루 아래를 바삐 걸어가는 사람들, 커피를 계속 내리는 바리스타, 뜨거운 날씨에도 푸드트럭 안에서 땀을 흘리며 일하는 요리사. 모두 자신의 꿈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도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해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잊고 있던 삶에 대한 열정이 다시 가슴속에서 불타올랐다.
뉴욕은 나에게 단순한 여행지가 아니었다. 이 도시는 나의 모든 감각을 깨웠다. 매일같이 새로운 자극과 경험을 선사했다. 센트럴파크에서 들려오는 거리 음악가들의 연주, 미드타운에서 흘러나오는 다양한 언어들, 브루클린 거리에서 느껴지는 활기찬 에너지. 이전에는 경험할 수 없던 것들이었다. 이 경험들이 나에게 새로운 영감과 아이디어를 주었다. 새로운 환경은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다양한 문화가 뒤섞인 도시의 매력은 단지 ‘다름’에서 그치지 않았다.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의 삶과 문화를 직접 마주하며, 내가 얼마나 작은 세상 속에 갇혀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세계 각국에서 온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도시에서 다양성을 경험하고, 더 넓은 시야를 가지게 되었다.
젊은 시절, 새로운 도전을 꿈꾸던 나에게 뉴욕은 배움의 장 그 자체였다. 자신의 꿈을 향해 치열하게 달리는 사람들을 보며, 나도 함께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열망이 생겼다. 뉴욕은 나를 끊임없이 자극했고, 나는 그 자극을 받아들였다. 뉴욕은 가능성의 도시였고, 나의 새로운 무대였다.